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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116화 (116/257)

116화.

본인은 아마 자기가 웃고 있는지도 자각 못 했을 것이다. 그건 너무나도 찰나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리스가 미레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을 땐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레아는 알 것 같았다. 아리스는 자기감정도 알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들이지만 미레아는 아리스가 자신을 동료애 이상으로 좋아한단 건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확신이 든 건 사르파니 축제 이후부터였고 지금 아리스의 반응은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그것을 모른 척한 것은 첫째로 아리스가 제 감정을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았기에 긴가민가했었고 둘째로는 시오와 라일라의 관계를 걱정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파울로와 카스카디아의 사내 연애를 보면서 미레아는 어느 정도 교훈을 얻은 바 있었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했다.

사실 거리를 두고 무시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 일전에 한 번 싸운 후 말을 섞지 않았더니 아리스가 안절부절못하면서 미레아의 주변을 뱅뱅 배회하는 꼴을 보고 그 방법을 쓰는 것은 접어 두었다. 율비네가 아리스를 등신이라고 부른 이유를 뒤늦게 알 듯싶었다. 그러니 그저 이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다 보면 아리스 저 바보가 끝까지 제 감정을 모른 채로 이번 일이 전부 마무리되어 있을 수 있었다. 둘의 관계를 정의 내리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래도 저절로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법 취향에 부합하기까지 한 잘생긴 사람이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데 그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비록 단점도 많은 성격이긴 하였으나 아리스의 단점은 미레아가 조금 참아 줄 수 있는 정도였고, 자신에게 잘해 주는 만큼 상대방에게 호감이 안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구처럼 잘 돼 보고 싶은 마음은 없어도 그저 말없이 상황을 관조했다.

미레아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못다 한 말을 이었다.

“사실은 말이야, 그래도 정말 너를 만났을 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어. 그래서…… 그래서, 나는 네 옆에서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했어.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고…… 그런 이유로 네 곁에 있었어. 난 괜찮다, 네 존재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다, 나는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그래야만 했어.”

미레아는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음에 너를 내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그랬을 때 리비엘로가 걱정했던 것도 그 부분이야. 내가 내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거로 보였겠지. 하지만 그때 나는 정말로 괜찮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나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증명하고 싶었어.”

말을 하는 동안 그녀는 상대방을 힐끔거리며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꼬물거렸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집에 너를 데려간 것이 아니었어…… 미안…….”

하지만 아리스의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자신이 미레아 옆에 있음에도 그녀가 괜찮다는 것은 지금의 대화만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네가 미안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아리스가 머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반응에 미레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됐어? 마음이 편해졌어?”

“고마워.”

“뭐, 너야말로 나한테 감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미레아가 쑥스럽다는 듯 뺨을 긁적거렸다. 미레아는 몰랐지만, 그 사소한 행동에 아리스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똑같은 질문 하지 마. 나도 똑같은 얘기 하는 건 지겨우니까. 나를 못 믿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미레아가 툴툴거리자 아리스가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 그리고 그것도 거짓말 아니야.”

“뭐가?”

“꿈속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라고 했던 말.”

그 말에 아리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레아가 했던 말들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겉치레라 생각해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는 자신에게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타인인 미레아는 그 말을 너무나도 쉽게 약속했다.

“나의 뭘 믿고……?”

아리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미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 나는 네 생각보다 너를 잘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 해 줄게.”

미레아는 밝게 웃으며 아리스의 등을 손바닥으로 팡팡 때렸다. 아리스는 등을 맞으면서 생각했다.

젠장, 그런 말 들으니까 하늘을 날듯이 좋은데 그런 말을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하는 건 반칙 아니야? 웃는 거 귀여워. 와, 이게 그건가?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반짝반짝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뭐 그런 거? 주변까지 반짝거리는 건 모르겠고 확실히 미레아가 빛나는 느낌이긴 하지만…….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이런 느낌인 건 여러모로 곤란했다. 안 되는데…… 이런 기분은 생경해서 이상하다. 스스로가 낯설어서 무섭다. 그건 그렇고 귀엽다. 진짜 귀엽다. 어떡하지. 진짜 귀여운데…….

온 세상 사람들이 미레아 제인스터라는 인간의 귀여움을 알아주었으면 싶다가도 그런 건 홀로 독식하고 싶은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어떡하지…… 나 진짜 큰일 났다.

이성과 감성 사이를 줄넘기하는 자신을 발견한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짙은 낭패감이 섞인 얼굴을 했다. 미레아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쿤둘렌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들킬 뻔했다.

“아, 쿤둘렌!”

미레아가 쿤둘렌의 이름을 부르자 그 역시 둘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손짓했다. 쿤둘렌은 자신에게 다가온 미레아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미레아 군을 찾고 있었습니다.”

“저요?”

“어제 그런 소동이 있기 전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암실을 만들어 미레아 군이 맡긴 사진기의 필름들을 현상했습니다.”

미레아는 자신의 필름을 쿤둘렌에게 맡겨 두었었다. 그 필름에는 사르파니 축제에서 찍은 사진은 물론이고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틈틈이 찍어 놓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잘 나왔어요?”

“네, 아주 잘 나왔습니다.”

쿤둘렌이 호주머니에서 사진 뭉치를 꺼냈다. 한두 장이 아니었던지라 한꺼번에 현상을 했더니 제법 많은 사진이 나왔다. 쿤둘렌은 그중 일부를 노끈으로 묶어 둘로 나누었고 다른 몇 장은 따로 빼서 봉투에 고이 넣어 미레아에게 주었다.

첫 번째 묶음은 일행들의 일상을 담은 모습과 축제 때 노닥거리면서 찍은 사진이었다. 두 번째 묶음은 이번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자료 조사 차원에서 찍은 기록이었다. 주로 하얀 괴물들의 사진이었다. 봉투에 담긴 사진은 내용물이 보이지 않아 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미레아는 일상 사진을 보면서 감탄했다.

“와, 생각보다 사진이 예쁘게 찍혔어!”

그 말에 아리스도 미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둘은 사진을 함께 넘겨 보았다. 쿤둘렌은 미레아가 사진을 살펴보는 것을 기다려 준 다음에 따로 봉투에 담아 빼 놓은 다른 사진 몇 장을 미레아에게 건넸다.

“거기에 최근 필름이 아닌 것도 섞여 있었나 보더군요. 이건 따로 갖고 있는 쪽이 좋을 것 같아서…….”

쿤둘렌은 그것을 건네주고 바로 자리를 떴다. 마치 일부러 비켜 준 것처럼 말이다. 미레아는 쿤둘렌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보다가 봉투를 열어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봉투 안에 있던 사진은 5년 전, 미레아의 식구들이 찍힌 것들이었다. 케이드가 찍었는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레인과 휴레오, 미레아가 편한 복장으로 식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미레아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그 사진을 한참이나 보았다.

“너는 너희 어머니와 똑 닮았구나.”

아리스는 옆에서 그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레인은 구불거리는 밤갈색 머리에 미레아처럼 감람석 같은 눈동자를 가졌다. 머리 색만 다르지 그 밖의 이목구비는 똑같았다. 미레아의 분위기는 모계에서 온 것 같았다.

“맞아. 나는 엄마를 닮고 휴레오는 아빠를 닮았지.”

아리스가 본 휴레오는 제법 반듯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어머니를 닮은 밤갈색 머리카락과 따듯한 보랏빛 눈동자. 살아 있었다면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으로 자랐을 것이었다.

미레아는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

“아, 여기는 아빠가 찍혔네.”

그 사진에는 케이드와 미레아, 레인이 나란히 있었다.

“봐 봐, 우리 아빠랑 휴레오랑 똑같지?”

미레아가 건넨 사진을 무심코 받은 아리스는 사진을 떨어트릴 뻔했다. 붉은 머리카락에 자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의지에 먹히는 것을 막아 준 붉은 날개의 데르카이드. 케이드 제인스터가 그때와 변함없는 얼굴로 사진 속에 있었다. 아리스는 떨리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일부러 입을 다물고 사진을 유심하게 보는 척했다. 어느 정도 평정을 연기할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야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이분이…… 네 아버지라고?”

“응. 내게 이 불타는 빨간 머리를 물려주신 분이지.”

그렇다, 왜 몰랐을까. 저렇게 붉은 머리는 생각보다 흔치 않은데 왜 둘 사이의 연결점을 찾지 못했을까. 아리스는 손끝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미레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데르카이드라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행방불명이라 하셨지?”

“응. 그런데 뭐, 5년이나 지났고…….”

미레아가 뒷맛이 쓴 말을 중얼거렸다. 아리스는 마수들이 모여 있는 한가운데에 마검 페니드란과 함께 그를 두고 왔다. 케이드 제인스터를 두고 온 것이었다. 옛일 때문에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은 지 고작 5분이 지났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원망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사안이었다.

“너희 아버지 혹시…… 데르카이드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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