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아래에서 부모님이 준비가 다 됐다고 부르는 소리가 나자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미레아는 왼팔에는 레인의 팔을, 오른팔에는 케이드의 팔을 끼우고 부모님께 매달려 어리광을 부렸다. 집 뒤쪽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따라 해변에 도착하자 그들은 준비한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미레아는 레인의 다리를 베고 누워 그녀가 시집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을 가만히 들었다. 케이드는 옆에서 미레아의 입에 포도 알을 한 알씩 넣어 주었다. 과즙이 팡팡 터지는 포도를 씹으며 미레아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히히, 좋다. 이야, 꿈 한번 실감 나네.”
부모님은 다정했고 날은 좋았다.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들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포말을 만들었고 바닷새가 하늘을 날아다녔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이런 기분을 느껴 본 것은 5년만이었다. 보고 싶었던 엄마, 그리고 5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아빠. 미레아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꿈에서 깨도 잊지 않도록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물이 빠지는 소리가 나더니 바닷물이 해변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줄곧 바닷가에서 살던 미레아는 그것이 무슨 일의 전조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해일이 오려는 것이었다. 미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니, 미레아?”
미레아의 부모는 다소 태평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미레아가 레인의 어깨를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해일이 오나 봐! 여기서 피해야 해!”
하지만 레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니?”
케이드가 포도송이를 미레아에게 내밀었다.
“먹을 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마저 먹자꾸나.”
하지만 그들의 등 뒤에서 엄청난 기세로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미레아는 해일이 오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부모님을 보며 되뇌었다.
“이건 꿈이야.”
미레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꿈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야. 이 해일은 가짜야.”
“아니, 꿈이 아니야.”
돌연 케이드가 미레아의 말을 부정했다.
“이미 한 번 겪은 일이잖니?”
그가 보란 듯 양팔을 들어 올리자 밀려오던 해일 속에서 마수들이 튀어나왔다.
“안 돼!”
미레아의 외침이 부질없게도 마수는 케이드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찢어 버렸다.
“아빠!”
마수는 미레아를 스치고 지나가 레인의 머리를 덥석 물었다.
“그만해!”
미레아는 그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무기도 없었고 무력한 어린아이였으니까. 해일은 사라졌지만, 미레아는 어느새 마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마수들이 살과 뼈를 씹는 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하게 들렸다. 미레아는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하지 마! 내 꿈에서 이런 광경을 보여 주지 마!”
정말로 악독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귀를 틀어막은 것이 부질없게도 미레아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이었지만 부모님이랑 행복했어?”
미레아가 흠칫 떨며 눈을 뜨자 눈앞에 휴레오가 있었다. 그는 섬뜩한 눈을 하고 미레아를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
“누나 말대로 이건 꿈이야.”
휴레오가 생긋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현실을 잊으면 안 되지.”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이렇게 어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휴레오의 뒤에는 피주검이 된 레인과 케이드가 있었다. 그는 미레아가 고개를 돌릴 수 없도록 그녀의 턱을 쥐고 말했다.
“이게 현실이야.”
미레아는 참담한 기분으로 부모의 주검을 보고는 눈동자를 돌려 휴레오를 바라보았다. 휴레오는 소름이 끼치도록 입이 찢어지라 웃고 있었다. 미레아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너…… 누구야?”
“이런, 이젠 동생도 까먹은 거야?”
서운하다며 눈썹 끝을 늘어트리는 휴레오에게 미레아가 비죽 웃어 주었다.
“웃기지 마. 넌 휴레오가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누나의 동생인 휴레오 제인스터가 맞아.”
“아니. 감히 나를 속이려 들어? 너는 휴레오가 절대 아니야.”
그 단호한 말에 휴레오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휴레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따듯하며, 용감하지. 그러니 너는 절대로 휴레오가 아니야.”
미레아의 양손에는 어느새 그녀의 쌍검이 쥐여 있었다. 미레아는 그것을 휴레오에게 천천히 겨누었다.
“내 꿈에 들어온 넌, 누구야?”
미레아가 자신의 말에 현혹되지 않자 휴레오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식구들의 모습으로 내게 접근했다니 기분이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가 없네.”
미레아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등 뒤로 넘기며 허리를 곧게 펴고 휴레오를 고압적으로 바라보았다.
“맞아.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빠는 행방불명이야. 그리고 휴레오도 죽었지.”
미레아는 그 누구보다 냉정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난 이미 한참 전에 현실을 받아들였고, 거기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고,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어.”
미레아가 한 발 앞으로 내딛자 휴레오가 당황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러니 이런 구닥다리 같은 꿈에 안주하지도 현혹되지도 않아.”
휴레오의 코앞까지 순식간에 달려든 미레아가 그를 베었다.
* * *
미레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미레아!”
자신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 옆을 율비네가 지키고 있다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미레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율비네를 보았지만, 그녀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스스로 깬 것인가요?”
“스스로 깨다니…… 아, 꿈을 꾸긴 했는데 좋은 꿈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율비네는 여기서 뭐 하세요? 표정은 또 왜 그래요?”
미레아의 말에 율비네가 그녀를 잠깐 기다리게 하더니 리비엘로를 데리고 왔다. 리비엘로는 다급하게 달려온 듯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뒤에 파울로와 세피로스가 따라왔다.
“미레아, 괜찮아?”
“뭐가?”
“내가 누군지 알겠나?”
“리비엘로랑 세피로스, 파울로.”
미레아가 침대에 걸터앉아 다른 사람들을 번갈아 보자 그들은 어쩐지 안심한 기색이었다.
“별다른 부작용은 없는 것 같군.”
세피로스는 미레아의 머리를 짚어 보더니 말했다. 그러는 사이 미레아가 창을 힐끔 보니 아직 한밤중이었다.
“왜들 이 난리인지 내게 설명부터 해 주지 않을래요? 내가 자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꿈을 꾸지 않았나?”
“꿈꾸긴 했는데…… 처음엔 좋은 꿈이었는데 마지막엔 아니었어요.”
“그런데 현혹되지 않고 스스로 깰 수 있었어?”
파울로의 물음에 미레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왜요? 스스로 깨면 안 돼?”
“정확히 어떤 꿈을 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꾼 꿈은 마수가 만들어 낸 것이다.”
세피로스의 설명에 미레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술이 원흉입니다.”
율비네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듯 말하자 리비엘로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술 속에 아주 작은 마수가 있었던 거야. 술을 마신 사람의 정신에 침투해서 행복한 꿈에 안주하게 만든 후 절망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때 나오는 격한 감정의 영소를 먹고 사는 마수였어. 거기서 못 빠져나왔다가는 아마 그대로 서서히 말라 죽었을 거야.”
그 말에 미레아는 아래에 있던 미라를 떠올렸다. 그 사람 역시 술을 마시고 마수가 만들어 낸 꿈에 당한 것이었다.
“가장 먼저 세피로스 님이 자력으로 깨어나 알려 줘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영소를 전부 먹혔을 거야.”
그 말에 미레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 지금 죽을 뻔한 거야?”
“그러니까 술은 자제하시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율비네가 타박하자 세피로스가 코웃음을 쳤다.
“난 그깟 하급 마수가 만들어 낸 꿈 따위에 당하지 않아. 이렇게 멀쩡하잖아. 다른 사람들도 리비엘로가 있으니 괜찮을 거다.”
“다른 사람들은 어때요?”
미레아가 뒤늦게 다른 사람들의 안부를 묻자 세피로스가 설명해 주었다.
“나와 너는 자력으로 깼고, 다른 사람들은 리비엘로가 신성력으로 마수를 몰아내는 중이었다. 파울로도 리비엘로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그때 옆방에서 진이 비명을 질렀다. 미레아를 포함한 사람들이 달려가자 진이 침대 위에서 굴러떨어져 먼지투성이인 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눈을 뜬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아! 꿈을 꿨는데 악몽을 꿔서 그런 거였어요. 별거 아니에요.”
“류진도 자력으로 깼군.”
멀쩡해 보이는 그 모습에 세피로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리비엘로의 신성력 덕분에 아직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꿈에서 깬 시오가 아직 몽롱한 얼굴로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라일라, 쿤둘렌이 찌뿌둥한 얼굴로 잠에서 깼다. 다들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서로의 안위를 물으며 안도하는 사이 마지막으로 아리스가 남았다.
아리스는 상당히 평안한 얼굴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리비엘로는 그의 머리맡에서 신성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런데 수 분이 흐른 뒤, 리비엘로는 당황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리스가 저를 거부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이 없자 리비엘로가 설명을 풀어 말했다.
“제가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어도 아리스가 자신의 꿈에서 나오길 싫어하니까 마수가 거기 단단히 달라붙은 것 같아요. 내 신성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요.”
“예?!”
그 말에 율비네가 펄쩍 뛰었다.
“왜죠?”
“현실로 나오는 것보다 꿈에 머무르는 쪽을 선택한 거예요.”
“왜, 왜 그런…… 그러면 아리스는 이대로 죽는 겁니까?!”
“꿈에서 깨지 못한다면…… 그렇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