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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119화 (119/257)

119화.

“이거…… 그냥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찾아온 게 엄청 싫은가 본데.”

리비엘로가 화살을 가리키며 한 제안에 누군가가 답하기도 전에 아리스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며 앞을 향해 삿대질했다.

“아니, 다짜고짜 화살부터 날리는 건 어느 나라 인사법이야?”

“야, 잠깐 기다려 봐.”

“피해자는 우리인데 왜 몸을 사려야 해?”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우리에게 화살부터 날리는 걸 보니 찔리는 게 있다는 소리 아니야?”

또 제 성질머리 못 이겨서 도발해 대는 아리스의 팔을 미레아와 파울로가 한쪽씩 잡고 뒤로 끌어당기는데 이번엔 화살 세 대가 연달아 그들의 발치에 꽂혔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번에는 미레아 쪽이 폭발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 지갑이나 내놔, 이 도둑놈들아!”

미레아의 포효는 성의 넓은 앞뜰을 지나 그 안쪽까지 닿고도 남았다. 자신들이 저지른 무단 침입 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미레아가 고래고래 소리치자 마침내 성의 현관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작은 사람이 나왔다. 금발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였다. 그녀는 문을 반절만 열고 파들파들 떨었지만, 용기를 내서 단호하게 말했다.

“무, 물러나세요! 여기는 여자들만 사는 곳이라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미레아가 앞뜰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러 가며 소녀에게 말했다.

“이 성의 주인은 누구야? 책임자라도 불러와.”

“무슨 용건이신데요?”

“이 성에 사는 하녀가 내 지갑을 훔쳐 갔다고.”

그 말에 소녀의 안색이 변했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그사이 현관문 앞까지 도달한 미레아에게 물었다.

“증거 있으세요?!”

“없어. 하지만 얼굴은 알아.”

그때 문 안쪽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시안. 침입자는 다 쏴 버리게.”

그러더니 문틈으로 화살이 또 날아왔다. 화살은 미레아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미레아는 품에 숨겨 두었던 권총을 꺼내 안쪽을 겨누었다.

“일부러 어려운 곳만 골라 우리를 맞추지 않고 경고만 주는 실력은 대단한데, 상대를 잘못 골랐어.”

문틈으로 보인 사람은 미레아만큼은 아니지만, 붉은빛이 도는 주홍색 머리카락을 한 젊은 여자였다. 미레아의 권총을 보자 시안이라고 불린 소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 이러지 마세요! 저희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 하지만 확실한 건 모르잖아. 이 성의 책임자와 이야기해 보게 일단 나와 봐.”

미레아가 겨눈 권총에 활을 들고 있던 자가 날카로운 눈을 부라리며 미레아를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답을 내리고 왔으면서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이잖아?”

“당신들이 멋대로 이 성에 발을 들이니까 그렇지!”

미레아는 그 말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지갑을 도둑맞은 건 자신이었고 지갑을 되찾으러 왔을 뿐이었는데 화살이 반긴 이 상황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뒤늦게 다른 일행들이 달려와 미레아를 달랬다.

“미레아, 일단 이야기를 해 보자. 응?”

“그래, 양쪽 다 무기는 내리고…… 우리는 일단 이야기 먼저 하고 싶은 거니까요.”

리비엘로와 파울로가 미레아의 권총을 내리게 하고 상대방 역시 무기를 겨누지 말아 달라 간청했다. 유일하게 아리스만이 미레아와 상대방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싸울 거면 우리가 수적으로 유리하니까 못 할 건 없지만…….”

“넌 부추기지나 말고 조용히 해.”

파울로가 아리스에게 눈을 부라렸다.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현관홀의 건너편에 있는 계단을 타고 한 여인이 내려오고 있었다.

“힐데, 또 화살부터 쏜 것이니? 내가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 그런 게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언니, 무단으로 침입한 쪽은 저쪽이야!”

힐데라고 불린 쪽이 반발하고 나섰다.

“아니, 그건 우리가 대문 앞에서 사람을 불렀는데도 아무도 안 나와 보니 들어간 거잖아요?”

“대답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면 되잖아? 우리가 당신들에게 꼭 문을 열어 줘야 해?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힐데, 그만.”

여인이 해가 비추는 곳으로 나오자 미레아와 그 일행들은 잠시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어마어마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미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구불거리는 흑단 같은 긴 머리를 반절만 묶고 나머지는 풀어 두었는데 머리카락이 몸을 감고 있는 것이 마치 질 좋은 비단을 몸에 휘감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태양이라도 박아 넣은 것 같은 밝은 금빛의 눈동자는 또 어떻던가.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오뚝하고 끝이 동그란 콧방울, 잘 익은 복숭앗빛의 뺨, 붉은 입술까지 예쁘지 않은 구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옷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단순한 흰색 원피스를 입었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얼굴만으로도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거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곡선이 자아내는 우아한 분위기의 몸과 희고 긴 손가락은 더없이 완벽했다.

미의 여신! 그렇게 불러도 아무도 항의를 하지 못할 외모였다. 파울로와 아리스는 물론이고 같은 여성인 미레아와 리비엘로조차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미레아가 갑자기 먼저 사과를 했다.

“제가 좀…… 성미 급했습니다.”

아리스가 황당하단 얼굴로 미레아를 바라보자 파울로가 옆에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미레아는 예쁜 사람들에게 약해.”

그런 미레아에게 살짝 웃어 주며 고개를 갸웃거린 여인은 아리스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놀란 듯이 두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함께 팔랑였다. 여인은 문을 좀 더 열며 말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아니로군요.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용무가 있으시다면 들어오시겠어요?”

세상에나! 목소리도 어쩜 저렇게 고울 수가!

미레아와 일행들은 속으로 감탄을 했다. 새가 지저귄다는 표현은 그녀의 목소리를 다 표현하지도 못할뿐더러 식상했다. 요정이 하프를 연주하는 선율이 마치 저럴 것이었다.

“언니! 적어도 이유는 들어 보고 들여야죠!”

힐데가 문 앞을 가로막으며 반대했다. 그러자 미레아가 급격하게 자신감이 떨어진 얼굴로 횡설수설 변명을 내뱉었다.

“제가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는데요…… 마을 사람 말로는 이곳에 사는 하녀가 범인이라 그래서…… 그런데 제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네요……! 그냥 확인만 하러 왔습니다!”

미레아의 말에 여인은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작게 한숨을 쉬고 문에서 비켜서 길을 만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맞게 찾아오신 것 같아요. 들어오세요.”

여인이 그렇게 말하자 힐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활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제 이름은 글로리아예요. 이쪽은 힐데와 시안이고요.”

“저는 미레아 제인스터고, 이쪽부터 차례대로 파울로 리마, 리비엘로 람, 그리고…… 아리스…… 입니다.”

미레아는 자기 입으로는 차마 아리스를 클라인셔드라고 부를 수 없었다. 당사자가 너무나도 뻔뻔하게 나오면 되레 옆에 있는 사람들이 더 부끄러운 법이었다.

서로 소개를 주고받자 글로리아는 앞장서서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글로리아의 옆에는 힐데가 찰싹 달라붙어 마치 밀착 경호라도 하는 기세였다.

“시안, 차를 내어오렴.”

그 말에 시안이 쪼르르 부엌으로 달려갔다. 응접실까지 가는 길에 복도를 둘러보니 성의 겉모습이 낡기는 했지만, 내부는 그래도 멀끔했다. 리비엘로와 아리스는 미레아와는 다른 의미가 있는 눈빛으로 글로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글로리아의 미모에 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왜 그래?”

파울로가 은밀하게 묻자 아리스가 미간을 좁히며 속삭였다.

“여기 있는 저 사람들…….”

그는 확신을 가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글로리아란 사람을 빼면 전부 데르카이드예요.”

“뭐?”

“아까 그 시안이라는 하녀, 활을 쏘던 힐데라는 여자. 확실해요.”

그 말에 파울로가 중얼거렸다.

“여긴 대체 뭐 하는 성이지?”

둘이 속삭이는 사이 미레아는 리비엘로의 옆구리를 툭 치고 말했다.

“리비엘로, 너도 표정이 이상하다?”

“음…….”

리비엘로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듯하더니 석연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미레아가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리비엘로는 여전히 글로리아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응접실은 다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글로리아는 손수 손님들의 자리를 정리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힐데와 나란히 3인용 소파에 앉았다.

“앉으세요.”

사람들이 앉자 시안이 시기적절하게 차를 내왔다.

“당신들이 말한 소매치기는…… 저희 성에서 일하는 하녀 중 하나예요. 시안 말고 한 명이 더 있지요. 혹시 회색 머리였나요?”

“네, 맞아요.”

“그럼 폴라로군요.”

글로리아는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를 몇 번 혼내 보기는 했습니다만, 아직도 그런 일을 하고 다니니…… 죄송합니다. 주인 된 도리로서 고용인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러면서 글로리아가 물기 어린 시선을 떨구자 미레아와 그 일행들은 자신들이 더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폴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힐데의 말에 글로리아의 얼굴이 걱정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미레아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미레아가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아니!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급격하게 저자세로 나가는 미레아를 보며 리비엘로는 파울로와 아리스가 한마디 하는 것을 기대했지만 어째 그 둘의 표정을 보아하니 큰 기대를 하는 것은 글렀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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