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22화 (122/257)

122화.

“차는 입에 맞으세요?”

글로리아와 단둘이 남은 아리스가 할 말이 없어 차나 들이켜고 있자 그녀가 물었다.

“예에…… 맛있네요.”

“다행이에요. 우리 시안이 차는 정말 잘 우리거든요.”

옆에서 시안이 뿌듯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든 말든 아리스는 찻잔을 깨끗하게 비우는 데 집중했다.

“그렇군요.”

“이런 곳까지는 어떤 일로 오셨나요? 당신께서는 클라인을 떠난 줄 알았어요.”

“볼일이 있어서 잠시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제 예감이 맞았군요! 저는 언젠가는 이곳에 아리스 님께서 다시 찾아 주시지 않을까 하고 클라인까지 오게 된 것이랍니다. 클라인에 있다 보면 만나겠지 싶었어요. 제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을 보니 역시 우리는 운명적인 인연 아닐까요?”

“그렇습니까.”

아리스는 글로리아가 하는 말에는 전부 단답식으로 대답하며 대화의 흐름을 뚝뚝 끊어 놓았다. 하지만 글로리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저에 대해 궁금한 점이라면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당신에게라면 전부 대답해 드릴게요.”

하지만 아리스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초면인 사이에 왜 이러는지 궁금한 게 전부였다. 아리스는 대충 무난한 질문을 던졌다.

“음…… 그럼 첫 번째로 당신들이 마녀라고 불리게 된 연유라든지…….”

이 주제면 자기가 대화에 끼어들 필요 없이 혼자 떠들도록 내버려 둬도 괜찮겠지.

그리 생각한 아리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붕붕 뜬 기분으로 재잘거리던 글로리아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그녀는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아리스는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연유를 묻기는 했지만, 눈치가 빠른 아리스는 이들이 마녀라고 불리게 된 사연 따위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아름다웠기 때문에 마녀가 된 글로리아. 제 입맛대로 멋대로 재단하여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군중들. 그런 이야기들을 꺼내며 글로리아가 물었다.

“아무도 우리 말을 제대로 들어 주지 않았지요. 그것은 당신도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던가요?”

그 말대로 아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군중들에게 그는 이미 악마나 다름없었다. 세계의 종말 따위 자신과 상관없다고 호소해도 많은 이들은 루데키아스의 죽음을 바랐다. 지금은 정말로 그렇게 불려도 할 말이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말했잖아요. 우리는 공통점이 많다고.”

“그럼 당신도 이 세상을 증오하나요?”

아리스의 말에 글로리아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러더니 결의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왜죠? 이 세계는 당신을 마녀라 규정짓고 괴롭혔는데.”

“그것은 사람이 그런 것이지요. 나쁜 건 사람이에요. 하지만 사람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아요.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이중성을 지닌 것처럼 이 세상 역시 이중적이기 마련이에요. 저는 그 단편만 보고 이 세상을 증오하고 싶지 않아요.”

순간 아리스는 글로리아가 정말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는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쁜 것만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인생이 고달프다 해도 좋은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그런 이 세상을 정말로 사랑해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하나하나가 전부 사랑스러워요.”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글로리아가 아리스에게는 너무나도 커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서 기시감을 느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비슷한 말을 미레아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역시 당신은 저와 닮지 않았어요.”

그는 그렇게 단언했다.

“나와 당신들의 차이점은 이 세계가 제멋대로 자신에게 짊어지게 한 역할에 충실하게 움직였는가, 아닌가에 대한 점이겠지요.”

시안이 따라 주는 차를 입에 머금자 살짝 쌉쌀한 향이 아리스의 입안에 감돌았다. 아리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여신의 신탁과 비슷한 행보를 보였지만, 글로리아를 포함한 이 성의 여자들은 정말로 마녀가 된 것은 아니었다. 글로리아는 여전히 고고했으며 이 성의 여자들을 거두고 지금까지 버텨 왔다. 아리스는 그 점만큼은 높게 샀다.

“글로리아 씨는 정말 대단하네요.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아리스의 진심이었다. 약간의 선망과 약간의 질투심이 담긴 말이었다.

“저는 아리스 님께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글로리아가 작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진짜 나를 잃어버렸었어요.”

아리스는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당신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중심이 잡혀 있다는 소리니까.”

그래, 마치……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났던 미레아처럼. 아리스는 글로리아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은 태양 같은 사람이네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빛이 나죠. 단순히 당신의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 아니에요. 제 진심이에요.”

그 말에 글로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리스는 글로리아가 부러웠다.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다. 아리스의 표현대로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글로리아가 태양 같은 사람이라면 미레아는 그 햇살을 받아 싱그럽게 빛나는 초목 같은 사람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생명력이 넘치지만, 거기에 태양이 옆에 있다면 어디에서든 뚝심 있게 하늘로 뻗는 사람.

아, 역시 이 둘은 닮았다. 미레아와 글로리아는 아리스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는 글로리아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미 한번 봤지만 새삼스럽게 더 빛나는 눈동자, 생기 넘치는 표정, 비단보다 더 매끄러운 머릿결과 피부. 정말로 예쁜 사람이었다.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아리스는 그 외모에 크게 감흥이 없었다.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글로리아의 외향은 아리스의 이상형에 거의 부합했다. 하얀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미모, 그 위에 살포시 자리 잡은 온화한 미소. 그런 여성이 자신에게 구애하는 데도 아리스의 마음은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선망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아리스가 주목하는 것은 글로리아의 그 내면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밝게 빛나고 속마음은 강인하여 다른 것에 휩쓸리지 않는 본질.

“나는 아직도 답을 찾아 헤매는데.”

아리스는 피로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글로리아가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저는 당신의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도울 수 있어요. 믿어 주세요!”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요?”

아리스가 쓴웃음을 짓자 글로리아는 결의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잘못된 길로 간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제가 바로잡아 드릴게요.”

너무나도 확신에 가득 차서 하는 말에 아리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글로리아 씨는 제가 왜 좋으신가요?”

그 질문에 글로리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글쎄요. 아까도 말했듯 당신이란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막연하게 끌렸어요. 처음에는 당신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 듣고 일종의 동질감이 들었지요. 그러다 그것이 점점 발전해서…… 그러니까……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될까요?”

아리스는 아직도 의심 가득한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당신은 저를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첫눈에 반했다고요?”

“그건 상관없어요. 원래 사랑이란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법이니까요.”

그 말에 아리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뭐예요.”

아리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글로리아가 미소 지었다.

“이제야 웃으시네요. 다행이에요. 계속 표정이 경직되어 있어서 당신이 이 자리를 불쾌하게 여기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거든요.”

글로리아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아리스 님께서 웃는 모습을 보니 참 좋아요. 기껏 잘생긴 얼굴로 태어났는데 웃지 않으면 손해잖아요.”

글로리아는 손수 찻주전자를 기울여 아리스의 빈 찻잔을 채워 주었다. 아리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미레아와 닮았다. 그 분위기가, 그 강인함이, 그 빛나는 모습이. 자꾸 미레아를 연상케 했다. 글로리아는 아리스가 자신과 공통점이 많다고 했지만, 아리스가 보기엔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미레아와 공통점이 더 많았다.

“이렇게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니 제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요. 적어도 당신이 따듯한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근거가…….”

글로리아가 키득거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우리가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리스는 글로리아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전에도 만났다면 분명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그만큼 글로리아는 한번 보면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아리스가 믿지 않는 듯하자 글로리아는 설명을 이었다.

“당신을 처음 본 것은 메르티어스 황제의 즉위식 때였어요.”

그 말에 아리스가 눈을 깜박거렸다. 현 황제의 즉위식이라면 자신 역시 참석했었다. 자신을 향한 여론이 썩 좋지 못해서 바로 빠져나왔지만 그래도 위치가 위치인지라 얼굴 정도는 내비쳤었다. 정말 잠시 다녀갔다 온 것이라 그사이 누군가와 마주친 기억은 솔직히 말해 없었다.

“저는 당시 집을 나와 정착할 곳을 찾고 있던 차라 수도인 델루카에 있었지요. 그러다 당신을 본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멀리서 봤을 때는 얼굴이 잘 안 보였답니다. 그저 당신이란 사람의 존재만 알았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호기심이 일어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당신을 보기 위해 인파를 헤치고 최대한 앞자리로 나아갔지요.”

글로리아는 당시를 회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당신의 얼굴을 봤는데……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어요. 분명 그 자리에 있지만 실재하지 않는 느낌이었달까요. 그 자리를 만든 것은 당신인데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지요. 그것을 보고 깨달았어요. 아, 저분도 나와 같은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구나 하고. 그러자 제 심장이 격하게 뛰었답니다. 분명 그때 제가 느낀 것이 저는 사랑이었다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이것은 사랑이에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글로리아를 보며 아리스는 다시 차나 들이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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