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아리스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질문 자체가 직설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미레아는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인간이셨는데? 마법사도 아니셨어. 아, 물론 능력이 좋아서 가끔 인간인지 의심받는 일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조금 재주 좋은 인간인 정도?”
미레아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아리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물어볼 사람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세피로스를 털어 보면 무슨 이야기든 나올 것 같았다.
* * *
아리스는 상당히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5년 전, 제가 의지에 먹히지 않도록 도와준 게 케이드 제인스터 씨가 맞나요?”
그 말에 세피로스도 상당히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맞아. 생각보다 늦게 알아차렸군.”
아리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반쯤 확신하고 물은 질문이었지만 세피로스가 놀라지도 않고 선선히 시인하는 것이 상당히 뜻밖인 데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 알고 계셨어요?”
“아니.”
아리스의 면담 요청에 빈방에서 차를 홀짝이던 세피로스는 그다지 놀란 기색 없이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오히려 때가 되었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나는 당시에 너를 케이드가 도와줬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 록산에서 순식간에 네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겼거든. 그런데 생각보다 일을 훌륭하게 완수해내더군. 내가 그를 과소평가 했었나 봐.”
“세피로스 님이 시킨 일이 아니었어요?”
“난 그를 말렸어. 죽을 게 뻔했거든.”
그렇게 말하는 세피로스의 표정은 가라앉아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시에 그런 일을 벌인 게 저였다는 것은 어떻게 바로 안 거죠?”
아리스의 소행이라는 것은 다음날 언론을 통해 퍼졌다. 클라인을 빠져나간 메르티어스 황제가 숨김없이 언론에 그렇게 공표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일을 누가 했는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몰려드는 마수를 상대하기 급급했다. 그런데 한창 마수가 몰려온 그 시각, 그 장소, 그 장본인이 누군지 어떻게 알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이 벌어진 위치 정도야 당시 데르카이드들은 다 알았을걸?”
“어떻게요?”
“마력 친화력이 좋으니까. 네가 내뿜은 영소는 록산에서도 관측 가능했다. 그러니 대륙 끝에도 마수들이 나타났지. 마수를 따라가면서 위치를 추적하면 그곳에서 그만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야 딱 하나지.”
아리스는 머쓱한 얼굴로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가 데르카이드란 건 알고 계셨어요?”
“그래.”
“하지만 미레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따지자면 케이드는 데르카이드라기보단 인간에 더 가까워. 그래서 날개를 꺼내면 마력 고갈이 빠르게 일어나지. 데르카이드라 말하기엔 그는 불완전했어.”
“그런 게 가능한가요?”
세피로스는 한참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너도 데르카이드에 대해 잘 모르지.”
“그야…… 저는 저 이외의 데르카이드를 제대로 만난 건 얼마 전에 라우노가 처음이었고……. 알려진 사실도 적고 하니 다른 사람들도 잘 모르잖아요.”
“데르카이드들의 가능성과 성질을 예측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거다. 그게 가능한가, 생각하는 것조차 가능하게 만들거든. 케이드는 그중에서도 예외적이긴 했지만 그런 데르카이드도 있던 거지. 그의 태생은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 주변 인물 중에 케이드가 데르카이드란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그의 아내와 나를 포함해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인원밖에 없어. 파울로와 미레아도 몰라.”
“왜 숨겼죠?”
“그는 자신의 힘을 숨기고 평범한 인간으로 살기를 희망했거든.”
하지만 아리스는 그가 전투부 부장이 된 시점에서 평범함은 그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세피로스가 덧붙였다.
“케이드가 라슈발렌으로 들어간 것은 나 때문이야. 내가 회장직을 맡기 이전에 당시 회장이 케이드를 탐내서 불러들였는데 그 당시만 해도 차기 회장으로는 내가 내정되어 있었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잘됐다 싶어 나보다 먼저 자리를 잡으라고 록산에 보냈는데…… 거기서 결혼하고 애까지 낳을 줄은 나도 몰랐어.”
아리스는 복잡한 얼굴로 이마를 감쌌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는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고개를 수그리고 앉은 자세로 물었다.
“케이드 씨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건가요?”
“자네는 케이드가 저 안에서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
고개를 든 아리스의 눈빛은 그러면 안 되냐는 듯 묻고 있었다. 세피로스는 한숨을 쉬었다.
“케이드는…… 케이드는 그때 죽었다. 마력 고갈로 살아 있을 리 없어. 록산에서 클라인까지 장거리 공간 전이를 할 때 이미 마력을 거의 다 썼었을 거야. 하필이면 그는 가지고 있던 마석이 없었고, 설령 여분의 마석이 있었다 해도 그런 방대한 술식을 즉석에서 만들어 낼 시간이 없었어. 그런 상태로 오직 자신의 마력으로만 봉인을 안정화한다? 그게 자살행위라는 건 케이드도 알고 있었을 테지.”
세피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보다도 더 케이드의 생환을 기다리는 사람은 세피로스였다. 어쩌면 미레아보다도 더 간절하게. 하지만 현실은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살아 있었다면 5년 동안 그렇게 자취를 감추고 있을 리 없어. 내 정보력으로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오는 답은 하나야.”
세피로스의 표정은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그 세피로스가 말이다.
“미레아에게는 말하지 마.”
“어떻게 말을 안 할 수 있어요? 이건 미레아의 일이기도 하잖아요.”
“하지 마.”
세피로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는 지금 자기 처지만으로도 버거워. 알게 되더라도 차라리 나중에 아는 것이 낫다.”
“알툰이 그런 식으로 말하며 미레아의 기억을 일부 봉인했어요.”
아리스와 미레아는 알툰이 미레아를 신전 뒤쪽으로 데리고 간 것에 대해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뒤늦은 보고에 세피로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툰이 미레아에게 무엇을 보여 준 거지?”
“저도 모르겠어요.”
아리스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그런데 미레아는 슬픈 이야기라 그랬어요.”
그 말에 세피로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해한 얼굴을 하더니 다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세피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알툰이 성급한 건지 내가 느긋한 건지…… 어쨌든 알겠다. 말해 줘서 고맙군.”
아리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세피로스 님, 저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죠? 왜 숨기는 건가요? 도대체 이 일과 어떤 일이 관련되어 있길래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시는 건가요?”
“이번 임무가 다른 일반적인 것들과 다르다는 것은 맞아. 자네와 마검이 특별 취급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사자이니 더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마검이 통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지,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들은 자네의 존재가 두드러지면서부터 쭉 있었어. 하지만 이 세계의 뒷면을 알고 있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야.”
세피로스는 찻잔을 깨끗하게 비운 후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는 최대한 자네들이 모르는 선에서 끝냈으면 좋겠어.”
세피로스는 그리 말했지만, 아리스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저희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감당할 수 있겠나?”
세피로스의 질문에는 너희는 절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는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자네들은…… 특히 너와 미레아는…… 나는 미레아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세피로스의 말은 제법 뜻밖이었다. 아리스가 지금까지 평범함과 먼 생활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인제 와서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다고 생각해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인인 세피로스가 그리 말하니 오히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요?”
“내가 생각보다 자네를 많이 아끼거든.”
아리스는 농담인가 했지만, 상대방의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러니 설령 알아야 한다 해도 지금은 안 돼. 진실은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도달해도 늦지 않아.”
세피로스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궁금한 내용 중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부분은 다 알려 준 것 같군.”
세피로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아리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것 말고도 말씀드릴 게 있어요. 아침에 마검의 기운을 느꼈어요.”
그 말에 세피로스가 멈칫했다.
“가깝지는 않지만 확실해요. 마검 페니드란이에요.”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군.”
세피로스는 아리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수고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아리스는 먼저 방을 나서는 세피로스의 뒤를 따라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다 출발 준비를 돕고 있는 미레아를 보고는 멈칫했다. 미레아가 그런 아리스를 보고 할 말이라도 있냐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려 그는 손을 옆으로 흔들었다.
케이드의 일은 말하지 말라는 부탁까지 받았으니……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대개 용들이 자신을 굽히고 들어갈 때가 거의 없는 것을 볼 때 세피로스의 말은 상당히 정중한 부탁인 셈이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정작 당사자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꿈속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미레아가 그에게 했던 말들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속 짐은 언제나 돌덩이처럼 그를 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