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미레아는 호기심에 별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보았다. 보통 영지의 저택과 이런 별장은 가문의 안주인이 관리하게 되어 있다. 가구와 소품 하나하나에 아리스의 어머니인 류은현의 취향과 손길이 닿아 있다는 뜻이었다. 미레아는 직접 만나 보진 않았지만, 류은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다소 소탈하지만 대범한 면도 있고 온화하며 상대방을 세심하게 신경 쓰는 사람일 것이리라.
미레아는 2층 거실의 벽난로 위에 있는 액자들을 보았다. 아리스의 어린 시절 모습과 그의 부모인 대공 부부의 사진이 몇 개 있었다. 그녀는 메르티어스 황제와 마라피네스 대공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진 속 주인공들을 바로 알아보았다.
가장 왼쪽의 사진들을 보며 미레아는 그것이 아리스의 10대 초반 무렵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당시의 아리스는 진과 율비네의 증언대로 상당히 예쁘장한 남자아이였다. 지금과는 제법 대조가 되어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던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한동안 사진이 없었다. 다른 사진들의 외양으로 유추했을 때 사진이 없는 시기는 마라피네스와 메르티어스 형제가 선대 황제에게 대항해 모반을 일으켰던 시기와 일치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난 이후에는 다시 아리스의 16살, 17살 모습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이후의 모습은 어딘지 씁쓸한 눈빛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 당시와 지금의 분위기를 비교하자면 어두운 것을 넘어 초탈한 상태랄까. 자신의 삶 중에서 일부분을 포기한 모습이었다. 그의 나이는 고작 22살이었다. 미레아는 아리스가 벌써 그런 얼굴을 하기엔 아직 이른 나이라고 생각했다.
벽난로 위에는 아리스의 사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모님 사진도 함께 있었다. 마라피네스 대공과 대공비인 류은현의 모습을 보니 아리스는 그 둘의 외형을 딱 절반씩 닮은 것이 눈에 보였다. 마라피네스는 현 황제와 쌍둥이 형제이니 당연하게도 그와 똑같이 생겼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항상 남을 깔보는 것 같은 시선 덕에 오만해 보이는 황제와는 달리 마라피네스는 조금 무뚝뚝해 보였다.
류은현은 마이련 출신답게 긴 흑발에 따듯한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입가엔 보조개가 있었다. 부부 사이가 좋았던 듯 둘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류은현은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미레아는 사진 몇 개를 챙기고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누구, 나랑 아리스 어릴 때 사진 볼 사람?!”
아리스가 말없이 미레아에게 달려들어 그 액자들을 뺏으려 그랬다. 하지만 미레아는 일행 중 가장 재빠른 사람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아리스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약 올렸다.
“하하! 코흘리개 모습 좀 보라지!”
“내놔!”
“왜? 귀여운데?”
“당장 내놔!”
응접실에 있던 사진들은 아리스의 점잖은 모습만 찍힌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얼굴이 홧홧했다. 그렇게 아리스와 추격전을 벌이던 미레아는 바닥에 있는 턱에 발이 걸려 우당탕 넘어졌다. 미레아는 상체만 일으켜서 부닥친 무릎을 손으로 문지르다 바닥에 난 작은 문을 발견하였다. 그 문의 움푹 팬 손잡이 부분에 발이 걸려 넘어졌던 것이었다.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
아리스가 바닥에 널브러진 액자 사진보다 먼저 미레아의 몸을 얼른 일으켜 주었다.
“에구구, 괜찮아.”
미레아는 엉덩이를 털며 자신이 발견한 문을 보며 물었다.
“여기는 뭐야?”
그 문은 평소에는 카펫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리스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그는 뒤늦게 바닥에 난 문의 존재를 깨닫고는 대답했다.
“아, 피난처 겸 지하실이야.”
“우리 아까 여기는 확인 안 했지?”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가 끄덕였다.
“들어가 봐도 돼?”
“별거 없을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며 미레아는 문을 들어 올렸다. 퀴퀴한 냄새가 훅 밀려들어 왔다. 지하실 안은 당연하겠지만 컴컴했다. 미레아는 벽에 걸려 있던 가스등을 빼서 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더듬어 내려갔다. 아리스가 그 뒤를 따르며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주변을 기웃거렸다.
벽을 따라 선반이 있었고 그곳에는 여러 잡기가 보관되어 있었다. 한구석에서 보존식품을 조금 발견했지만 전부 상해 있었다. 5년이나 지났으니 보존식도 한계가 있던 것이었다. 기껏해야 건진 것이라고는 용케 식초가 되지 않고 잘 보존된 술 몇 병이 전부였다. 제법 질 좋은 술이었지만 아리스는 과연 다른 사람들이 이 술을 마시게 허락해 줄지 의문이었다.
미레아는 가스등으로 이곳저곳 비춰 보며 살피다 담요를 밟았다. 담요 밑에 무언가가 있는지 불룩 솟아 있었다. 별생각 없이 담요를 휙 들쳐 본 미레아는 안에 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그러면서 전력으로 뒷걸음질 치다 뒤에 있던 선반에 등을 박았다. 아리스는 검을 빼 들려다 미레아가 본 것을 보고 다시 손을 거두었다. 담요 밑에 있던 것은 비쩍 마른 미라였다. 그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기껏해야 사람 시체잖아.”
시체 정도는 익숙하지 않느냐는 태도에 미레아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항변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는 것과 갑자기 튀어나오는 건 천지 차이거든?”
그때, 위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나더니 사람들이 몰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괜찮습니까?”
시오와 파울로가 각자 무기를 빼 들고 들어왔고 쿤둘렌은 언제든지 마법을 쓸 준비를 하며 들어왔다. 미레아의 비명을 듣고 마수라도 나왔나 하고 달려온 것이었다.
“괘, 괜찮아요. 그냥 제가 미라를 보고 놀라서 그랬어요.”
미레아는 머쓱해졌다.
“귀신이라도 나왔나 했더니 미라?”
시오가 미간을 찡그리며 안을 들여다보다 미라를 보고 어깨를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별일 아니라는 소리에 일행들은 긴장을 풀고 뒤늦게 지하실을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이런 곳이 있었군요.”
“아까 집 안을 살필 때 누락돼서 탐색하고 있었어요.”
아리스는 미라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죽은 뒤 미라가 되면서 완전히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어쩐지 얼굴이 익숙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별장을 관리하던 고용인이었다.
“5년 전에 이 안으로 대피했지만 나오지 못하고 잘못됐나 봐.”
아리스는 다시 담요로 미라를 덮어 주었다.
“날이 밝으면 제대로 묻어 주든지 해야겠어요.”
“사인이 무엇일까요?”
미레아의 질문에 파울로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아사 아닐까.”
“그런데 이 안에 보존식품이 제법 남아 있어요.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굶어 죽었지요?”
그 말에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이상한데? 몇 달은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보존식품이 상해 있었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장염에 걸렸거나 다른 감염이 일어나서 잘못되었다거나…….”
시오의 말은 일리가 있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안에 트럭을 수리할 만한 것들이 제법 있어서 다행이에요. 휘발유도 있고, 예비 부품들이 제법 남아 있네요. 내일 꺼내 쓰면 될 것 같아요. 남아 있던 보존식품은 못 먹겠지만 당장 식량이 급한 건 아니니까요.”
미레아는 구석에 있던 술 몇 병을 꺼내서 파울로에게 물었다.
“그래도 이건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뒷말은 흐렸지만, 파울로와 시오의 눈에 일순간 탐욕이 스쳐 지나갔다. 대공가의 별장에서 보관하고 있던 술이라면 질이 좋을뿐더러 고급 브랜드일 게 뻔했다.
“맛만 보는 건 문제없지 않을까요?”
시오의 말에 쿤둘렌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아직 암흑 지대의 오염 지역 근처였고 마을도 아닌데 술이나 마시면서 마냥 놀고 있을 정도로 태평한 상황은 아니었다. 쿤둘렌의 눈빛에 시오는 쭈그러들었다.
“하지만 술병 한둘쯤 늘어난다고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니 좀 챙겨 가는 것쯤이야…….”
파울로가 슬그머니 술병을 양 옆구리에 하나씩 꼈다. 그리고는 예의상 아리스에게 물어는 보았다.
“그래도 되지? 술 주인?”
아리스는 손을 휘적거리며 마음대로 하라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미라를 남겨 두고 지하실을 나오자니 좀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일라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질겁을 하면서 밤에 잠을 못 잘 것 같았기에 그들은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는 함구하기로 했다. 누가 바닥 밑에 시체를 두고 자고 싶겠는가.
그들은 지하실을 나와 다시 문고리를 잘 걸어 잠근 다음에 다른 일행에게 되돌아갔다.
“무슨 일이었어요?”
응접실에 모여 있던 다른 사람들의 물음에 미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고 나 혼자 놀란 거예요. 그보다 지하실 아래에 트럭의 예비 부품으로 쓸 만한 것들이 있었어요. 휘발유도 있었고.”
“앗, 그건 희소식이네. 내일 아침에 작업하면 되겠다.”
라일라가 반색했다.
“그것 말고도 술을 발견했는데…….”
시오의 말에 진의 눈에도 파울로처럼 탐욕 어린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파울로가 가져온 술병을 보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지금 사람이 몇인데…… 겨우 두 병이면 한 모금씩 먹으면 다 마시겠다.”
“밑에 더 있긴 한데 우리가 술이나 마시러 나온 게 아니잖아, 누나.”
아리스가 타박하자 진이 술맛을 모르는 놈은 재미없다며 양손으로 목덜미를 받쳤다. 하지만 뜻밖에도 파울로 못지않게 애주가인 세피로스가 술병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말했다.
“한 모금 마셔 보고 맛있으면 더 챙겨 가고 아니면 버리고 가지.”
그러면서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던 코르크 마개를 땄다. 술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로운 냄새가 순식간에 응접실을 채웠다.
“와, 향기가 끝내주네.”
진이 코를 벌름거리며 황홀하단 목소리로 감탄했다. 세피로스가 컵에 술을 조금 따라서 마셔 보았다.
“맛있는 걸?”
그리고 먹어 보라는 듯 파울로에게 잔을 건넸다. 파울로 역시 한 모금 들이켜더니 눈이 번뜩였다.
“이거 아래에 더 있던데 다 가져가도 되나?”
“파울로, 정신 차려요.”
미레아가 한심하단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파울로가 내민 잔의 내용물을 마셔 보고는 말을 바꿨다.
“보존 마법 걸어서 다 가져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