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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103화 (103/257)

103화.

다른 사람들은 화려한 자수 복장에 눈이 돌아가서 이것저것 매만지고 있는데 아리스와 율비네는 시큰둥했다. 그 둘은 매번 보던 옷이었기 때문에 흥미가 돋지 않았다. 이 가게 저 가게를 전전하며 옷을 고르던 일행들은 슬슬 아리스가 지치려고 할 때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다. 미레아는 옷 한 벌을 골라 들고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있었다.

“예쁜데 비싸.”

옆에서 리비엘로가 함께 품평해 주었다.

“비단에 자수까지 놨는데 저렴할 리가 없지. 그래도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긴 하다.”

“음…….”

“하지만 그걸 사면 몇 번이나 입을 것 같아?”

“으음…….”

그때 탈의실에서 자신이 고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라일라가 거울을 보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았다. 흰 치마에는 라일라의 분홍색 머리 색과 비슷한 연분홍색의 천으로 감았고 보라색 도라지 꽃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어때?”

라일라의 물음에 미레아와 시오가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다.

“예뻐.”

“예뻐!”

라일라가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에 미레아는 마음에 동요가 생겨 자신이 고른 옷을 지긋이 응시했다.

“일단 입어만 본다.”

미레아는 비장한 심정으로 옷을 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아리스가 심드렁한 얼굴로 보며 말했다.

“설마 사지도 않을 거면서 이 많은 옷가게를 돌아다닌 거야?”

“그러니까 사야겠지?”

라일라는 자신의 지갑을 꺼내 열어 보고는 들어 있는 돈의 액수를 세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나 싶어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옆에서 시오가 점원에게 옷값을 치르고 있었다. 라일라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시오가 왜 내 옷값을 내주는 거야? 난 괜찮아. 매일 이것만 입고 다닐 것도 아닌데 굳이 안 사도……!”

“그냥 사 주는 거 아니야. 빌려주는 거야.”

“그래도…….”

라일라는 시오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움 마음이 뒤섞인 얼굴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록산에 돌아가면 이자까지 쳐서 갚을게.”

시오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 꼴에 진이 이번에는 리비엘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혹시 라일라도 아니……?”

“음…….”

리비엘로가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리비엘로가 봤을 때 라일라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즐기면서 모른 척하는 것인지 마음이 없어서 고민 중인 것인지 추측해 보자면 전자라 생각했다.

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라일라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데 미레아가 탈의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이거 어때?”

미레아가 고른 치마는 진녹색 공단 천에 자잘한 흰 꽃과 노란 깃털을 가진 새가 장식된 천을 두르고 있었다. 그것이 미레아의 붉은 머리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우러져 미레아를 위한 맞춤옷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머, 손님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직원의 칭찬에 미레아가 쑥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깎아 주세요.”

“그건 곤란한데…… 요즘 축제 기간이라 옷값이 가장 비쌀 때예요. 그 대신 이건 어때요?”

가게 점원은 미레아에게 큰 집게 핀으로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해 주었다.

“이걸 서비스로 드릴 테니, 자…….”

점원은 손거울로 미레아의 얼굴을 비춰 보였다. 집게 핀은 미레아의 치마에 수놓인 흰 꽃과 비슷한 모양인 조화가 붙어 있었다. 머리에서 흰 꽃이 소담하게 피어오른 것 같아 미레아는 그게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나 어때? 이거 괜찮아 보여?”

사실 미레아의 질문은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희는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면 된다는 분위기였다.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 전에 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진녹색 공단 천이 눈 색이랑 어우러져서 조합이 잘 어울려. 거기에 공단 천 재질도 상당히 상품이고. 수도 어중이떠중이가 놓은 게 아닌지 실력이 좋아. 봉제선을 보니 움직일 때도 편하겠는걸. 마감 처리도 괜찮고, 머리핀은…… 재질이 썩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싼 티는 안 나고 옷이랑도 어울리니까 괜찮아 보이고. 결론을 말하면, 비싼 만큼 제값을 하는 옷이야. 결정적으로 네게 잘 어울려.”

구체적으로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이고 구매해도 될 만한 합당한 이유까지 붙여 주자 사람들이 아리스의 안목에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손님께서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직원의 감탄에 아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 이래? 나 이래 봬도…….”

거기까지 말한 아리스는 직원이 있단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지만, 사람들은 뒤늦게 그가 대공자 출신이란 것을 상기했다. 지금까지 좋은 옷들을 입고 자랐을 테니 그만큼 옷을 보는 안목도 절로 높아져 옷을 고를 때 어떤 부분을 봐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있었다.

“어쨌든 예쁘니까…… 사고 싶으면 사.”

아리스가 저도 모르게 목 뒤쪽을 손으로 주물렀다. 그 모습에 사람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응, 예쁘니까…….”

진은 그 대상이 옷과 미레아 중 어느 쪽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미레아는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리스의 평가에 망설임이 사라진 눈으로 점원에게 물었다.

“얼마죠?”

미레아가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옷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다른 일행들에게 말했다.

“리비랑 율비네도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입어 봐요. 진 언니도.”

그렇지 않아도 율비네는 푸른색 치마를 유심하게 보고 있었다. 괜히 찔끔해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 진이 그 치마를 옷걸이에서 빼 손에 들려 주었다. 리비엘로 역시 사양하고 싶었는데 옆에서 라일라가 양손에 옷을 들고 리비엘로에게 갖다 대 보았다.

“리비엘로 같은 피부색에는 원색이 잘 어울려. 봐봐. 이 금색 천에 보라색 실로 수놓으니까 잘 어울리잖아.”

그사이 진과 율비네는 미레아에게 돈을 빌려 자신의 옷을 한 벌씩 사 입었다. 여자들의 옷을 사고 보니 남자들의 옷이 문제였다. 사실 시오나 아리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같이 다니자니 화사한 여자들과는 달리 분위기가 위화감이 들었다. 애초에 임무 중에 꾸미고 다닐 만한 일이 없어서 편한 옷 위주로 챙겨 왔다.

하지만 시오는 라일라에게 돈을 빌려줘서 자신의 옷을 사는데 큰돈을 쓸 수 없었고 아리스는 애초에 개털이었다. 물론 활동비라는 명목하에 아리스의 앞으로 수당이 지급되긴 하지만 그건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세피로스가 계약 조건으로 내건 대부분 금액은 이번 임무가 끝난 후 받기로 한지라 수중에 돈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이번 임무에서 자신의 돈을 쓸 만한 일도 거의 없어서 불편한 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아리스와 시오는 쇼핑을 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파울로가 손님용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했다.

“사.”

그리고 자신의 지갑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까닥까닥 흔들어 보였다.

“이 형님이 돈이 좀 많아.”

남자들의 옷을 사 주겠다는 파울로의 말에 미레아가 또 과장된 목소리로 감탄했다.

“와! 20대들한테 자칭 형님이라신다! 양심 없다, 30대!”

“야! 미레아 제인스터, 너 말꼬리마다 시비다? 나 32살밖에 안 됐거든! 나이 차 얼마 안 나거든?”

“10살 차이면 삼촌이지요? 형님이 아니라.”

“돈 내는 사람한테는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돈 막 쓴다고 카디 언니한테 일러야지!”

“이건 내 비자금이다! 내 월급이 따박 따박 꽂히는 생활비 통장은 나의! 카디님! 께서 보관 중이시거든?”

미레아가 파울로에게 장난을 거는 사이 시오는 자신의 예산 안에서 제법 괜찮은 옷을 골라 입었다. 미레아는 파울로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아리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던 날과 마찬가지로 멀끔한 옷을 입혀 보았다. 말했던 대로 계산은 파울로가 했다.

그들은 그렇게 저마다 때깔 좋은 옷들로 갈아입은 후 거리를 나섰다. 하지만 미레아는 뭐가 못마땅한지 연신 아리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

아리스를 위아래로 훑어본 미레아는 아리스를 벤치로 끌고 가서 거기 앉혔다.

“왜?”

아리스가 뭐라고 하기 전에 미레아는 그의 고글을 벗기고 땋은 머리를 풀어 내렸다.

“왜?!”

아리스가 항의했지만, 미레아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미레아가 손가락으로 그의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빗기 시작하자 라일라가 자신의 손가방에서 작은 솔을 빌려주었다.

미레아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아리스의 머리를 북북 빗어 삐져나온 잔머리들을 정리하더니 끈으로 반 묶음을 해 주었다. 거기에 고글 대신 자신의 선글라스를 씌워 주니 제법 잘 어울렸다.

“아이, 예쁘다.”

미레아가 아리스의 정수리를 토닥여 주었다. 아리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주인이 붙잡아 억지로 목욕을 시킨 고양이 같은 표정이었다.

“아, 속 시원해. 그 대충 하고 다니던 모습에서 조금만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 좀 빗었더니 신수 훤하잖아. 잘했어, 미레아.”

진이 미레아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어릴 때 이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여자애로 착각했기 때문에 싫었단 말이야.”

“걱정하지 마. 지금은 누가 봐도 장발이 잘 어울리는 남자 같아.”

시오가 아리스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진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셨다.

“어릴 땐 참 예뻤는데.”

“확실히…… 어릴 땐 제법 예쁘셨지요.”

율비네까지 과거를 회상하며 동의하자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듣기 싫었어! 내 콤플렉스였단 말이야! 남자애한테 예쁘다가 뭐야?”

“그럼 머리를 잘라.”

라일라의 단순한 말에 아리스가 율비네를 가리켰다.

“율비네는 머리가 짧아도 아무도 남자라고 생각 안 하잖아? 사람들이 나를 여자애라고 착각한 건 머리가 긴 거랑 상관없었다고.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오기가 생겨서 머리가 길어도 여자애로 착각하지 않게 크겠다며 머리를 안 자르고 있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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