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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110화 (110/257)

110화.

진이 한 모금 맛보더니 남은 양을 다 마셔 버리는 것을 아리스가 빼앗았다.

“뭐가 얼마나 맛있다고…….”

그 역시 슬쩍 맛보고는 표정이 변했다. 이 술을 별장에 공급한 사람이나 선별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사용인이었던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칭송했다.

그렇게 술을 한 모금씩 돌려 마셔 보고 다들 남은 술을 홀랑 다 마시지 않게 인내해야 했다. 그만큼 술은 맛이 좋았고 밀려오는 유혹을 참기 힘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들은 율비네와 리비엘로뿐이었다. 율비네는 불침번을 자처하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금주를 주장했고 리비엘로는 신녀이기 때문에 사사로이 술을 마시는 것은 금기였다.

그렇게 술맛을 본 사람들은 다들 인고의 시간을 가졌다. 무엇보다 세피로스는 자기가 술병을 따 놓은 주제에 더 마시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아, 치사해! 이렇게 된 거 잠이나 잘래!”

자는 동안에는 술 생각이 안 나지 않겠냐며 미레아가 미련을 뚝뚝 흘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방에 들어갔다. 일리 있는 말인지라 다른 사람들도 일찍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 * *

미레아가 침대에 누운 지 약 3시간이 지나간 시각이었다.

그녀는 결국 술의 유혹에 굴복했다. 침대를 빠져나온 미레아는 군침을 흘리며 발소리를 죽인 채 가스등을 들고 응접실로 살금살금 내려갔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검은 인영이 있는 것을 발견한 미레아가 깜짝 놀라 소리 지르려는 것을 상대방이 잽싸게 달려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용히 해. 나야.”

시오였다. 그의 손에는 희미하게 술 냄새가 풍기는 병이 들려 있었다. 그렇다. 시오 역시 술의 유혹에 굴복해 잠을 자려다 말고 내려온 것이었다. 미레아는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 시오에게 한 소리 하려다 저도 모르는 사이 들고 있던 가스등을 떨어트렸다. 그 덕에 불이 옮겨붙은 카펫이 활활 탔다. 그들은 허둥지둥 발로 비벼 불을 껐다.

겨우 불을 끈 둘이 한숨 돌리고 있는데 인기척이 나서 재빨리 소파 뒤로 숨었다. 주변을 경계하는 태도로 두리번거리면서 나타난 사람은 파울로였다. 그는 술병에 손을 뻗으려다 매캐하게 올라오는 탄내에 눈을 가늘게 떴다. 미레아가 태워 먹은 카펫을 발견한 파울로는 먼저 온 손님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파울로는 전투부 요원답게 이 장소에서 엄폐물로 쓸 만한 것은 소파라고 판단하고 소파 너머로 상체를 죽 뺐다. 덕분에 파울로와 눈이 마주친 시오와 미레아가 멋쩍게 웃었다. 파울로는 먼저 응접실을 차지하고 있던 둘에게 잔소리하는 대신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너희 혹시…… 다 마신 건 아니지?”

그들도 방금 내려온 것이라 술에는 손도 대기 전이었다. 파울로가 조금 신난 얼굴로 술병을 챙겼다. 그런데 원래 남아 있던 양과 비교 했을 때 개봉했던 술병의 내용물이 절반이나 비어 있었다! 어느 놈이 배신한 것인지 분개하고 있는데 그들은 소파 밑에 납작 엎드려 있던 진을 발견했다. 은신을 들킨 진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기어 나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아니야.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라도 있었나 보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사람이던가.”

그들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서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리스가 패배감에 젖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뒤로 라일라와 쿤둘렌까지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젠장! 자꾸 술맛이 어른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아리스의 말에 사람들이 동의하며 마지막까지 응접실에 남아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바로 세피로스였다.

평소에는 구토 유발제 같은 맛이 나는 차나 홀짝이는 주제에 혼자 남아 두 병 중 한 병을 야금야금 마시고 간 것이었다. 그래도 반이나 남은 것이 얼마던가. 세피로스도 양심은 있었는지 마개를 안 따 놓은 술은 무사했다.

그들은 두 번째 술병의 마개도 따서 공평하게 술을 나누었다. 그때, 창밖의 검은 그림자가 안쪽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다들 실망입니다.”

불침번을 서며 별장 밖을 순찰 중이던 율비네가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안쪽 상황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뜻을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어쩜 아리스까지…… 술이 그렇게 좋습니까?”

율비네의 힐난에 아리스가 변명을 내뱉었다.

“네가 안 마셔 봐서 그래! 나 원래 술 많이 안 마시는 거 알잖아! 이건 술이 잘못이라고!”

“맞아! 율비네도 마셔 보면 생각이 변할걸요?”

“저는 됐습니다.”

미레아의 말에도 율비네는 한사코 사양했다.

“여러분들을 보니 저라도 멀쩡한 정신으로 있어야겠다는 다짐만 굳건해지는군요.”

그녀는 빈정거렸지만 그러든 말든 율비네를 제외한 사람들은 마실 수 있는 술이 줄어들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세피로스도 마셨는데 자신들이 참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들은 잔을 부닥치며 술을 들이켰다. 율비네가 보초를 서며 밖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 그들은 술병을 깨끗하게 비우고도 다소 아쉬워하며 자신의 침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있었다.

* * *

“하암, 잘 잤다.”

미레아는 기지개를 쭉 켜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상시에는 만성피로를 달고 살았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정신이 너무나도 맑았다. 무심코 창밖에서 아몬드 꽃이 바람에 살랑이는 것을 보고는 미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여기 아몬드 꽃이 있지? 아니, 그전에 아몬드 꽃이 필 시기가 아닌데…….

미레아는 의아하게 여기며 침대 밖으로 나오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있는 곳은 록산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이, 이게 뭐야?”

저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 루아드 제국 내에 있는 아리스의 별장에서 잠들었는데 하룻밤 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을 리 없었다.

“아하, 꿈이구나.”

미레아는 간단명료하게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각몽인 거지.”

“미레아! 일어나라!”

그때, 누군가 방문을 쾅쾅 두드리며 지나갔다. 순간 미레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아빠?”

미레아는 부리나케 일어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아빠!”

미레아의 부름에 계단을 내려가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레아를 보고 밝게 웃었다.

“오늘은 웬일로 바로 일어나는구나.”

“진짜 아빠다.”

미레아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과 똑같은 붉은 머리카락에 살짝 나른하게 쳐진 눈매 안에 자리 잡은 선명한 자색 눈동자가 미레아의 모습을 담았다. 케이드는 그런 딸을 보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진짜 아빠지, 가짜도 있어?”

미레아는 달려가서 케이드를 끌어안았다.

“아빠! 보고 싶었어!”

케이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미레아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웬 어리광이야? 나쁜 꿈이라도 꾸었어?”

“응. 엄청 나쁜 꿈 꿨어.”

“괜찮아. 꿈이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미레아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갔다. 부엌에서 각자의 그릇에 계란 프라이를 덜고 있던 레인이 그들을 보고 말했다.

“각자 알아서 숟가락이랑 포크 챙겨.”

“우와, 엄마다.”

미레아가 레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잠이 덜 깼니?”

“아니, 아니야.”

미레아는 어느새 식탁에 앉아 계란 프라이를 포크로 조금씩 잘라 먹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위층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휴레오가 달려 내려왔다.

“휴레오, 아침 먹고 가라.”

케이드가 미레아의 접시에 샐러드를 덜어 주며 말했다. 휴레오는 현관을 나서다 말고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는 생략! 아침 당번인데 까먹고 있었어!”

미레아는 그 광경을 멍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미레아, 괜찮니?”

“응?”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멍한 것 같아? 어디 아파?”

레인의 걱정 어린 말에 미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멀쩡해.”

그리고는 한 번 더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밤에 안 좋은 꿈을 꿔서 그런지 좀 정신이 없어서 그래.”

“너 어제도 늦게 잤지? 일찍 자야 그런 꿈도 안 꾸는 거야.”

“응, 그렇지…….”

“얼른 정신 차리고 학교 갈 준비나 해. 오늘은 수업 끝나고 바로 들어오니?”

“그러지 않을까?”

그러다 미레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돼?”

케이드와 레인이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니?”

“그냥 학교 가기 싫어. 엄마랑 있을래.”

때 아닌 투정에 레인은 조금 기가 막힌단 얼굴로 미레아의 양 뺨을 감쌌다.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우리 딸.”

미레아는 레인의 품으로 파고들며 웅얼거렸다.

“나 아직 어린애야.”

그 말에 케이드와 레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해변으로 소풍하러 갈까?”

“엄마랑 아빠 일 안 나가?”

“엄마, 아빠랑 같이 있고 싶다니, 우리 딸이랑 있어야지.”

그러더니 둘은 샌드위치를 만들고 주스를 바구니에 챙기며 본격적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미레아는 식탁에 앉아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현실인 듯하면서도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의 모습에 미레아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꿈이니까.’

어느 순간엔 깨겠지.

조금 씁쓸한 맛이 입안에 맴도는 것 같았다. 꿈이라 해도 그리웠던 광경이었다. 미레아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꿈을 더 누려 보기로 했다. 미레아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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