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13화 (113/257)

113화.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돼. 이건 다 마수의 소행이란 말이야! 이건 현실 세계가 아니고 단순한 꿈도 아니야. 마수가 네 정신을 몰아붙여서 영소를 빨아먹으려는 수작이라고! 죽는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 밖에서 다들 걱정하고 있어.”

“나를?”

그러더니 코웃음을 쳤다.

“대체 누가?”

“다른 일행들 전부.”

“거짓말.”

“그렇지 않아. 특히 율비네와 진이 제일 걱정하고 있단 말이야.”

“진 누나와 율비네…….”

“그래! 그 둘은 누군지 알겠어?”

자신은 몰라도 주변 사람들은 알아보는 것 같아 미레아가 캐물었다.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둘에게는 내가 없는 편이 훨씬 나아.”

“왜?”

“나랑 함께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디트레히트도 그래서 죽고 아버지도…….”

대화하기 싫다는 그 태도에 미레아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끌어 봤자 아리스에게 좋은 것은 전혀 없었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그 둘은 네가 생각한 것보다 강하고 너를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오히려 네가 여기 이러고 있는 것을 걱정한단 말이야. 그 둘을 그대로 둘 거야?”

설득하는 미레아의 말에도 아리스는 꿈쩍하지 않았다.

“정말인데…….”

아리스는 자신의 앞을 서성거리는 미레아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여기서 나가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없으면 클라인은 정말로 죽은 땅이 되어 버린단 말이야. 우리 임무까지 잊은 거야?”

“알 게 뭐야.”

아리스는 어두운 눈으로 말했다.

“그런 것 따위 내가 알 바 아니야.”

미레아는 눈을 깜박거리다 아리스를 보고 말했다.

“거짓말쟁이.”

“뭐?”

“지금 하는 말 다 거짓말이잖아.”

“마음대로 생각해.”

미레아는 그러면서 고개를 팩 돌리는 아리스를 쫓아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그럼 나는 어때?”

미레아가 다시 아리스의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관심을 끌기 위해 애를 썼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응?”

“네가 뭔데?”

“말했잖아.”

미레아는 보란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난 미레아 제인스터. 현재 라슈발렌 전투부 특수 기동대 소속 전투 요원.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은 사냥개. 지금은 너를 구하러 온 구세주. 하지만 그것을 다 빼면 그냥 미레아 제인스터. 그리고…….”

아리스와 처음 만난 어느 날, 그녀가 했던 자기소개였다. 미레아는 망설이다 그때는 붙이지 않았던 말을 덧붙였다.

“너의 절친한 친구.”

“친구?”

“우리가 만난 지 석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추억이 제법 쌓였다고 생각하거든. 기억나지 않아? 우리 얼마 전에 춤도 같이 췄고 같이 마수랑도 싸웠고…….”

미레아는 아리스와의 추억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주먹도 날렸었고…… 아! 그리고 네가 우리 집 정원을 꾸며 줬어! 이 정도면 제법 가까운 친구 사이 아니야?”

하지만 아리스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기억 안 나.”

“생각해 봐! 그때 너는 즐겁지 않았어?”

“몰라.”

“나랑 사진 찍기로 했잖아!”

기어이 갑갑한 마음을 못 참고 미레아가 성을 내는데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떨결에 소리가 난 바지 뒷주머니를 뒤지자 그녀의 정원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이것이 왜 여기 이렇게 있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미레아는 그것을 아리스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봐 봐, 정말로 기억 안 나?”

아리스는 머뭇거리다 그것을 건네받고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몬드 꽃은 많이 떨어졌지만, 한해살이풀들이 꽃을 피우고 수국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직전인,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어느 날의 추억을 담은 그런 사진. 그 한가운데에서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이었다.

“록산의…….”

“그래! 우리 집!”

아리스가 알아보는 기색이 있자 미레아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어때, 어때? 이제 좀 기억나?”

“미레아 제인스터.”

“응.”

“미레아 제인스터.”

“그래.”

“맞아, 기억나.”

“정말?”

아리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미레아 역시 따라 일어났다. 아직 키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은 그는 미레아를 올려다보았다. 권태에 잠겨 있던 그의 눈이 순간 생기가 돌았다.

“그래, 왜 잊고 있었을까. 내가 너를…….”

아리스가 말을 잇기 위해 입을 열자 저 멀리서 늑대가 하울링이라도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미레아가 저도 모르게 경계 태세를 취했다. 미레아의 꿈속에서도 이런 식이었다. 마음을 놓는 순간 절망이 다가와 기분을 내동댕이친다. 무엇이 올지 몰라 미레아는 검에 손을 올렸다.

쌓여 있던 눈이 불룩 솟더니 하얀 여우 모양의 마수가 그 안에서 나왔다. 그것은 뾰족한 주둥이에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와 붉은 눈을 가졌고 이곳에 쌓인 눈만큼 하얗고 거친 털이 온몸에 돋아 있었다. 긴 꼬리가 움직일 때마다 쌓여 있던 눈이 휘날렸다.

“모습을 드러냈군! 아리스가 제정신을 차릴 것 같으니까 슬슬 초조한가 보지?”

미레아는 쌍검을 뽑아 들며 마수에게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아리스의 심층 의식 속에 자리를 잡고 있던 저것은 그림자고 허상이었다. 이 공간의 주인이 아닌 미레아의 공격이 얼마나 통할진 모르겠지만 두 눈 뜨고 당할 수는 없었다.

미레아는 마수의 앞발을 피하면서 눈밭을 굴렀다. 그런데 아리스는 제자리에서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마수는 미레아를 훌쩍 뛰어넘어 아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칫.”

미레아는 얼른 마수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높게 뛰어올라 마수의 등에 올라탔다. 이것은 허상이기 때문에 핵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었다. 어느 부분이 약점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마수의 눈을 찔렀다. 마수가 머리를 세게 터는 것을 내버려 두고 미레아는 그것의 등에서 뛰어내려 멀뚱멀뚱 서 있는 아리스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일단 피하자!”

갑자기 바닥에서 하얀 팔들이 여럿 튀어나오더니 아리스의 다리와 몸을 붙잡았다.

“이건 또 뭐야?”

미레아가 검으로 그것들을 잘라 내었다. 하지만 아리스를 붙잡은 팔의 개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뒤이어 바닥에서 서서히 솟고 있는 것은 팔의 주인들이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는 군중이었다. 그들을 본 아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네가 우리를 죽였어.

누군가 그리 말했다.

― 아직 어린 아이들마저 전부! 네가 죽였어. 이 살인자. 피도 눈물도 없는 도살자.

아리스와 미레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움직일 수 없었다. 마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묶어 두고 느긋하게 그 주변을 빙빙 돌았다. 아리스는 주춤거리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다 뒤를 버티고 서 있는 노쇠한 남자에게 가로막혔다. 그는 원망 어린 얼굴로 아리스를 내려다보았다.

― 나를 죽이고 얻은 그 권좌는 만족스럽더냐, 루데키아스?

그는 아리스가 죽였던 선대 황제였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죽이려 했어.”

아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내 사촌인 디트레히트도 죽였어. 내 가족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어!”

― 그래서 네게 남은 것은 무엇이지?

아리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렇게 묻는 선대 황제의 머리가 저 멀리 날아갔다. 미레아가 그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이었다.

“시끄러워. 아리스는 나랑 갈 거야.”

미레아는 마수가 불러온 망령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망령들은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었다. 애초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베어서 없앤다 해도 마수가 다시 불러오면 그만이었다. 마수를 물리치거나 미레아처럼 아리스가 직접 그들의 말을 거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곳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미레아가 제힘을 발휘할 수도 없을뿐더러 물량 공세는 버티기 힘들었다.

게다가 망령들은 미레아가 공격하며 관심을 끌으려 그래도 아리스에게만 달려들었다. 모든 방향을 신경 쓸 수 없다 보니 망령 중 하나가 아리스의 목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아리스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쥔 망령의 손목을 붙잡았다. 미레아가 다른 망령들을 뿌리치고 달려와 아리스의 목을 잡고 있던 망령의 팔을 베자 목이 자유로워진 아리스가 털썩 쓰러졌다.

미레아는 아리스를 등 뒤에서 끌어안아 자신의 품 안으로 들였다. 모든 공격을 다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외부 공격에서 아리스를 지킬 순 있었다.

“아리스, 들어 봐. 저 사람들 말대로 너는 선황제의 목을 베고 반대쪽 세력의 사람들을 죽였어. 그게 친인척이라 해도 말이지. 나는 그 당시 네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어. 하지만…….”

미레아는 자신을 당기고 밀치는 망령들 때문에 말을 이어 가기 힘들었다. 그래도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가족이 다치고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아리스는 살고 싶었던 거지?”

아리스가 미레아를 돌아보았다.

“너는 항상 이랬다, 저랬다 해. 세상만사 다 무관심한 것 같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냉소적인 것 같다가도 인간답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어. 모순투성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가끔 어떤 것이 진짜 너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너는 그 누구보다 살고 싶어서,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해 왔던 거잖아?”

아리스는 조금 놀란 얼굴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그러니까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고 했었던 거잖아.”

미레아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건 나쁜 게 아니야. 당연한 거야. 지금도 살고 싶잖아. 죽고 싶지 않잖아! 이 세계가 어찌 되든지 상관없다고 한 것도 사실은 거짓말이잖아! 그러니 나와 가자.”

하지만 아리스는 망설이더니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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