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24화 (124/257)

124화.

폴라가 잠시 주저하더니 품 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짙은 녹색으로 염색한 가죽을 덧대 만든 미레아의 지갑이 확실했다.

“안에 든 돈은 아직 건들지 않았어.”

미레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갑을 건네받았다. 그녀가 한 것은 지갑 속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것보다 먼저 다른 것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로켓은 뭐야?”

금색으로 빛나는 원통형의 로켓이 장식처럼 지갑에 매달려 있었다. 미레아는 그것이 열린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폴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겉으로 봤을 때 비싸 보이길래 궁금해서 열어 보기는 했지만, 내용물은 손대지 않았어. 어차피 별거 아니던데!”

미레아는 로켓의 윗부분을 열어서 내용물을 손바닥 위에 쏟아 내었다. 그것은 새끼손톱만큼 작은 들꽃들을 말린 것이었다. 파울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미레아 녀석…… 대체 그게 뭐라고.’

어쩐지 조금은 허탈할 지경이었다. 그런 걸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은 미레아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파울로에게 사수했었던 꽃 팔찌였다. 파울로는 만든 사람이 누구였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아리스가 뇌물이랍시고 미레아 정원에서 꺾은 들풀로 엮어다 준 것이었다.

미레아가 그것을 책 사이에 넣어 말리고 다시 로켓에 담아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로켓 안에 고이 담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찾았어?”

아리스가 글로리아와 시안을 대동하고 그들에게 다가오며 묻자 미레아는 자신의 지갑을 보란 듯이 흔들어 보았다.

“폴라, 사과 인사는?”

“죄송합니다.”

폴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는지 더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제대로 해야지.”

“정말 정말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괜찮아. 하지만 다음부터 이러면 안 돼.”

“저희가 제대로 교육하겠습니다.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시게 만들어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글로리아가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저런 미인이 수심 깊은 얼굴을 하니 미레아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데도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허겁지겁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이만하면 됐어요. 폴라도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고 제 지갑도 무사하고…… 그렇지 폴라? 또 안 그럴 거지?”

“네…….”

힐데가 말끝을 흐리는 폴라의 등을 엄하게 철썩 때렸다.

“너 똑바로 대답해.”

그러자 폴라가 힐데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네, 네! 안 그럴게요! 정말로요!”

“좋아.”

미레아가 만족한 듯 양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등을 폈다. 그리고는 손으로 폴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너는 마녀가 아니야. 그러니까 반듯하게 살아. 세상이 너를 마녀라 몰아가도 너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확신만 있다면 그런 것쯤은 문제 되지 않아. 알겠니?”

아리스는 미레아처럼 저런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에 미레아가 폴라에게 먼저 충고를 하지 않았다면 아리스는 그녀에게 마을 사람들이 마녀라고 부를 만한 진짜 이유를 만들어 주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니까. 하지만 글로리아와 힐데는 그런 짓들을 반대했고 폴라 역시 그들의 말대로 반성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간에서 손가락질을 받아도 올바른 길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고 있으니 아리스는 자신이란 존재가 이렇게까지 초라할 줄은 몰랐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

미레아의 목소리에 아리스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미레아는 지갑을 되찾은 것이 기쁜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지갑을 위아래로 던졌다가 받자 끝에 달린 로켓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아리스는 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진 못했어도 그 로켓 때문에 미레아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을 아쉬워했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글로리아 씨와 이야기하는 건 즐거웠어?”

미레아가 짓궂게 묻자 아리스는 글로리아를 생각해서 일부러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미레아는 싱글거리던 얼굴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쭉 켰다.

“자, 다른 일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들 돌아가자.”

그리고 글로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세를 지고 갑니다.”

“아니어요. 당신께서 신세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신세를 졌지요.”

글로리아는 미레아의 손을 맞잡으며 갸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양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아리스에게도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아리스 님, 만나 뵈어서 너무 즐거웠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하루가 되었답니다.”

“그랬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당신을 생각하며 그 앞길에 밝은 빛이 가득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겠어요.”

“아니…… 그러지 마세요…… 정말로 그러지 마세요.”

대놓고 차 버렸는데 저렇게 나오니 아리스는 다시 진땀이 날 것 같았지만 글로리아가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제법 완고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그마저도 저에게는 작은 즐거움이 된답니다.”

“이야, 좋겠네. 아리스는 좋겠어.”

파울로가 그를 놀려 대었다. 아리스는 파울로를 한번 쏘아본 다음에 미레아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미레아도 파울로처럼 아리스를 놀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당초의 목적을 해결한 이상 아리스는 어서 이 성을 떠나고 싶었다. 이 이상 글로리아와 있기가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아, 아리스 님. 제가 우리가 운명으로 엮인 사이라고 생각한 우연 중 하나가 뭔지 아세요?”

이 이상은 그만해 주었으면 싶었지만 글로리아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다.

“아리스 님 생일이 3월 12일이잖아요? 제 생일은 12월 3일이랍니다. 서로의 생일에서 월과 일의 숫자가 바뀌는 게 참 재미있지 않나요?”

“우연입니다. 정말로 우연이라고요.”

아리스가 난처하게 웃고 있을 때 파울로와 리비엘로는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미레아의 생일도 공교롭게 12월 3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레아가 아리스의 생일을 쉽게 기억하고 챙겨 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글로리아처럼 월과 일의 숫자가 서로 바뀐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미레아는 난처하게 웃는 아리스에게 참견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아는 척을 하진 않았지만, 갑자기 글로리아에게 이상한 동질감이 샘솟았다. 리비엘로에게 자신과 같은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는 소리를 들은 터라 더 그랬다.

하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고 글로리아와 자신의 공통점은 생일 이외에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자신은 저만큼 아름답지도 않았고…….

아리스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뭐,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만날 수 있겠지요.”

“부디 그래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그럼!”

이쯤 하면 되었다고 생각한 아리스는 티가 나지 않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른 일행들도 성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아리스의 뒤를 따랐다.

“그래도 지갑 찾아서 다행이네.”

“응.”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그 로켓은 뭐야? 돈보다는 그걸 찾으려고 그랬던 거지?”

미레아가 히히 웃으며 지갑을 아리스의 눈앞에서 흔들다 품 안에 넣었다.

“비밀!”

그러면서 얄밉도록 웃는 미레아를 마주 보며 아리스가 피식 웃었다. 이야기를 나눈 쪽은 글로리아였는데 어째서인지 그 이야기를 끝낸 지금은 미레아가 더 환하게 보였다. 글로리아와 이야기 하는 동안 자신을 빛으로 이끄는 것은 미레아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레아 덕분에 지금까지 많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게 어쩐지 가슴 벅찬 기분이 들어 아리스는 제멋대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 시켜야 했다. 미레아의 모습을 보면 괜히 기분만 더 붕붕 뜨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그녀보다 앞에서 걸었다. 미레아가 뒤로 처지자 리비엘로가 걸음을 늦춰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아리스에게 심술을 부린 것치고는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는다.”

리비엘로의 말을 들은 미레아는 양손을 뒤로 돌려 뒤통수를 받히고 걸었다.

“뭐, 심술도 나고 질투도 나서 골려 주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좀 시달리다 온 모양새던데 그거면 됐지.”

그러자 리비엘로가 작게 웃었다.

“네가 질투도 다 하니?”

미레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그런 미인이 들이대는데! 질투가 안 날 리가.”

미레아는 마치 아리스에게 질투가 났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리비엘로는 그게 글로리아에게 보내는 질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사이 미레아가 은밀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런데 글로리아 씨가 나와 같은 서리 여신의 조각이란 소리는 뭔지 더 자세히 설명해 볼래?”

리비엘로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골치 아프단 얼굴을 했다.

“난 서리 여신의 신녀이고 예지 능력이 있어서 알아차렸을 뿐이야. 전에 네게 설명했듯 나는 서리 여신의 조각이 어떤 역할인지까지는 알 수 없어. 다만 너와 기운이 똑같아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

“하지만 나랑 글로리아 씨는 서로 겹치는 점이 없지 않나?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미레아는 미간을 좁혔다.

“나랑 생일이 같은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겠지?”

“글쎄.”

리비엘로는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서리 여신의 뜻을 전부 알 순 없다 보니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너와 그녀가 어떤 역할을 부여받을 때 태어난 날이 중요한 것이었는지는 나도 모르지.”

“에이, 그럴 거면 아예 모르고 사는 쪽이 더 좋았을 수도 있는걸.”

어설프게 알아 봤자 괜히 호기심만 일게 하고 말이다. 미레아는 툴툴거리면서 머리를 헝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젠 서리 여신의 조각이 뭔지 신경 쓰지 않을래! 어차피 알아도 바꿀 수 없고…… 무엇보다 난 이 세계에 불필요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거든. 각자 맡은 바 임무가 하나씩은 있다는 소리지. 그러면 내가 서리 여신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 아닐까?”

미레아다운 말에 리비엘로가 웃었다.

“그 말이 정답일 것 같아.”

“그러니 나는 나대로 살래.”

미레아가 경쾌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아리스가 돌아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이유도 모르고 함께 웃어 주었다.

이후 숙소로 돌아온 미레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지갑에 달려 있던 로켓을 분리해 가방 깊숙이 숨긴 것이었다. 보잘것없는 것이라 해도 아리스가 그것을 팔에 묶어 주던 그 당시의 분위기만큼은 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미레아는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아리스가 미레아에게 해 준 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지만 이것만큼은 당분간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그러니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 꼭꼭 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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