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20화 (120/257)

120화.

“이런 말씀 드려서 정말 송구스럽습니다만, 폴라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시는 게 어떠신가요?”

“좋아요!”

미레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아름다운 여인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할 수 있는데 마다할 리가! 그런 미레아를 보며 리비엘로는 작게 한숨 쉬었다.

“파울로 대장.”

리비엘로의 나지막한 부름에 파울로가 헤실거리는 얼굴로 리비엘로를 바라보았다.

“자꾸 그러면 카스카디아 씨에게 이를 거예요.”

그 말에 파울로는 침을 닦는 시늉을 했다.

“저 그리고…… 이걸로 기분이 풀릴지 모르겠지만 제가 지루하지 않도록 말벗이라도 해 드리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어요?”

“그것도 좋아요!”

글로리아의 말에 미레아가 열심히 대답했다. 쟤를 어쩌면 좋니…… 리비엘로가 미레아에게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 문득 미레아의 옆에 있는 아리스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리스는 글로리아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파울로나 미레아처럼 헤벌쭉한 표정이 아니었고 오히려 멀뚱멀뚱 관찰하는 시선에 더 가까웠다. 리비엘로는 그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정말 걱정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마을에서 우리의 평판은 썩 좋지 않은데 폴라가 그런 짓을 가끔 해서 이러다 마을 사람들에게 해코지라도 당하는 게 아닐까 하고 저는…… 그 아이는 아직 작고 어리다 보니 무력하거든요.”

“음…… 마을 사람들 말로는 여기가 마녀들이 성이라는데…….”

아리스가 운을 떼자 글로리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것은…….”

글로리아가 변명을 하기도 전에 아리스가 물었다.

“당신들이 데르카이드라서 그렇게 불리는 건가요?”

글로리아의 얼굴에 일순간 경계심이 드러났고 힐데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다시 갸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인간이지만 시안과 힐데는 말씀대로 데르카이드이지요. 이들이 데르카이드란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공교롭게도 나도 데르카이드라…….”

아리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글로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뼉을 짝 쳤다.

“아! 그럼 역시 당신이 맞았군요?”

아리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글로리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빛보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루데키아스 대공자 전하! 저는 줄곧 당신을 만나고 싶었답니다!”

그 말에 일행들은 글로리아를 보았다가 아리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리스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뭐?”

힐데와 시안 역시 조금 당황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당신께서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은 사진으로만 뵈었을 뿐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도 제 상상 속과 똑같은 모습이세요. 사실은 당신을 처음 본 순간 확신했답니다. 당신은 대공자 전하가 확실하다고! 하지만 제가 먼저 아는 척을 한다면 경계하실까 두려웠어요. 그래서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는데 먼저 말을 꺼내실 줄은……! 저는 줄곧 전하를 뵙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먼저 저를 만나러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리스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글로리아의 말을 들었다.

“저를 만나고 싶었다고요……?”

“네! 지금까지 거쳐 간 긴 밤 동안 수십 번, 수백 번을 당신과 만나는 꿈을 꾸었답니다.”

“왜요?”

“그거야 당연히……!”

글로리아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수줍게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운명…… 같은 거니까요.”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아리스는 점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미친 여자인가?

자신이 루데키아스라는 것은 이 지역에 사는 데르카이드라면 다 알법했다. 지금은 얼굴을 가리는 고글을 쓰고 있지도 않았고 외모를 숨기지도 않았으니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정체를 들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아리스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뒤이은 말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저는 처음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전하께 맞는 짝은 저뿐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아리스가 난감하여 힐끗 미레아를 곁눈질하자 그녀는 오묘한 시선으로 둘을 보고 있었다. 정말 난처했다. 일단 확신에 차서 열렬하게 말하고 있는 글로리아를 진정 시켜야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글로리아는 아리스가 말하는 것을 중간에 끊고 자기 할 말만 해 댔다.

“그야 저는 전하와 운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랍니다. 게다가 저는 전하 같은 검은 머리를 가졌지요. 어때요? 우리가 나란히 서면 제법 근사한 한 쌍일 것 같은데.”

“겨우 그것만으로…….”

어디까지나 우연이다. 이 세상에 검은 머리가 어디 한둘이던가. 아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항변하려 했지만 글로리아의 말에 순서를 빼앗겨 버렸다.

“그것 말고도 저희는 공통점이 많답니다. 나이도 같고…….”

글로리아는 조금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사람들에게 미움받는단 점도 비슷하고요.”

“언니, 좀 앉아.”

힐데가 뒤늦게 헛기침을 큼큼하며 글로리아의 손을 아래로 잡아 끌어 내렸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동작으로 아리스의 옆으로 가 가깝게 몸을 붙이고 앉았다.

“저는 전하와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아요! 혹시 전하도 그러신가요?”

아리스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다 무심코 미레아의 기색을 살폈다가 흠칫 떨었다. 미레아의 얼굴에는 지금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재미있네? 더 해 봐.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

조금 전까진 자신 역시 글로리아의 외모에 홀려 있었으면서 아리스의 꼴을 가관으로 여기는 그 태도에 당사자는 어쩐지 울컥했다. 아리스는 글로리아의 시야에서 조금 몸을 빼었다.

“저도 당신에게 궁금한 점이…… 좀 있군요…….”

아리스는 글로리아가 대체 왜 이러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벗어나고픈 마음이 더 컸다. 그냥 지갑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미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이 서로에게 궁금한 점이 있다는데…… 우리는 빠져 줄 테니 편하게 이야기 나눠요. 난 그사이 성이나 구경하게.”

아리스는 절망에 빠졌다.

미레아? 왜 그러는 거야? 그러지 말고 나 좀 구해 줘!

“우린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아니니까. 글로리아 씨랑 단둘이 천천히 이야기 나누고 있어.”

“단둘이?”

아리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레아는 힐데에게 말했다.

“그런 연유로…… 성 안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데요.”

“하지만…….”

글로리아가 어서 손님들을 안내하란 듯 힐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여기는 시안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손님들께서 지루하지 않도록 잘 부탁해, 힐데.”

힐데도 난처한 얼굴로 아리스와 글로리아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다면, 소리 질러.”

그렇게 말한 힐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니, 아니. 지금 무슨 일이 있게 생긴 쪽은 내 쪽인 것 같은데? 소리를 지르고 싶은 쪽은 나인데?

아리스는 힐데를 따라 일어나는 일행들에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구조 요청을 보냈다. 하지만 파울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아리스에게 찡긋 윙크해 주었다. 아리스는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어서 짜증이 났다. 일행들이 정말로 응접실을 나가 버리자 아리스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글로리아가 아리스의 양손을 덥석 잡고는 그를 애달프게 바라보았다.

“루데키아스 대공자 전하.”

“아니, 일단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줄래요?”

그 호칭에 알레르기가 있는 아리스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제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그냥…… 아리스?”

“제가 당신의 애칭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이미 대부분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못 부를 건 또 뭐냐는 말이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감격한 얼굴이었다.

“아리스, 저는 어릴 적부터 당신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상대방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리스는 글로리아의 존재를 고작 30분 전에 처음 알았다.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긴 것은 처음이니 우리 대화를 많이 하도록 해요. 궁금한 것은 전부 물어보셔도 좋아요.”

아리스는 흐린 눈으로 글로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이, 이 배신자들! 나중에 용서고 뭐고 없을 줄 알아라! 아, 정말 도망가고 싶다!

* * *

“핑계를 대고 나오긴 했습니다만…….”

힐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성에는 볼거리가 없답니다.”

저 멀리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고 천장에서는 생쥐 가족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달려가는 작은 발소리가 울렸다. 일행들은 힐데의 그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힐데는 밖의 경치가 잘 보이는 테라스로 그들을 안내했다.

“이 성에서 그나마 볼만한 경치가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어요. 비록…… 부식된 숲이지만…….”

테라스의 정면에는 죽은 나무가 우거진 무성한 숲이 있었다. 그런데 그 광경이 어딘지 모르게 음산했다. 커다란 나무들은 죽어서 시커멓고 그것들로 그늘진 땅은 음침했다. 정말 마녀의 성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경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일행들이 경직된 미소를 띠고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 테라스에 걸터앉고 있는데 힐데가 복잡한 심경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들을 보고 정말 놀랐어요. 루데키아스 대공자라니…….”

“비밀로 해 주실 수 있나요?”

파울로의 말에 힐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밖에서 떠벌리고 다닌다 해도 애초에 저희 말을 누군가 믿어 줄 리도 없는걸요. 그 부분에 대한 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저 역시 당신들을 보고 처음부터 긴가민가했습니다. 대공자의 얼굴은 알고 있지만 이런 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하지만 설마하니 정말 루데키아스 대공자일 줄은…….”

힐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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