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07화 (107/257)

107화.

“너 사진 찍는 거 정말 좋아하는구나.”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원래 그렇게까지 좋아한 건 아니었는데…… 전에는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사진기까지 챙겨서 찍는 건 아닌 정도?”

그녀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5년 전부터 미레아는 자신의 주변에 대한 사진을 더 많이 남기지 않은 것을 줄곧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면 나중에 후회를 덜 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 같더라고. 그게 마음에 위안이 되어서…….”

그래서 자신이 찍히는 것보다 누군가나 다른 피사체를 찍는 것을 더 좋아했다. 자신이 추억하길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보다는 주변인과 당시의 분위기였다.

그때 길거리에서 작은 인형극을 하던 사람이 비눗방울을 만들어 내었다. 철사를 꼬아 만든 원들을 한 줄로 나란히 엮은 뒤 그것을 비눗물에 흠뻑 담갔다가 휙 휘두르자 수많은 비눗방울이 한 번에 만들어졌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광장에는 비눗방울들로 가득 찼다.

“나 저거 배경으로 찍어 줘.”

“흠…….”

아리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바로 셔터를 누르지 않고 비눗방울을 바라보다 미레아에게 손짓을 했다. 미레아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자 아리스는 손에서 푸른빛으로 된 새를 만들어 내었다.

아까 길거리 마법사보다 더 대단한 걸 할 수 있다 자랑처럼 말하더니 정말 대단하긴 했다. 뱁새처럼 생긴 주먹보다 작은 새를 보며 미레아가 작게 감탄했다.

아리스는 한 마리로는 부족하다 여겼는지 몇 마리를 더 만들어 내었다. 그것들은 진짜 새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레아의 손에서 팔로 총총거리며 돌아다녔다. 미레아가 연신 와아거리는 소리를 내며 팔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어느새 양팔 가득 새들로 가득 찬 미레아는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는 빨리 사진을 찍으라며 아리스에게 턱짓을 했다.

“별거 아닌데…….”

아리스는 셔터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튕기자 새들이 일제히 날아가더니 빛으로 이루어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미레아는 내심 아쉬운 얼굴이었다.

아리스의 입에서 나중에 또 보여 주겠단 말이 나오기 전에 둘은 파울로를 꼬리처럼 달고 다니는 시오와 라일라와 마주쳤다. 그들도 소원을 빌러 왔는지 손에 꽃과 초를 들고 있었다.

“시오!”

아리스가 돌연 시오에게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미친 듯이 반가워!”

“너야말로 미쳤냐?! 징그럽게 왜 이래!”

시오가 질색팔색하며 아리스를 떼어 놓았다. 아리스는 드디어 자신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둔하면서 자신의 관심사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있게 대화를 이끌어 줄 상대를 만난 것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하지만 시오는 라일라와 함께할 수 있었던 둘만의 시간에 파울로가 끼어든 것도 모자라 아리스까지 들러붙자 조금 불만스러워 보였다.

먼저 소원을 빈 둘은 시오, 라일라, 파울로가 소원을 빌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셋이 돌아 나오자 아리스는 잽싸게 시오에게 다가갔다.

“우리 불꽃놀이 볼까? 저쪽이 잘 보일 것 같아.”

시오가 자신을 떼어 내지 못하게 축제에 관해 이것저것 정보를 주며 같이 다닐 빌미를 만들었다. 시오가 솔깃한 얼굴로 물었다.

“불꽃놀이도 해?”

“당연하지. 그리고 보통 이런 축제에서는 사탕 과자도 파는데 그것도 먹어 봤어?”

아리스가 시오를 이끌고 여기저기 기웃거리자 미레아가 파울로에게 말했다.

“쟤 제법 신나 보인다. 생각보다 노는 게 재미있었나 봐.”

“둘이 뭐 했어?”

“춤도 추고 뭣 좀 마시다가 소원 빈 게 다야.”

“아하, 춤을 추셨다?”

파울로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미레아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왜? 나 춤 잘 춰.”

파울로가 어련하시겠냐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자 미레아가 울컥하여 파울로의 옆구리를 퍽 때렸다. 그러다 미레아는 라일라의 눈치를 보다가 파울로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혹시 라일라와 시오랑 뭐 하면서 돌아다녔어?”

“그냥 다른 일행들을 놓쳐서 찾을 겸 둘러보고 있었어.”

파울로가 무덤덤한 얼굴로 그렇게 답하자 미레아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걱정했던 방향으로는 별일 없었던 것 같았다.

“우리도 다른 일행들이랑 떨어져서 말이지. 그런데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도 재미있지만, 각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돌아다니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아.”

“그것도 그래. 서로 좋아하는 게 다르니까.”

그때 누군가가 건물 위에서 작은 사탕을 뿌렸다. 겨우 손톱만 한 크기라 머리에 떨어져도 아프지도 않았지만 아리스가 갑자기 미레아와 라일라에게 외쳤다.

“받아! 치마로 받아!”

그 말에 둘은 무심코 치마를 펼쳐 사탕을 받았다. 치마 위에 색을 입힌 기름종이로 포장된 작은 사탕들이 굴러다녔다.

“저렇게 기습적으로 사탕을 뿌리면 밑에 있던 여자들이 치마로 사탕을 받는 게 풍습이야. 사탕을 받은 개수만큼 복이 들어오는 거야.”

아리스의 설명을 들으며 그들은 사탕을 하나씩 까서 입에 넣고 굴렸다. 남은 사탕들은 서로의 주머니가 터질 정도로 한가득씩 쑤셔 넣었다.

그들은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전망이 좋은 곳을 찾아 헤맸지만, 명당자리는 이미 만석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헤어졌던 다른 일행들도 만나게 되었다. 그들과 합류할 때쯤 됐을 땐 아리스도 많이 진정된 터라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아리스가 미레아와 앉아서 냉수를 마시고 있던 시간대에 이미 소원을 빌고 왔다고 했다.

“에이, 불꽃놀이가 있다는 걸 진작 알았으면 자리 먼저 잡는 거였는데.”

진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율비네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군요.”

“아냐, 아냐. 그냥 그렇다는 거지 좋은 자리에서 못 봐도 어쩔 수 없지. 이런 곳에서도 보이기는 할 거 아니야.”

그들은 적당한 언덕배기에 앉았다. 불꽃놀이를 보기 썩 좋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앉아서 쉬기엔 적당한 곳이었던 지라 이마저도 다른 사람들과 눈치싸움을 해야 했다.

“야호, 맥주! 맥주!”

파울로와 미레아가 다른 일행들의 몫까지 맥주를 사 들고 돌아왔다. 일행들은 각자 맥주병을 챙겨가서 자리에 앉았다.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신나게 놀아서 그런지 다들 체력이 고갈되어 말없이 맥주를 목으로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저 멀리서 파공음과 함께 펑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앗, 시작됐다.”

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에 앉아서 불꽃놀이를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기 시작하자 시야가 가려 일행들은 계속 앉아 있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했다.

작은 불꽃은 효시의 역할이었다.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나더니 여러 색깔의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커다란 불꽃이 하늘을 가득 메우는가 하면 자잘한 크기의 불꽃이 여러 군데에서 터지기도 했다. 그 광경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맥주를 마시며 안주 삼아 보기에 적절했다.

아리스는 힐끔 미레아를 돌아보았다. 앞사람 머리를 피해 까치발을 살짝 들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발끝부터 시작된 간지럼이 목구멍 위까지 올라왔다. 마음 같아서는 번쩍 안아 올려 사람들의 머리가 턱 아래로 보이도록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뻔해서 참았다.

축제의 끝을 마감하는 불꽃놀이가 아쉽게도 끝나자 시내를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또 인산인해였다. 일행들은 저마다 사람들에게 밀쳐져 또 뿔뿔이 흩어지려는데 미레아가 아리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겨우 옷자락일 뿐인데 아리스는 손이라도 잡은 것처럼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미레아는 반대편 손으로는 파울로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아리스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느껴서 옷자락을 붙잡은 게 아니라 떠밀리지 않게 일행 중 눈앞에 있는 덩치 큰 사람들을 붙잡은 것뿐이었다.

“자, 이리 와.”

파울로가 미레아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쑥쑥 길을 터주었다. 저 둘의 관계가 말 그대로 삼촌과 조카, 혹은 오빠와 동생 그 이상의 것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과 율비네처럼 말이다. 하지만 파울로와 미레아가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게 아리스는 어쩐지 질투 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복잡미묘했다.

파울로 덕에 아리스와 나란히 걷게 된 미레아는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오늘 재미있었지?”

“응.”

그 말이 뭐가 좋은지 미레아가 윗눈썹 끝이 내려갔다.

“다행이다.”

“뭐가?”

“네가 억지로 따라나서서 귀찮았을까 봐 조금 걱정되었거든.”

“즐거웠어. 아무 생각 없이 축제를 즐긴 건 처음이라.”

“다음에 또 이렇게 놀자.”

미레아는 자신에게 자꾸만 미래를 기약한다. 그게 빈말이라 해도 싫지 않았지만 저런 말을 들으면 자꾸 기대라는 걸 하게 된다. 아리스는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미래에 올 즐거움에 대해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오늘은 사르파니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실 테니 이 정도 기쁨은 미리 누려도 될 것 같았다. 아리스는 지금 이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레아를 내려다보면서 슬쩍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소원을 잘못 빈 것 같았다. 웃기지도 않은 ‘가내 화평’보다 더 좋은 소원이 있었을 텐데 왜 그것을 지금까지 몰랐을까. 소원은 거창한 게 아니어도 되는 것이었다. 그저, 다음에도 이런 즐거운 시간을 가질 기회가 오길.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 올 소소한 날들에 행복이 깃들길. 이런 사소한 것이어도 충분했을 터였다.

아리스는 달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이런 즐거움을 한 번으로 끝내지 말아 주십사 간청 드렸다. 사르파니께서 자신을 변덕쟁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신에게 소원을 비는 짓은 하지 않지만, 오늘은 신기하게도 그게 위안이 되었다.

커다란 보름달이 그들을 굽어살피듯 환한 빛을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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