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08화 (108/257)

108화.

제11장 속에 품고 있는 것

클라인의 북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일전에 루아드 제국으로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열차를 이용할 수 없었다. 트럭을 숨기는 것은 둘째 치고 마수가 많이 나오는 지역은 열차의 선로가 끊기거나 운행을 중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트럭을 타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황제의 추격자들을 따돌리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앞서 세피로스가 말한 대로 정화 작업은 하지 않고 클라인에 도착할 때까지 3일 밤낮을 줄곧 달리기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비좁은 트럭 안에서 고작 며칠 버티는 것도 고역인 미레아였는데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참을성과는 별개로 원래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은 답답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이제는 대화 주제가 거의 떨어져 버려서 침묵의 시간이 종종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미레아는 일전에 했던 대로 점심을 먹고 출발하는 트럭 지붕에 자리를 마련하고 대자로 누워서 해나 보고 있었다. 지금 지나는 구역은 오염 지역이나 부식 지역이 아니라 너른 들판에 들풀과 나무들이 싱그럽게 살랑거리고 있었지만 꽃 노래도 삼세번이라고 질리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 지루한 것 말고도 홀로 밖으로 나와 있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요즘 자신을 대하는 아리스의 태도가 이상했다. 잘해 주다가도 갑자기 거리를 두질 않나, 그러면서도 주변을 기웃거리질 않나 뭔가 할 말이 있나 싶어서 말을 걸면 단답식으로 대답했다. 능청스럽게 굴던 사람이 이러니 미레아는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게 있나 싶어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아리스를 오래 본 율비네에게 조심스럽게 그의 현 상태에 관해 묻자 그녀는,

“미레아의 잘못이 아니고 아리스가 등신이라서 그럽니다.”

라며 그 이상은 말해 주지 않았다. 미레아는 율비네와 진이 왜 자꾸 아리스를 등신 취급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탄내가 났다. 미레아는 코를 벌름거리다 냄새의 출처가 트럭 뒤꽁무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운전석의 창문을 두드렸다.

“불이야! 트럭 뒤에서 불이 났다!”

꽤액 소리를 지르자 운전하고 있던 파울로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미레아는 트럭 앞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라일라가 소화기를 들고 나와 진화했다. 불이 크게 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꺼졌다. 하지만 라일라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과부하가 걸려서 메인 동력이 터져 버렸잖아!”

불이 난 곳을 살펴보던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찼다. 설상가상으로 연료통까지 새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일행들은 당분간 발이 묶여 버렸다. 예비 부품은 있었지만, 연료는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라일라라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라일라는 반쯤 울면서 수리할 수 있는 부분 먼저 수리하기 시작했다.

트럭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아리스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팔짱을 낀 상태로 지도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 근처라면 쉬면서 묵을 만한 곳이 있긴 한데…….”

“그런데 마을은 좀 멀지 않나?”

미레아가 불쑥 지도 위에 머리를 내밀자 아리스는 앉은 자세 그대로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까, 깜짝이야!”

“아니, 유령이 나타나도 이것보단 반응이 적겠다.”

미레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아리스를 보았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리스를 미레아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시선을 피했다. 아리스가 어색한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사이 율비네는 아리스가 보고 있던 지도를 보았다.

“아, 그렇군요. 그곳이라면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갈 만하겠습니다.”

“그곳이요?”

미레아의 물음에 율비네가 지도의 한 점을 짚으며 말했다.

“이쯤에 대공가의 별장이 있습니다. 인적 드문 곳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고 결정적으로 황제도 모르는 곳입니다.”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

세피로스의 말에 율비네가 지도의 거리를 가늠하였다.

“차로는 한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 차가 지금 먹통인데…….”

시오가 여전히 검은 연기를 뿜고 있는 트럭을 보며 난처하게 중얼거리자 미레아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전에 했던 대로 세피로스를 타고 가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피로스는 미레아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그게 어찌나 매운지 미레아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맞은 곳을 문질렀다. 세피로스는 그녀를 무시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동력원을 마력으로 전환하면 괜찮을 걸세.”

그러면서 아리스와 쿤둘렌을 불러 땅에 나뭇가지로 술식을 적어 보였다. 그것을 유심히 보던 쿤둘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세피로스 님이십니다. 이 술식이면 마력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겠군요.”

마도 공학으로 자동차나 기차를 움직이려는 시도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거리를 달리려면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필요했다. 그만한 마력을 공급하려면 마법사 몇이 달라붙어야 했다. 그렇다고 마력의 소모를 최소화하자니 그만큼 마석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마차 대용으로 이용하기에는 어느 쪽이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꼴이었다.

열차 사업의 일환은 일반 서민들이 비용적인 부담이 없는 선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만한 운송 수단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기술로는 마도 공학을 이용한 운송 수단이 적자가 나지 않으려면 푯값이 하늘로 치솟아야 했다. 그러니 마도 공학 기술보다는 오로지 과학 기술의 힘만을 이용하여 휘발유나 석탄을 연료로 이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효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마침 마도 공학자도 있었고 마법사가 셋이나 되었다. 마도 공학을 이용한 기술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라일라는 어설프게나마 임시로 움직일 수 있는 동력원을 휘발유에서 마력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그렇다 해도 그것 역시 쉬운 작업은 아닌지라 서너 시간은 걸리는 바람에 일행들은 라일라의 옆에서 간식을 먹으며 빈둥거리거나 잔심부름을 하며 기다렸다.

그렇게 해가 떨어지기 전에 트럭은 굴러는 갈 수 있는 상태까지 회복되었다. 아리스와 율비네의 안내를 따라 주기적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는 트럭을 타고 일행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또 길을 달렸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달려 해가 저물기 직전에야 아리스가 말한 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별장의 뒤에는 너른 언덕이 있었고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별장의 상태를 본 아리스는 머리를 싸맸다.

“허억! 우리 별장!”

별장은 절반 정도가 파손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 근방은 전부 마수 때문에 난리가 났던 지역이니 지금까지 무사할 리 없었다. 게다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 5년이나 지나 있었다. 멀쩡하길 기대한 쪽이 잘못이었다.

1층은 형태를 유지 중인 듯 보였지만 3층은 외벽 한쪽이 뜯겨 있었고 원래는 말을 키우던 마구간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상당히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는 몹시 예뻤던 집이었던 것을 회상하며 아리스는 별장의 상태를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아, 내 방이…….”

아리스는 자신의 방에 난 창문이 산산조각 난 것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비록 본가가 아니고 별장이었지만 아리스가 나름대로 마음에 들어 했던 방이었다. 집 자체도 어머니의 손길이 여기저기 닿은 곳이 많아 절로 애착이 가던 곳이었다.

파울로와 시오가 주변을 살펴 다른 위험 요소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이거, 유령이라도 나오는 거 아니야? 무너지지는 않겠지?”

미레아가 어두컴컴한 내부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쿤둘렌은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이 정도도 감지덕지라며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우리가 묵기엔 괜찮아 보이는걸요.”

아리스는 잠겨 있는 문을 마법으로 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별장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오래 방치된 집 안에서는 곰팡내가 났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대공가의 별장이라고 하기엔 다소 소탈한 면이 있었지만, 한때는 대단히 아름다운 집이었다.

혹시 모를 마수의 출현을 대비해 아리스를 선두로 호위조가 집 안을 살폈다. 거실, 응접실, 부엌, 그리고 남아 있는 2층과 3층 부분까지 수색한 그들은 안전이 확보되자 다른 사람들을 들어오게 했다.

오래 방치된 별장 안의 가구들에는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묵기 위해서는 대충이나마 주변 정리가 필요했다. 그 전에 밤이 되면서 사방이 어두컴컴해졌기 때문에 불을 켜야 했다. 전기는 당연하게 끊겼기 때문에 간단하게 이용할 수 있는 휘발유를 연료로 삼는 오래된 가스등을 켰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딘가가 잘못되었는지 불안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그래도 불이 켜지는 게 어디냐 싶었다.

다행히 부엌은 당장 쓸 수 있을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몇몇이 냄비에 물을 올리고 식자재를 꺼내 와서 간단한 요리를 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먼지를 치우고 어디선가 날아온 건물 잔해들을 정리하며 쉴 공간을 살폈다. 날이 어두워서 밖에서 트럭을 수리하기엔 여러모로 번거로웠기 때문에 손보는 것은 다음날로 미루었다.

대단한 요리를 한 것이 아니라 해도 부엌을 쓸 수 있다는 건 상당히 축복받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며칠 만에 제대로 된 요리를 맛보고 배를 두드리며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아리스는 지붕이 날아간 방을 제외하고 멀쩡한 외관을 유지 중인 방들을 일행들에게 적당히 배분해 주었다. 먼지투성이인 침대를 쓰는 것은 상당히 찝찝했지만 여기저기 삭은 이불을 걷어 내고 그 위에 침낭을 깔자 그럴듯한 잠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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