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12화 (112/257)

112화.

“안 돼!”

진이 아리스에게 달려가 그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리스! 일어나 봐! 야!”

진이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아리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행들은 저마다 불안한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꿨던 꿈은 다들 악몽으로 끝이 난 것에 비하면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지금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함부로 잠에서 깨우는 것에 죄의식이 들 만큼 고요했다.

“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진이 아리스에게서 한 발 물러나며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리비엘로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해결책을 내놓으란 무언의 압박에 리비엘로가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저보다 신성력이 높으신 분이라면 아리스에게 붙어 있는 마수를 몰아낼 수 있겠지만…… 제 능력으로는 힘이 부족하고 지금은 아리스가 스스로 깨어나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니 이건…….”

리비엘로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세피로스가 손등 위에 턱을 괴고 생각하다 말했다.

“외부에서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면 내부에서는……?”

“내부요?”

“나나 미레아, 진은 신성력 없이 스스로 깨어날 수 있었지. 의식 안쪽에서 마수를 대항할 만한 정신력이 있었으니 말이야. 그러니 외부 자극이 소용없다면 그의 내부에서 접근하면 무언가 답이 있지 않을까?”

“내부라면…… 어떤 식인 거죠?”

다급한 율비네의 질문에 세피로스는 일단 그녀를 진정 시켜야 했다.

“아리스의 심층 의식에 접근하면 직접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를 깨우는 것 역시 가능하겠지.”

“그런 게 가능한가요?”

누군가의 의식에 들어간다니 일행들은 그런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가능하다고 확언했다.

“마법과 신성력이라면 할 수 있어. 문제는…….”

세피로스는 일행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가는가…… 인데.”

“그런 거라면 제가……!”

율비네가 손을 번쩍 들며 자원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자넨 안 돼.”

“왜죠?!”

“그냥 살살 구슬려서 데려올 수 있었다면 신성력으로 이미 돌아왔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지 않아. 아리스를 제대로 설득할 사람이 필요해.”

“그게 누구인데요?”

파울로의 질문에 세피로스는 미레아를 콕 집어 말했다.

“네가 가.”

“네?! 저요?!”

미레아는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꺾였다.

“왜 전데요?”

“우리 중 아리스와 적당한 호감 관계에 있으면서 그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 그게 너다. 그리고 자력으로 마수의 꿈에서 빠져나온 만큼 어지간한 일에 휘둘리지 않을 정신력을 갖고 있지.”

“그게 뭐예요. 잘 모르겠어요.”

“깊게 이해할 수 없으면 그냥 결과만 들어. 너밖에 없어.”

율비네는 자신이 갈 수 없다는 말에 좀 분해하는 얼굴이었지만 이해는 한 기색이었다. 세피로스는 쿤둘렌에게 마법 술식을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는지 풀어서 설명해 주고 리비엘로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신성력은 영혼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힘 중 하나다. 그러니 신성력으로 미레아의 영소를 아리스의 안으로 밀어 넣어 주면 미레아의 의식이 그의 심층 의식 속으로 떨어질 수 있을 거야.”

리비엘로도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지목을 당한 미레아만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있다가 세피로스가 아리스의 옆자리로 데려다 놓자 그제야 흔들리는 눈동자로 세피로스를 보았다.

“일단 옆에 누워.”

“아니, 전 자신이 없는데요…….”

“없어도 해야 해.”

“잘못되면 어떡해요?”

세피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넌 리비엘로의 신성력과 연결되어 있을 테니 괜찮을 거다.”

“저 말고 아리스는요?”

“그러니까 네가 잘해야지.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세피로스는 미레아의 어깨를 잡아 눌러 억지로 눕혔다.

“잘 다녀와.”

* * *

아리스의 심층 의식 속에서 미레아가 떨어진 곳은 하얀 눈밭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간이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땅은 마치 그 어떤 이물질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깨끗하고 정갈했다. 그야말로 순백의 세계였다.

미레아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의식 세계라 그래서 태초의 모습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현실에서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어쩐지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리스를 발가벗은 상태로 만나야 했다면 그냥 나가고 싶어졌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얇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안은 제법 추웠다. 아리스의 의식 안쪽인데도 현실과 똑같이 추위를 느끼는 것은 아마 이 공간의 주인인 아리스가 자신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빨리 아리스를 찾아 나가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얼어 죽을 것 같았다.

미레아는 조금 죄를 짓는 기분으로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눈밭에 발을 내디뎠다.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이 찍혔다. 혹시 아리스가 남긴 발자국이 있으면 단서가 될까 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 눈밭 위에는 미레아 혼자였다.

“아리스!”

미레아는 양손을 입가에 모아 아리스의 이름을 연달아 불러 보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전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똑같을 것 같았기 때문에 앞을 향해 걸었다. 걷기 어려울 만큼 눈이 쌓인 것은 아니라 저벅저벅 걸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미레아가 걸어온 길을 따라 발자국이 줄지어 있었다. 그 이외에는 여전히 하얀 눈밖에 없었다.

슬슬 발이 시리기 시작하고 제법 걸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을 때 미레아는 마침내 시야 너머에 무언가 툭 튀어나온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그것은 땅에 박혀 있는 검이었다. 미레아는 그 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마검 페니드란.

일반적인 브로드 소드 길이의 그 검은 가드는 짙은 푸른색이었고 은으로 된 장식이 있었다. 손잡이는 부드러운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폼멜(도검의 칼자루 끝에 부착하는 물건)에는 붉은 술이 달려 있었다. 비록 허상이기는 하나 사진 이외의 실물은 처음 봐서 미레아는 신기한 마음에 페니드란을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그런데 페니드란이 박혀 있는 주변부는 여전히 눈 이외의 것은 없었다. 미레아는 고민하다 양손으로 페니드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다리와 팔에 힘을 주어 그것을 뽑으려 그랬다. 검이 움찔거린 그 순간이었다.

“하지 마.”

누군가의 손이 미레아의 손 위를 누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돌리자 검고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예쁘장한 소년이 미레아의 옆에서 그녀를 우울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뽑지 마. 그냥 둬.”

바닥에 쌓인 눈보다 더 시릴 것 같은 푸른 눈이 느릿하게 페니드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레아는 마침내 고대하던 만남에 반가운 미소가 활짝 폈다.

“아리스!”

소년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페니드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자신을 무시하자 미레아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아리스? 아리스…… 맞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눈을 반쯤 떴다. 그는 얇은 셔츠에 면바지, 그리고 부츠 차림이었는데 춥지도 않은지 눈 위에 그대로 앉았다. 수척한 티가 나는 얼굴은 눈 밑이 거뭇하여 많이 피곤해 보였으며 어딘가 지친 모습이었다.

생기가 없는 푸른 눈동자에는 하얀 눈밭이 비췄다. 지금보다 더 앳된 얼굴에 미레아는 그의 나이를 짐작해 보았다. 미레아는 지금까지 아리스의 사진을 줄곧 봐 왔고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 모습은 15살 무렵이었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 끝이 바닥에 그대로 끌렸지만, 아리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야?”

궁금증보다는 약간의 적대감 어린 얼굴에 미레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나? 나 모르겠어?”

“알아야 해?”

아리스는 어린 얼굴에 걸맞지 않게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듯 권태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자신의 관자놀이께를 긁다가 이내 생긋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내 이름은 미레아. 미레아 제인스터야.”

그렇게 자기소개를 한 미레아는 다시 물었다.

“정말 누군지 모르겠어?”

“몰라.”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한 아리스는 미레아에게 별 관심이 없는지 다시 눈을 감고 검에 기대었다. 아리스가 자신을 모르는 거로 모자라 관심도 보이지 않자 당황한 미레아는 아리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그의 발끝을 톡톡 두드렸다.

“아리스.”

고작 그런 거로는 아리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레아는 아직 여려 보이는 아리스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제지가 들어왔다. 미레아의 손을 낚아챈 아리스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미레아는 어찌 되었든 아리스가 반응했다는 사실에 반색하며 말했다.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었어?”

“…….”

“응?”

미레아가 부담스럽게 얼굴을 들이밀자 아리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냥 있었어.”

“혼자?”

“응.”

“춥지는 않아?”

“괜찮아.”

아리스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미레아는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왜?”

“그야 여기는 아무것도 없고, 삭막하고, 춥고…… 영 별로잖아.”

아리스는 미레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가 하늘에서 하나둘씩 내리고 있었다. 아리스의 어깨에 눈이 쌓이기 시작하자 그는 손으로 양어깨를 감쌌다.

“하지만 여기는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도 않아. 나를 찾는 사람도 없고, 이용하려는 사람도 없지.”

그는 스르르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여기 있을래.”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어도 지금 상태를 제법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이 안 통하자 미레아는 초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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