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제12장 마녀들의 성
보급을 위해 들른 마을에서는 때마침 장이 열렸다. 당장 출발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필요한 것들을 사며 장 구경에 나섰다. 쿤둘렌과 세피로스는 인간들 틈에서는 제법 눈에 띄기 때문에 마을에 보급품을 구하러 가는 쪽은 언제나 인간들이었다.
“너무 많이 사들이지는 마. 어차피 곧 마검을 찾을 텐데 필요한 것만 사. 괜히 짐만 늘리지 말고.”
파울로의 잔소리에 그들은 소모품과 보존 식량 위주로 쓸어 담았다. 신나게 물건들을 사들이자 허기가 져서 그들은 식사할 레스토랑을 찾아 헤맸다.
미레아는 일행들의 제일 뒤에서 모퉁이를 돌다 작은 아이와 부딪혔다. 미레아는 괜찮았지만, 체구가 작은 아이는 뒤로 튕겨 넘어질 뻔하였다. 미레아는 손에 들고 있던 짐에서 물건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무심코 그것들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떨어진 물건들을 다 수습하기도 전에 자신과 부딪힌 아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니?”
상대방은 회색 머리를 한 소녀였는데 앞머리가 덥수룩하게 눈을 가리고 있었다. 옷을 보니 비렁뱅이는 아닌 것 같았는데 옷깃 사이로 보이는 목이 유독 가냘팠다. 아이는 자신의 옷을 손으로 털어 먼지를 떼더니 미레아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리고 미레아의 걱정 어린 말에도 아이는 대답 없이 고개만 꾸벅거리고 다시 달려 나갔다.
“미레아, 다치기라도 했어?”
라일라의 말에 미레아가 손을 휘휘 저으며 아이를 살폈다.
“아, 아니야. 난 괜찮은데 애가…….”
어린애가 뛰어놀다 놀랐나 보다. 미레아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저러다 또 넘어지는 게 아닌지 불안한 눈으로 소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사람이 많으니 조심해서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일행의 뒤를 따랐다.
시오가 제법 괜찮은 식당을 찾아내서 일행들은 짐을 가득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사는 평범했다. 맛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뛰어날 정도로 맛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리스는 시골 식당이 다 그렇지 않냐면서 그릇을 비우고 먼저 일어났다. 공동 경비는 미레아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행들의 식사비를 치르기 위해 허리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주머니가 휑했다. 미레아는 다른 주머니를 몽땅 뒤져 보고 장바구니까지 살펴본 다음에 낭패감이 짙은 얼굴로 말했다.
“내 지갑이 없어졌어……!”
“뭐?!”
미레아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당황했다. 조금 전에 다른 상인에게 대금을 치른 것이 미레아였으니 지갑을 어디에 두고 온 것도 아니었다. 미레아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조금 전 그녀를 치고 지나간 작은 소녀를 떠올렸다. 지갑을 어디 흘린 게 아니고 도둑맞은 것이라면 소매치기 당할 만한 상황은 아까 그 아이밖에 없었다.
파울로가 대신 계산을 하는 사이 미레아는 지금까지 산 물건들을 점원에게 떠넘기듯 맡기고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하지만 한참 전에 마주쳤던 소녀가 지금까지 이 근방을 어슬렁거릴 리 없었다. 미레아와 그녀를 뒤따라온 아리스와 율비네, 진, 시오는 주변 골목까지 샅샅이 뒤져본 후 별다른 소득 없이 식당으로 털레털레 돌아왔다. 파울로가 별 기대 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찾았어?”
“아니요.”
시오의 탈력감 넘치는 목소리에 파울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혼잡한 곳에서 어린애를 찾기에는 조건이 까다로웠다. 파울로는 혀를 쯧쯧 찼다.
“아까 그런 건데 지금쯤이면 벌써 도망갔겠지.”
“지갑이 날치기 당하는데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지?”
라일라의 지나가는 말에 전투 요원조가 이를 갈았다. 그들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젠장, 쪼그만 게 어디로 튄 거야?”
진이 중얼거렸다.
“돈이 많이 들어 있었나요?”
율비네의 말에 미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돈은 나눠서 보관하기 때문에 지갑에 많이 들어 있던 건 아닌데…….”
미레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 말대로 그녀는 지갑에 자신의 용돈과 식사할 금액 정도만 넣어 두었고 그 이상의 공용 경비는 다른 주머니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금액이 적지는 않아서 잃어버리기엔 속이 쓰릴 만한 액수였다. 그런데 기색을 보아하니 미레아가 아쉬워하는 부분은 금액적인 부분이 아니고 다른 부분인 것 같아 라일라가 미레아의 마지막 말을 받아 물었다.
“아닌데?”
“음…… 별거 아니야.”
미레아는 이내 고개를 털며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돈도 얼마 안 들었는데, 그냥 돌아가자. 범인이 도망갔으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은 탓이야. 지갑에 있는 돈은 대부분 내 개인적인 돈이었고 공용 경비는 따로 보관 중이니까 괜찮아.”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미레아가 몸소 앞장서서 자신의 몫인 짐을 들고 식당을 나서려 그랬다. 파울로도 포기하는 얼굴을 했는데 식당 점원이 조금 생각하다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지갑을 소매치기 당한 것이 확실한가요?”
“확실까지는 모르겠고…… 상황을 유추해 보자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시 상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아시나요?”
그 말에 미레아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음…… 키가 작은 소녀였는데 얼굴을 자세히 본 게 아니라 회색 머리카락이었다는 것밖에는…….”
“아, 그럼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군요.”
“네? 범인을 알 수 있어요?!”
“이 근방 소매치기라면 그 녀석밖에 없거든요.”
그 말에 미레아는 조금 전까지 지갑은 되었다고 털어 버린 사람치고는 제법 절박한 표정을 했다. 그녀는 점원을 붙잡고 질문을 쏟아 내었다.
“그게 누군데요?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죠?!”
하지만 점원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충 대답했다.
“마녀들의 성에 사는 하녀일 겁니다.”
“마녀들의 성이요?”
점원은 창밖의 언덕을 가리켰다.
“저 언덕배기에 성이 하나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다들 마녀들의 성이라고 부릅니다. 성주도 여자, 그 밑의 하인들도 전부 여자들만 모여 사는데 그것들은 다 마녀입니다. 악마의 하수인들이지요.”
과연 언덕 끝에 성의 첨탑으로 보이는 것이 비죽 솟아 있었다. 얼마 전에 악마라는 이야기 비슷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녀요? 마법사가 아니고요?”
“예, 마녀요.”
마법을 쓴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마법사와 마녀의 차이점은 바로 학문화된 마법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미신적인 부분을 사용하는가로 갈렸다. 마법사는 정형화되고 증명된 마법을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규칙에 따라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마녀는 주로 여성이었으며 학문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마법을 사용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아무도 몰랐다. 증명되지 않은 미지의 힘은 사람들에게 터부시되어 왔고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래서 마녀는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위치였다. 하지만 마법이 학문으로 굳어지면서 마녀들이 사용하던 마법 대부분 역시 규명되었고 그렇게 마녀는 마법사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런 것치고는 이 시골에는 아직도 마녀에 대한 미신이 남아 있는 듯싶었다.
미레아는 양팔을 걷어붙이며 호기롭게 말했다.
“좋아, 가자.”
“찾으러 갈 거야?”
진의 말에 미레아가 험상궂은 얼굴로 답했다.
“당연하지요!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훔쳐 간 사람이 누군지 알았는데 가만히 있어요?”
“네가 그렇다면 그러겠는데…….”
파울로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마녀들의 성이라…….”
파울로가 망설이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미레아는 벌써 씩씩거리며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파울로가 황급히 그 뒤를 따르며 시오와 라일라에게 보급품들을 안겨 주었다.
“고작 소매치기 하나 잡는데 이 인원이 전부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너희는 짐을 가지고 미리 돌아가 있어. 옆으로 새지 말고, 알았어? 리비엘로는 혹시나 신성력이 필요할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우리와 함께 가고.”
시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음…… 일단 세피로스 님께는 말을 전해 둘게요. 늦지 않게 오세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리스, 조심하십시오.”
율비네의 걱정 어린 말에 아리스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뭐 별일도 아닌데 금방 다녀올게.”
그렇게 미레아, 아리스, 리비엘로, 파울로 이 넷은 언덕 위에 있는 성으로 향했다.
* * *
타칭, 마녀들의 성은 딱 봐도 많이 낡은 모습이었다. 지붕은 여기저기 뜯겨 나가 보수가 필요해 보였고 대문은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손보지 않은 덩굴식물이 벽을 타고 여기저기 기어올라 자라 있었다. 성을 두른 성벽 역시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첨탑 위에 둥지를 튼 까마귀가 까악까악거리며 울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제법 을씨년스러웠다. 결정적으로 성의 바로 옆에는 부식 지역이 있었다. 마을이라고 해서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과 비교하기엔 미안할 정도였다.
“정말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마녀의 성이다.”
미레아가 짧게 평했다. 그들은 대문 앞에서 기웃거리며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높여 사람을 불러 보았다.
“계십니까?”
원래대로라면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따로 있어야 할 규모였기 때문에 대문에서 현관까지의 거리가 상당했다. 그러니 대문에서 아무리 사람을 불러 봐야 집안까지 목소리가 닿을 리 만무했다. 아리스가 삐걱거리는 대문을 억지로 열었다.
“성벽도 무너져 있는데 이 정도면 알아서 들어오라는 소리나 다름없지.”
그렇게 앞장서서 성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는데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리스의 얼굴 바로 옆으로 무언가가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아리스가 눈동자를 굴려 옆을 보자 커다란 화살이 그의 바로 뒤에 있는 성벽에 꽂혀 있었다.
“히익?”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오한이 오소소 돋았다. 그보다 한 발 뒤에 있던 일행들도 경직된 얼굴로 화살을 보았다. 누가 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방금 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언제든지 네 머리를 꿰뚫을 수 있으니 성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메시지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