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23화 (123/257)

123화.

“그러다 아리스 님께서는 곧 자리를 뜨셨고…… 저는 그게 못내 아쉬워 그 주변을 뱅뱅 돌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사내들과 부딪혀서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답니다. 당시의 저는 큰길을 돌아다닐 때는 얼굴을 가릴 수 있도록 커다란 후드를 썼었는데 부딪치면서 그 후드가 벗겨진 거예요. 제 얼굴을 확인한 남자는 시비를 거는 것을 멈추고 제게 추파를 날리며 강제로 제 몸에 손을 대려 했지요.”

글로리아는 벌레가 온몸을 기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의 그 수치심이란! 사내들은 자신의 얼굴만 보고 자기 멋대로 취급하려 들었다. 글로리아는 그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만 아니라면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하지만 벗겨진 후드 아래로 드러난 글로리아의 얼굴을 본 사내들은 그녀를 으슥한 골목 안쪽으로 끌고 가 험한 짓을 하려 했다. 기억 상으로는 세 명이었다. 힘이 없던 글로리아는 입을 틀어막혀 소리 하나 못 지르고 제대로 된 반항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끌려갔다. 무력하게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데 골목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당신들 뭐 하고 있는 거야?”

험악한 얼굴을 한 루데키아스 대공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심기 불편해하는 표정이었다.

“너는 뭐야?”

사내들은 상당히 틀에 박힌 악당들의 대사를 내뱉었고 루데키아스는 조소했다.

“나? 내 이름을 내 입으로 구태여 말해야 해? 저 앞에 앉아 있을 때 못 봤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 숙녀분은 당신들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냥 두고 가지 그래?”

“너 같은 애송이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신경 끄고 갈 길 가라?”

루데키아스는 사내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손안에서 굴리고 있던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는 글로리아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사내의 이마에 직격타를 날리고 땅에 떨어졌다. 사내는 이마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검이나 마법을 쓰자니 쓰레기들을 상대로 쓸데없이 힘을 빼는 것 같아서.”

루데키아스는 다른 돌멩이를 위로 가볍게 던졌다가 받으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이?”

남은 두 명의 사내들이 동시에 루데키아스에게 덤볐지만, 바닥에 얼굴이 처박힌 쪽은 그가 아닌 사내들이었다.

“음…… 거기 괜찮습니까?”

뻗어 있는 사내들을 한 번씩 발로 차 준 다음 루데키아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글로리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실 수 있나요?”

그야말로 동화 속의 왕자님 같은 등장이었다.

“그때 두 번째로 다시 반했던 것이지요.”

글로리아의 말에 아리스는 열심히 당시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즉위식을 대충 보고는 혼자 뒤쪽으로 몰래 빠져나가다가 그런 일을 본 것 같은 기억이 날락 말락 하고?

글로리아의 표현대로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은 기억이 나긴 했다. 그의 주변은 온통 따가운 시선투성이었으니 말이다. 그날만큼 가시방석이 따로 없던 날도 없었다.

“아리스 님께서 제 얼굴을 제대로 보기 전에 저는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느라 바빴어요. 그래서 제 얼굴을 못 알아보신 것은 이해한답니다.”

아리스는 글로리아의 말에 살짝 기억이 나려는 것 같았지만 명확하진 않았다. 7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고 글로리아와는 달리 아리스에게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었다. 하지만 글로리아에게는 인상 깊은 만남이었었나 보다.

“제가 제대로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훌쩍 떠나셔서 아쉬웠지만, 그 이후에 재회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어요. 아무튼, 그날의 일로 저는 당신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희미하게 알 수 있었어요! 루데키아스 대공자 전하는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잔악무도하기만 한 분은 아니시며 사실은 정의롭고 따듯한 심성을 지닌 분이란 걸 제가 알아차린 거죠.”

글로리아의 평가에 아리스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건 이거대로 적응되지 않았다.

“제가 당신에게 보내는 이 사랑이, 이제는 설명되었을까요?”

아니! 전혀!

고작 그런 거로 자신을 7년 동안 꾸준히 사모해 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말이다.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은 팔뚝을 벅벅 긁었다. 아리스의 반응에 글로리아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리스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아리스 님은……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고 계시는군요.”

그 말에 아리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글로리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지금 저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계시지요?”

아무래도 글로리아에게 미레아를 투영한 것을 들킨 모양이었다.

“그게…… 네, 죄송합니다.”

아리스는 솔직하게 답했다. 거짓말로 둘러대 봤자 통할 상대가 아니었을뿐더러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쪽이 덜 상처받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한다 해도 저는 여전히 이해가 잘 안 갈뿐더러…… 지금은 당신의 마음을 받아 주기도 힘든 상황이라…… 아무튼 그런 연유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리스가 주저하며 말하자 글로리아는 어딘가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셔요. 제 사랑을 보답 받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어요. 물론…… 아리스 님께서 저와 같은 마음이라면 더없이 기쁘겠지만…… 제가 바란다 해서 아리스 님의 마음을 억지로 가질 수는 없으니까요.”

글로리아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그녀는 허겁지겁 눈물을 훔쳤다.

“아,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리스 님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데 이건 정말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

글로리아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마저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은 마치 이슬을 머금고 있는 청초한 은방울꽃 같은 분위기였다. 아리스는 자신이 쓰레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히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쓰레기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미레아가 울 때만큼 어쩔 줄 몰라 안달복달하던 기분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아리스는 그녀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글로리아가 어느 정도 진정되어 가고 있을 때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던 시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창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글로리아 언니.”

시안의 시선 끝에는 회색 머리를 한 소녀가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폴라가 돌아왔어.”

* * *

폴라는 자신을 맞이하는 힐데의 옆에 미레아가 있는 것을 보고 눈에 띄게 동요했다. 미레아는 가타부타 설명하는 것을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손부터 내밀었다.

“돌려줘.”

“무, 무, 무얼 말하는 건지, 모, 모르겠는데!”

폴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다 힐데에게 막혔다.

“폴라.”

힐데가 나지막하게 부르자 폴라는 반사적으로 혐의를 부정했다.

“폴라는 몰라! 모르는 일이야!”

“무슨 일인지 너에게 아직 설명도 하지 않았어. 너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이러는 거잖아.”

“아니야! 폴라를 보고 새끼 마녀라고 괴롭히러 온 거잖아!”

“그렇지 않아. 이 사람들은…….”

미레아가 허리를 숙이고 폴라와 눈을 맞추었다.

“폴라, 내 이름은 미레아 제인스터야. 네가 내 지갑을 훔쳐 간 것은 알고 있어. 너를 혼낼 생각은 맞아. 잘못했으면 혼나야지. 하지만 그것은 네 잘못의 크기만큼만 혼낼 거야. 그 이상은 하지 않아.”

“폴라는 혼나는 거 싫어!”

폴라가 미레아의 어깨를 세게 밀쳐 냈다. 하지만 미레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덜 혼나는 방법을 알려 줄게. 네가 자발적으로 내게 지갑을 돌려주는 거야. 그것으로 네 잘못을 조금 덜어 줄 수 있어.”

그 말에 폴라가 힐데의 다리에 매달려 울음을 터트렸다.

“힐데, 힐데! 도와줘! 폴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 말이 사실이야?”

“응!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힐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폴라, 네가 소매치기를 하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러는 이유까지.”

힐데가 자신의 다리를 잡은 폴라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며 타일렀다.

“네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은 잘 알아. 그래서 소매치기를 하는 거지? 우리에게는 돈이 필요하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너는 아직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고 어린아이들은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돼. 어른들이 있으니까.”

그 말에 폴라가 딸꾹질하며 힐데에게 고개를 저었다.

“폴라, 우리는 다른 어른들처럼 너를 쓸모없다고 버리거나 하지 않아. 왜 못 믿는 거야? 그렇게 내가 못 미더워? 그렇게 우리가…… 네게 믿음을 주지 못했어?”

힐데는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그러자 폴라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폴라는 언니들을 믿어. 언니들을 사랑해! 그래서 조금이라도 언니들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걸!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건 혼자서 살 때처럼 소매치기나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래서…….”

“말했잖아. 우리는 너를 버리거나 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소매치기처럼 나쁜 일은 그만두자. 폴라, 우리를 사랑한다면 부디 그래 줘. 이렇게 부탁할게.”

힐데의 말에 폴라는 땅을 보고 눈물을 삼키다 미레아를 올려보았다.

“혼…… 낼 거예요?”

“응.”

“미레아, 어린애한테 너무한 것 아니…….”

파울로가 난처한 얼굴로 미레아를 말리려 했지만, 미레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죗값을 치러라.”

그러더니 손을 올렸다. 폴라는 겁에 잔뜩 질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생각했던 대로 얻어맞아 나가떨어지는 일이 바로 일어나진 않았다. 그게 의아하여 폴라가 실눈을 떠서 미레아를 바라본 순간, 이마에서 호두가 양 갈래로 쪼개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딱 울렸다. 미레아가 손가락을 튕겨 이마에 딱밤을 먹인 것이었다.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매운 손맛이었다. 폴라는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내며 이마를 부여잡고 땅에 주저앉았다.

“자, 혼나는 것 끝.”

미레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더 혼나기 전에 내놔.”

폴라는 이마를 쓰다듬으며 미레아를 올려다보았다.

“이걸로 끝이라고?”

“네가 내 지갑을 돌려준다면.”

“포, 폴라가 기분 나쁘지 않아?”

미레아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대답했다.

“네 행동에 화가 났지만 네 존재 자체가 기분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니야.”

“왜?”

“왜냐니…… 넌 그냥 어린애잖아.”

폴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폴라는 마녀…… 인 걸.”

그러자 미레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폴라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마녀라는 소리는 신경 쓰지 마. 진짜 마녀야? 아니잖아. 너는 그냥 땅꼬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철없는 어린애가 실수할 수도 있지. 그리고 진짜로 마녀면 또 어때. 정말 죽을죄를 지은 것도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야.”

그리고는 폴라에게 내민 손을 위아래로 까닥거렸다.

“그러니까 빨리 내 지갑이나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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