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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115화 (115/257)

115화.

아리스는 일찌감치 나와 삽질을 하여 시신을 안치할 자리를 만들고 지하실에서 미라를 정중하게 밖으로 모셔 왔다. 지하실에서 미라가 나오자 율비네와 라일라가 배신당한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밑에 미라가 있다는 것도 알려 주지도 않고 하룻밤을 슬그머니 넘어갈 생각을 했냐는 원망을 들으며 제법 장례식 비슷한 의식을 해 주었다.

자기 일을 얼추 마친 미레아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미라의 명복을 빌어 주고 근처 바위에 앉아 멍하니 쉬고 있는 아리스를 슬쩍 보았다. 밤잠을 설치고 그마저도 거의 못 잔 데다 아침부터 연달아 힘을 쓰는 일들을 해서 그런지 그는 조금 정신이 멍해 보였다. 미레아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 집의 잔해들을 엄폐물 삼아 몸을 숨기고 눈만 빼꼼 내밀었다.

“아리스. 야, 야.”

개미만 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아리스는 귀도 좋은지 미레아가 있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미레아는 입 앞에 검지를 올려 아리스가 큰소리 내지 못하게 막고 손을 까닥거려 그를 불렀다. 아리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발소리를 죽이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 해?”

아리스의 물음에 미레아는 바로 답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 아니면 당분간 단둘이 얘기할 기회가 잘 없을 것 같아서.”

그 말에 아리스는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내가 아니고 네가 얘기해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무슨 얘기?”

“전부터 나한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며.”

그 말에 아리스는 꿈속에서 자신이 미레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딱딱 때리며 자학하기 시작했다.

“난 그거 꿈인 줄 알고! 꿈인 줄 알고 그랬지!”

“묻고 싶은 게 뭔데?”

아리스는 그대로 대답도 없이 도망가려다 미레아가 뒤에서 달려들어 팔로 목을 조르는 바람에 미수로 그쳤다.

“반응이 이러한 걸 보니 대체 무슨 질문인지 더욱 들어야겠는데?”

“그러니까…… 그게…….”

아리스는 미레아가 놓아주자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꿈속에서의 미레아가 진짜인 줄 모르고 무심코 한 말이었지만 이래저래 시기적으로 지금이 적기인 질문이긴 했다.

사실 아리스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일전에도 한 번 했던 것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마수를 몰고 와 가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을 죽게 한 자신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는지.

미레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리스에게 악감정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다고 했지만, 아리스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부당한 일을 겪은 사람은 그 일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어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덜 억울하기 때문이었다.

미레아 역시 인간이라면 그런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는 미레아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이 원망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미레아의 솔직한 마음을 알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이 옆에 있어도 괜찮은지, 증오하지는 않는지 그런 대답 같은 건 영영 모르고 싶었다. 스스로 감정을 들쑤셔서 서로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레아에게 향한 지금 이 감정이 단순한 호감 이상의 것이라면, 그리고 자각한 것이 지금이라면, 이 질문을 던져야 할 때는 어쩌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만약, 미레아가 속으로는 원망을 하고 있었다면 아리스가 감정을 자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시점에 아는 것이 여러모로 서로에게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 줄 수 있을 때였다.

그러니 지금이었다. 지금이어야 한다.

아리스는 질문을 기다리는 미레아에게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너는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그 말에 미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말일까 했더니 또 그 질문이네. 이미 한 번 대답한 거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하지만…… 네가 그렇다 해도 너에게 어떤 식으로 속죄해야 할지 모르겠어.”

“표정을 보아하니 내 말을 못 믿는구나? 음…… 어떻게 해야 믿어 줄까.”

미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아리스를 마주 보았다.

“나도 네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자면…… 내게는 5년이란 시간이 있었지.”

그렇게 서두를 연 미레아가 말을 이었다.

“5년 전에 그런 참사가 있고 난 이후…… 솔직히 말하자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어. 내 가족을 빼앗은 너를 증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야. 맞아. 네 예상대로 처음에는 너를 증오하기도 했어.”

그 말에 아리스는 심장이 옥죄는 것 같았다.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어 주먹을 쥔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걸 눈치챈 미레아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너에 대한 많은 것을 찾아보았어. 내가 어떻게 네 어릴 적 사진을 봤는지 알 것 같지 않아? 나는 네가 태어난 날부터 시작해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또 어떤 사람인지 제법 많은 자료를 수집했어. 혼자서 하기엔 부족했지만 나는 여러모로 정보를 대 줄 인맥이 있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너에 대해서 제법 많이 알고 있어. 그리고 너의 흠을 찾으려고 광적으로 집착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렇게 3년 정도를 너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결국엔 그만뒀어.”

미레아는 아리스를 올려다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무리 찾아보고 생각해 봐도 네 잘못은 없는 거야. 그게…… 실수라 말할 수는 있어도 죄를 묻기엔 너도 이용당했을 뿐이니 네 잘못은 아니었잖아. 남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너는 태어날 때부터 황실에서 멸시 당했었고, 그래서 분풀이할 곳이 필요했고, 공교롭게도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었고…… 너는 여러모로 운이 안 좋았어. 그래서 너를 증오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었어. 그리고…… 그렇잖아?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자신을 갉아먹기 쉬워.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멈췄어야 했어.”

미레아는 말하는 동안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아리스에게 눈을 맞췄다.

“아무튼, 나는 너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둔 후 남은 2년 동안은 세피로스의 밑에서 일하면서 때를 기다렸어.”

“때?”

“세피로스는 적어도 이 세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잖아. 세피로스의 밑에 있으면 나쁜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 나는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린 건지도 몰라. 내 손으로 직접 너와 나를 이렇게 만든 자들, 세계를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순간들을.”

그렇게 말하는 미레아의 눈빛은 잘 벼려진 칼날 같았다.

“만약 너를 몇 년 더 일찍 만났었다면 만나자마자 네게 주먹을 날렸을 거야. 너를 처음 만났을 때 항간에 도는 소문이나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속에 있는 네가 아닌 실재의 너는 어떤지 궁금했다고 그랬지? 나는 너를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었어.”

“그래서?”

아리스는 초조하게 물었다.

“직접 본 나는 어때?”

미레아는 긴장한 것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난 아리스를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원망을 쏟아 낸 만큼 그 역시 그만큼의 고통과 죄책감을 아직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은 자신의 실수를 다시 되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아리스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내가 직접 겪은 너는 조금 재수 없고, 건방지고, 냉소적이고, 장난도 잘 치고, 능청맞고, 잘 웃고, 상냥하고, 책임감 강하고, 그리고…….”

아리스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섞어 솔직하게 읊던 미레아는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레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튀어 나갈 뻔한 말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아무리 솔직하게 말하는 상황이라 해도 저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튀어나온 생각은 미레아를 당황 시켰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을 뻔한 좋아한다는 말이 동료애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미레아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제법 좋은 사람.”

미레아가 간신히 쥐어짠 말에 아리스의 귀 끝이 붉어졌지만 미레아는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지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말로는 세계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고 그러면서도 너는 네가 한 짓에 고스란히 상처받았잖아. 그건 자학에 지나지 않아, 아리스. 나는 네가 이 세상을 솔직한 마음으로 대하고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어.”

말을 두서없이 내뱉던 미레아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면 네 마음이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아리스는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고 눈썹을 늘어트리다 짧게 헛웃음을 들이키는가 하면 종국에는 입술을 꾹 닫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런 말을 해 주는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날 것의 감정 그대로를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것을 다른 식으로 오해한 미레아가 황급하게 덧붙였다.

“내가 너에게 원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너와 춤을 추는 일도 없었겠지. 진짜야. 진짜라니까?”

미레아의 속사정이 어떤지 알 리 없는 아리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기뻤지만, 최대한 과장되지 않게 티를 내지 않도록 나름 애를 쓰는 중이었다.

‘이렇게 티가 나는데.’

미레아는 아리스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모를 리가 없지.’

미레아가 지금까지 봤던 아리스는, 웃고 있어도 미처 숨기지 못한 냉기가 흐르는 그런 분위기였다. 천진한 것 같다가도 그 안은 텅 빈 것 같은 사람. 다른 사람들이 바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부드럽게 밀어내며 항상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미레아를 보고 환히 웃는다. 해사하게. 눈꼬리가 접힐 정도로. 얼굴 근육에 긴장을 풀고. 아리스는 언제나 미레아에게 상냥했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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