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06화 (106/257)

106화.

둘은 음료를 받은 후 포차 앞에 마련된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미레아가 빨대로 자신의 레모네이드를 쪽쪽 파는 사이 아리스는 얼음이 동동 뜬 냉수를 한 번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긴 머리가 등에 달라붙으니 더 더운 것 같아서 얼른 하나로 묶었다. 머리가 좀 차가워지자 아리스는 그제야 생각이 좀 돌아가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아리스는 자신의 현 상태를 그렇게 정의 내렸다.

정말로 큰일 났다.

아리스는 초조함에 다리를 달달 떨었다. 그것을 보고 미레아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 나갔다. 그러고는 자신의 양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미레아가 자신을 이상하게 보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리스는 조금 전에 한순간. 정말로 한순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을 다시 떠올리자 어딘가에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미레아의 핀이 떨어질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그것이 치맛자락과 함께 나부끼면서, 눈매가 부드럽게 휘면서 하얀 이가 살짝 보이게 미소 짓던 그 얼굴이,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예뻐 보여서…… 정말로 예뻐 보여서 일순간 미레아에게 입이라도 맞추고 싶단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았다.

내가 미레아 제인스터를 좋아하나 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리스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시오를 흉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미친 거 아니야? 쟤를? 내가? 왜?

아니다. 미레아는 예쁘니까 예쁜 애를 좋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럴 수 있었다. 미레아를 좋아할 만한 이유는 수많았다.

미레아는 예쁘고, 머리도 좋고, 검술 천재였으며, 성격도 밝고, 보고 있으면 옆 사람마저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고…….

하지만 미레아의 장점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시점에서 그런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리스는 알지 못했다. 아리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이성적으로 좋아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 생경한 감정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이런 마음이었던 것일까. 아리스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더듬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한 달 전? 두 달 전?

그러다 다시 충격을 받았다. 아리스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 비슷한 감정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있었다. 그런 주제에 호감의 감정을 넘어 애정의 정도가 어느 정도 치솟고 입 맞추고 싶다는 단계까지 와서야 겨우 눈치챈 것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첫눈에 반했다고?

아리스는 다시 부정했다. 그때는 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감정이었고, 그 이후 사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고, 미레아의 집에 얹혀살면서도 지금처럼 강렬한 감정은 못 느꼈으니 처음부터 불타는 사랑은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얼마 전에 보였던 그 약한 모습이 신경 쓰여서…… 어떤 짐을 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어서…… 붉었던 눈가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어서…… 그때 잠시 나누었던 온기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따듯해서…….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스는 레모네이드를 절반 정도 마시고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것을 구경 중인 미레아를 슬쩍 곁눈질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미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리스를 마주 보았다. 핀으로 대충 틀어 올려 삐져나온 잔머리가 살랑거렸다.

미친, 귀여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생각이 한번 그쪽으로 튀었더니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입을 맞추고 싶고, 끌어안아 보고 싶고,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고, 살 내음을 맡아 보고 싶었다.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을 간신히 멈춘 아리스는 본인에게 발길질할 수 있으면 골백번도 더 했을 것이다.

침착하자, 아리스 클라인셔드. 어려울 것 없었다. 지금까지 대했던 것처럼 대하면 된다. 조금 전 미레아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시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분위기 이상해진단 말이야!’

옳은 말이었다. 아리스는 자신이 그런 이상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리스가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데 미레아가 갑자기 불쑥 상체를 기울여 몸을 붙였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그 기습적인 움직임에 아리스는 들고 있던 컵을 놓칠 뻔했다.

“너 얼굴이 빨갛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 밑으로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는 레모네이드 컵을 놓고 자신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말하는 붉은 입술이 너무나도 탐스러워 보였다. 아리스는 얼른 시선을 거두고 미레아의 손을 피해 몸을 물렸다. 지금 일행들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자신을 어릴 적부터 봐 온 진이나 율비네라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둘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리스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원 빌러 안 갈래?”

“소원?”

“시내 광장에 있는 꽃으로 만든 탑 아래에 초를 켜고 소원을 적은 종이를 태우면 소원이 이루어지거든.”

그 말에 미레아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좋아.”

미레아는 레모네이드를 다 마시고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가자.”

“아니!”

아리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와서 깜짝 놀랐다. 미레아 역시 조금 놀란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너무 몰려서 전부 같이 다니면 불편해. 우리 둘이서만 다녀오자. 다른 사람들은 율비네가 있으니까 알아서 놀 거야.”

구구절절 변명을 덧붙이자 미레아는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수상한 얼굴로 물었다.

“너는 신을 그다지 믿지 않지 않아?”

“응?”

“신이 소원 따위를 들어준다는 걸 네가 믿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말에 아리스는 정곡을 찔렸다. 서리 교단의 성기사들과 한판 붙고, 신녀를 인질로 잡고, 서리 여신의 신전을 폭발시키겠다고 난리 친 것이 고작 석 달 전이었다.

꼭 서리 여신이 아니라 해도 아리스는 다른 신들 역시 믿지 않았다. 서리 여신도 못 하는 걸 사르파니가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그런 가치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기분 내기지, 기분 내기.”

그러면서 일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앞서 걸었다.

“빌고 싶은 소원이라도 있어?”

미레아가 뒤따라오며 한 질문에 아리스는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시오처럼 ‘누구누구랑 잘되게 해 주세요.’ 따위의 소원을 빌 생각은 없었다. 만약 시간을 조금 되감아서 몇 시간 전에 그런 질문을 똑같이 들었다면 그가 했을 답은 하나였다.

세상이 기왕 망할 거면 내일 망하게 해 주세요.

아마 사람들은 기함하겠지만 아리스는 제법 진심이었다. 사는 게 재미있는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은 자신에게 비난만 하고, 어차피 세계는 망한다는 서리 여신의 말도 있었고, 그렇다면 세상이 내일 망해도 상관이 없었다.

나만 엿 될 순 없지. 다 같이 엿 돼 보자.

그는 다소 물귀신스러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을 되돌아보니 다 같이 떠들썩하게 웃고 떠들며 쇼핑하는 것도 제법 즐거웠고, 함께 찍은 사진이 어떻게 현상될지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레아가 예뻤고, 예뻤고, 예뻤고…….

그만 생각하자.

아무튼, 그런 것들을 조금 더 누릴 수 있으면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계속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미레아의 집 정원이 다음 계절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것을 기다린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소원은 그렇게 막 말하는 거 아니야.”

아리스는 그렇게 둘러대었다. 광장에는 소원을 빌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아리스의 말대로 우르르 몰려다니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사르파니의 사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소원을 적을 색종이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둘은 각자 하나씩 받아 펜을 빌려 건물 벽에 대고 소원을 적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상당히 머뭇거리면서 적어 나가는 데 반해 미레아는 엄청난 기세로 장문의 소원을 종이에 빽빽할 정도로 적고 있었다. 아리스가 슬쩍 보려고 하자 미레아는 얼른 손으로 가렸다.

“소원은 막 말하는 거 아니라면서?”

그러더니 종이의 뒷면에까지 소원을 적어 내려갔다.

“욕심쟁이라고 사르파니께서 질려 하실 것 같은데…….”

“나도 다 이루어지는 건 기대 안 해. 개중에 가능한 몇 가지는 들어주시겠지.”

아리스는 겨우 ‘가내 화평’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아리스에게 여러 의미가 담긴 글귀라 미레아가 보면 비웃을까 봐 두 번 접었다. 마침내 미레아가 소원을 다 적자 그들은 꽃으로 장식된 탑으로 다가갔다. 탑의 옆에는 큰 화로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 소원을 적은 종이를 넣어 태웠다.

사르파니에게 드리는 공물이라 그래 봤자 사람들은 대부분 꽃이나 돈을 바쳤다. 가끔 다른 것들이 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구하기 손쉬우면서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미레아는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어린아이에게 아리스의 몫까지 꽃과 초를 샀다. 둘은 이미 많은 사람이 놓고 간 초들 옆에 나란히 초를 켜고 그 앞에는 꽃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미레아는 화로 안에 종이를 넣기 전, 소원 종이를 손바닥 사이에 끼고 양손을 모았다.

“선택지를 많이 드렸으니 편하신 대로 골라 주세요!”

화로에 종이를 던져 넣자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 재가 하늘로 올라가 사르파니께 종이에 적힌 염원이 닿는다고 믿고 있었다. 미레아는 사진기로 자신과 아리스가 놓은 초와 꽃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아리스와 나란히 서서 꽃으로 된 탑을 배경으로도 한 장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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