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어째 이유가 참 유치하다.”
파울로가 옆에서 웃었다.
“그 말대로 어릴 적 사진 보면 아리스가 웬만한 여자애보다 예쁘긴 했었지. 키도 별로 안 컸고.”
미레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말을 흘리자 아리스가 정색하며 물었다.
“내 어릴 적 사진은 어떻게 본 거지? 15살 이전의 내 사진은 대중에 공개된 적 없을 텐데……?”
그 말에 미레아는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눈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아니…… 그게…… 다 보는 방법이 있어서…….”
“좋은 말로 할 때 이실직고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니까 세피로스가 보여 줬는데…….”
“그 용은 남의 개인 신상을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막 뿌리고 다니냐?”
아리스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미레아를 흘겨보자 미레아는 진의 뒤로 숨었다.
“내가 머리 예쁘게 다듬어 주었잖아! 그 대신 그런 건 그냥 넘겨!”
“내가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알았냐니까?”
미레아는 아리스에게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고는 길을 따라 도망갔다. 라일라는 새로 산 치마가 마음에 쏙 들었는지 연신 내려다보면서 아깝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우리 이 옷 정말 오늘 같은 날 이외에는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오늘 같은 날이니까 입는 거야.”
어느새 아리스를 뿌리치고 라일라의 옆으로 온 미레아가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치마 끝을 잡고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마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것처럼 치맛자락이 붕 떴다 내려앉으면서 하얀 다리를 휘감았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오늘을 즐겨야지. 모처럼의 축제인걸! 인생은 해학과 재치라고!”
그러더니 어린애처럼 촐랑촐랑 뛰었다. 공단이 부드러운 주름을 만들어 내면서 빛났다. 미레아의 말에 라일라는 전투부 사람들은 임무에 나가기 전 유서를 쓴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자신 역시 이번 임무에 동행하기 전에 파울로가 혹시 모르니 유서를 작성해 두는 게 어떠냐는 말을 최대한 에둘러 제안한 적이 있었다.
라일라는 자신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 시오에게 말했다.
“시오. 나, 이거 기회가 될 때마다 입을게.”
“음? 그래. 예쁘니까 두고두고 입어.”
라일라가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시오는 그저 헤벌쭉 웃었다. 라일라가 마주 보며 웃으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자!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석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미레아가 적당히 경치가 좋은 곳에 사진기의 삼각대를 설치하며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자동으로 맞춰 놓은 사진기의 셔터가 울리길 기다렸다. 플래시가 팡 터지자 시오가 자신의 눈을 손으로 가리고 한탄했다.
“아, 나 플래시 때문에 눈 감았어!”
“선배, 이거 3장 연달아 찍히는 설정이니까 빨리 표정 관리해!”
사진 하나 찍는 것도 요란스러웠다. 전원이 만족할 때까지 사진을 찍은 후에야 그들은 시내 중심부로 행했다.
“어때? 내가 사진기 가져오길 잘했지?”
“너의 선견지명에 건배를.”
“그런 표현은 또 어디서 배웠어?”
진이 어눌한 루아드어로 한 말에 아리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해가 저무는 하늘은 주홍색, 분홍색, 보라색, 남색이 뒤섞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이미 어느 정도 떠오른 커다란 보름달이 별들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일행들은 그 광경을 보며 걸었다.
시오가 아리스의 옆으로 와서 그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더니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보통 이런 축제에는 그런 거 있지 않냐?”
“뭐 말이야?”
“그러니까…… 축제 날 사르파니에게 기도하면 연인들이 이루어진다거나…….”
“없어.”
뒤는 더 들을 필요도 없어서 중간에 말을 잘라먹은 아리스의 단호한 대답에 시오가 대번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무언가 소원이 있다면 들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 말에 시오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초를 켠 다음 공물을 바치고 소원을 적은 종이를 화로에 태우면 돼. 진실한 마음으로 기원한다면 사르파니께서 소원을 이루어 주실 거야.”
“공물은 뭐가 좋을까?”
시오는 황소라도 한 마리 잡을 기세였다.
“미신이잖아. 뭘 그렇게까지 요란인데.”
“네가 그사이 잊은 모양인데 우리 얼마 전에 알툰을 만나지 않았냐?”
“그건 진짜 알툰도 아니고 부식 지역 안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이었잖아.”
아리스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석하게도 이 땅에 신들은 저마다 은신처로 숨어든 지 오래야. 세상 돌아가는 꼴 좀 봐. 나오고 싶겠어?”
냉소적으로 웃는 아리스에게 시오가 혀를 끌끌 찼다.
“젊은 나이에 벌써 이러면 안 될 텐데.”
“둘이 무슨 대화를 그렇게 심각하게 해?”
라일라의 물음에 시오가 아리스의 곁에서 후다닥 떨어졌다.
“호위를 자처하고 나섰으면 제대로 하란 말이다.”
미레아가 한마디하고 지나갔다. 그 뒤를 따르던 파울로가 돌연 양팔로 시오와 아리스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웃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희…… 기분 전환 삼아서 즐기는 건 좋은데 임무에 지장 갈 정도로 정신 못 차리고 분위기 망치면, 알지?”
아리스는 왜 자신이 시오와 동급으로 싸잡혔는지 모르겠지만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졌다. 길거리에는 여러 등이 걸려 있었고 불이 알록달록 들어와 대낮보다 더 환하게 길을 밝혔다. 축제를 즐기러 나온 인파들의 수는 낮보다 더 늘어났다. 여기저기서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와 음악 소리가 들렸고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웃는 소리도 들렸다.
“이것 봐. 이거 예쁘지 않아?”
진이 여러 가지 장신구를 팔고 있는 좌판에 멈춰서서 구경했다. 그 바람에 다른 일행들도 그 주변으로 멈춰 섰다.
“사려고요?”
라일라의 말에 진이 팔짱을 끼고 자신의 눈에 들어온 목걸이를 응시했다.
“음……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장신구를 거의 하지 않아서 말이지…….”
“장신구를 했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요.”
“장신구를 했다고 큰일 나는 일이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라일라의 질문에 미레아와 율비네, 진이 번갈아 가면서 무서운 소리를 해 댔다.
“큰일 날 수 있지. 가령 적이 목걸이로 목을 조른다거나.”
“움직일 때 귀걸이가 잘못 걸려 귓불이 찢어지기도 하지요.”
“아, 나는 그런 경우도 들어 봤어! 팔찌를 차고 톱니 장치를 다루다 팔찌가 빨려 들어가면서 손까지 우두둑……!”
라일라가 비위 상한 얼굴을 했다. 이 일행들이랑 다니면서 이런 일에 하나하나 비위 상해 봤자 자신만 손해였지만 그래도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장신구를 살 땐 항상 고민이란 말이지…… 나는 원래 장신구를 하는 걸 좋아하는 지라 오늘처럼 일이 없는 날에는 장신구를 이것저것 걸치고 다니지만 그래도 서랍에 처박혀 있는 시간이 더 길면 슬프잖아.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진이 좌판 앞에서 오래 고민하자 상인이 그래도 예쁘지 않냐, 이 가격이면 거저 주는 거다 하면서 열심히 흥정하기 시작했다. 파울로 역시 자신의 아내에게 뭐라도 하나 선물할 생각으로 진의 옆자리에서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미레아를 톡톡 쳤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장신구를 구경하러 왔는지 살 마음이 없어 보이는 미레아에게 괜찮다면 비켜 줄 수 없는지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율비네, 리비엘로와 미레아가 슬쩍 몸을 틀어 공간을 만들어 주자 그 사이로 사람 한 무더기가 우르르 들어왔다.
어어 하는 틈에 사람들에게 떠밀린 셋은 일행과 멀어졌다. 그들은 다른 일행들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사람들 틈바구니를 요리조리 다니는 요령이 좋은 율비네나 미레아와는 달리 리비엘로는 둔했다.
“에휴, 됐다. 어차피 돌아갈 숙소는 뻔한데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오겠지. 우리끼리 다니지 뭐.”
미레아는 오가는 사람이 적은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호위해 준다더니 영 쓸모가 없습니다.”
율비네가 바로 옆 포차에서 닭고기와 채소를 번갈아 꿴 꼬치구이를 사서 미레아와 리비엘로에게 건넸다. 셋은 계단에 앉아서 그걸 냠냠 뜯어 먹었다. 그때 세 명의 남자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거기 아가씨들, 혹시 다른 일행 없어?”
“우리도 셋인데 어때? 같이 놀지 않을래?”
미레아는 어쩜 저렇게 틀에 박힌 대사를 하며 접근하나 감탄하고 있는데 율비네가 눈을 치켜뜨며 한마디 했다.
“꺼지세요.”
그 기세가 워낙에 매서워서 남자들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상황이 너무 식상하다. 그치?”
“하여튼, 남자 놈들은 도움이 안 됩니다.”
미레아와 리비엘로가 깔깔 웃자 율비네가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서 꼬치를 마저 뜯었다.
“정말로 식상한 상황이었으면 시오와 라일라가 일행과 떨어졌겠지.”
리비엘로의 말에 미레아가 폭소했다. 하지만 금방 웃음을 멈추고는 심각하게 말했다.
“제발 선배가 분위기에 휩쓸려서 고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일라 씨도 마음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요?”
“지금은 여러모로 상황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일단 임무에서 복귀한 다음에 고백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시오도 바보는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아냐, 시오 선배는 라일라 일이라면 바보가 될 수도 있단 말이야.”
미레아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사람들의 함성에 고개를 들어 보았다.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가짜 나비들을 만들어 하늘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아리스와 함께 있으면 저것보다 대단한 것도 많이 보지만 이런 것도 좋네요.”
율비네가 꼬치구이를 씹는 것도 잊고 공연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 말에 미레아가 문 듯 물었다.
“율비네는 아리스를 좋아하나요?”
율비네가 그 말의 저의를 모르겠단 얼굴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좋아는 하죠?”
그 대답에 미레아는 약간 머쓱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런 쪽이 아니고…… 이성적인 감정이 있냐고 물어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