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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114화 (114/257)

114화.

아까는 자신을 알아보는 듯싶더니 다시 싫다고 꿈쩍도 안 하는 아리스 때문에 미레아는 환장할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왜 그렇게까지 거부하는 건데?! 지금까지 잘했잖아! 살고 싶었고, 네 잘못을 되돌리고 싶어 했잖아!”

“난 자신 없어. 내가 살아 있어도 되는지 확신이 없어. 내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나도 커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모두가 나를 비난해. 그런 내가 살아도 괜찮겠어?”

그런 말을 하는 아리스의 얼굴을 보니 미레아는 새삼 그가 참 순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청명한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가 자리 잡은 두 눈은 매끈하게 빠지긴 했으나 살짝 둥글둥글한 모양새였고 이목구비의 선이 굵지 않아서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평소에는 반쯤 권태롭거나 반쯤 날이 서 있어서 그렇게 못 느꼈는데 그런 분위기를 걷어 내니 생각보다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얼굴이었다.

이것이 네 본질이었구나.

아리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본 미레아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렇다. 아리스 역시 미레아와 닮은꼴이었다. 그의 능청맞고 뻔뻔한 태도는, 천성 이전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미레아가 자신의 슬픔에 매몰되지 않도록 더욱 밝게 행동했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래서 미레아는 아리스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아리스는 미레아를 보더니, 주저하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인내심을 잃은 미레아는 아리스의 멱살을 잡더니 그대로 박치기를 했다. 머리가 띵하게 울린 것은 박치기를 한 쪽이나 당한 쪽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을 참고 미레아는 두서없이 말을 뱉어 냈다.

“거, 참 시끄럽네! 내가 괜찮다 그랬잖아! 나는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거야.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세계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아!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잔뜩 있고! 겪고 싶지 않은 일도 잔뜩 있고!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도, 슬픈 일도, 괴로운 일도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어!”

아리스가 얼얼한 이마를 손으로 부여잡고 황당한 얼굴로 미레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하지만! 살다 보면 아주 조금쯤은 웃을 일도 있기 마련이고, 그것 하나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수많은 괴로운 일들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어. 그게 사는 이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너를 괴롭히는 것들이 저 밖에 우글우글할지 몰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아! 배신하지도 않아! 네가 괴로울 때 내가 같이 있어 줄게! 이것만큼은 약속해!”

미레아는 아리스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이 공간을 빠져나가자!”

아리스는 대답을 주저하다가 미레아의 뒤쪽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보고는 그녀를 밀쳤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커다란 앞발이 땅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들을 공격한 마수는 아리스에게 덤벼들려 그랬다. 미레아는 그 앞을 막아서서 연달아 들어오는 공격에 검으로 마수의 발톱을 쳐 내었다.

“나랑 약속했잖아! 계절마다 정원이 어떻게 변하는지 함께 보기로 했잖아!”

미레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상황을 관전 중인 아리스에게 악을 썼다.

“약속 지켜!”

아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괜찮아? 너는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나 때문에 너의 가족이…….”

죽었는데.

아리스는 뒷말을 삼켰다.

“아니야! 나는 너와 함께 이 공간에서 나가기 위해 여기 온 거야. 네가 같이 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어! 네가 정말로 미웠으면 나는 여기 있지도 않았어!”

미레아는 마수에게서 떨어져 아리스의 앞으로 달려가더니 그를 꽉 끌어안았다.

“만약 지금 나가고 싶지 않다면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나도 여기 있을게.”

아리스는 미레아의 등 뒤에서 커다란 주둥이를 쩍 벌리고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마수를 바라보았다. 미레아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리스는 주저 없이 땅에 꽂혀 있던 페니드란을 뽑았다. 그리고는 검은 날개를 펼쳐 마수에게 달려들었다. 목을 깨끗하게 베어 내자 마수는 허망할 정도로 쉽게 쓰러졌다.

그는 손에 든 검을 잠시 내려 보다 미레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리스는 어느새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레아는 옷에 묻어 있던 눈을 털며 그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리스는 미레아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하지만 미레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아리스는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는 것처럼 허공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 틈새로 금색 빛이 그들을 내리쬐었다.

“리비엘로의 신성력이야.”

아리스가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자 신성력이 파고들 틈이 생긴 것이었다. 저 빛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리스는 주저했다. 그에게는 꼭 답을 얻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사실은 전부터 네게 묻고 싶은 말이 있어.”

미레아가 아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괜히 긴장된 아리스는 입술을 한번 축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해 주겠다고 약속해 줄래?”

“뭔진 모르지만, 그래.”

미레아가 아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빛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 * *

“허억!”

“헉!”

미레아와 아리스는 동시에 숨을 들이마시며 벌떡 일어났다. 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스!”

진이 아리스를 끌어안으며 우는소리를 내었다.

“내가 너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정말! 왜 사람을 걱정하게 만드십니까?!”

율비네도 거들며 아리스에게 질책 아닌 질책을 했다. 미레아가 아리스를 깨우러 들어간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지체되자 걱정스러워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것 같은데…….”

아리스는 조금 몽롱한 목소리로 자신의 주변을 빙 둘러싼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꿈에서 깨긴 했어도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듯싶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리스의 물음에 일행들이 그에게 술에 녹아 있던 마수 때문에 벌어진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매우 창백해졌다.

“그럼 내가 꿈에서 본 그게 진짜 미레아였다고……?”

“그래.”

“내가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쓴 것 같았는데…….”

“맞아.”

“네가 박치기한 것도…….”

“그거 꿈인 거 아는데도 느낌이 제법 실감이 나더라.”

미레아가 연신 끄덕거리면서 대답하였다. 심층 의식 속에서 속마음이랍시고 뭔가 낯간지러운 말을 주고받은 기억이 밀려오자 아리스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걱정하지 마. 내가 본 건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

자기는 입이 무겁다는 미레아에게 아리스는 할 말이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미레아에게 벌컥 화를 내었다.

“야! 너는 그 상황에서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줄 알고 내가 안 가면 너도 그 안에 남겠다고 한 거야?!”

“뭐?”

“미쳤어? 제정신이야? 나 같은 게 뭐라고 네가……!”

그러자 미레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돌아왔으니 됐잖아!”

“너는 나를 지나치게 좋게만 평가해! 나를 믿지 마!”

“왜 거기에 화가 난 거야? 내가 너를 믿는 게 나쁜 일도 아닌데!”

“내가 정말로 안 간다고 그랬으면 어쩔 뻔했는데?”

“결국엔 안 그랬잖아!”

“너는 항상 대책이 없이 움직여! 생각이란 걸 하란 말이야!”

“뭐라고?!”

둘이 아웅다웅하는 걸 보고 있던 진이 주먹으로 아리스의 정수리를 퍽 하고 내리쳤다. 그 바람에 둘은 언쟁을 멈추고 진을 올려다보았다가 그녀의 표정이 무시무시한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네 꿈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좋은 꿈이라 해도 돌아오기 싫다고 그러면 어떡해?”

율비네가 그런 진을 진정시켰다.

“어쨌든 무사히 돌아와서 천만다행입니다.”

연신 자신에게 잔소리를 쏟아붓는 진과 율비네에게 아리스는 그런 둘을 보고는 어색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러니까…… 미안해.”

그들이 감격의 재회를 하는 동안 리비엘로 역시 한숨 돌린 얼굴로 미레아에게 말했다.

“용케 데리고 나왔네.”

“말도 마. 어찌나 말을 듣지 않는지…….”

미레아가 중얼거리자 진이 아리스의 등을 퍽퍽 때렸다.

“빨리 미레아에게 고맙다고 인사해!”

찔리는 구석이 많은 아리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고마워.”

미레아가 씨익 웃는데 갑자기 바닥이 잘게 떨렸다. 먼지투성이인 바닥에 작은 회오리가 생기면서 먼지들이 한데 뭉치는가 싶더니 허공에 작은 공 모양의 물체가 나타났다. 윙윙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그것을 파울로가 검으로 정확하게 두 동강 내었다. 안에서 반으로 쪼개진 핵이 굴러 나왔다.

“이게 본체였군. 먼지가 내려앉듯 술에 들어 있었던 건가 봐.”

어떤 연유가 되었든 마수를 자진해서 먹은 사람들은 비위 상한 얼굴로 마수의 핵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금주할래…….”

“나도.”

“나도…….”

라일라가 중얼거린 말에 미레아와 시오도 동의했다. 다들 꿈자리가 사나웠던지라 붉게 충혈되고 퀭한 눈으로 함께 동이 트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저마다 기운 없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가 해가 어느 정도 떠올라서야 약속이라도 한 듯 비척거리며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별장 뒤쪽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지은 아침밥도 의심스러웠던 그들은 리비엘로가 음식에 축복을 내려 주고 나서야 숟가락을 들었다. 일행들은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 및 잡일들을 할 사람들과 트럭 수리를 할 사람들을 나누어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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