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황제의 눈을 피해 북서쪽으로 향한다는 게 상대편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어서 뻔하기는 한데…… 우리는 기동력이 좋으니까 적어도 시간은 벌겠지.”
파울로가 세피로스의 말에 수긍하였다. 북서쪽까지 거의 쉬지 않고 달리기 위해서는 인원이 인원인 만큼 물자가 제법 많이 필요했다. 태세를 재정비하기 위해 하루 정도는 기존 경로에서 대도시 쪽으로 이탈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참에 하나 말하겠는데.”
해산하려는 일행들을 세피로스가 잠시 붙잡았다.
“지난 며칠간 생각해 봤는데, 나는 다음에 니콜라우스를 보게 된다면 가능하다면 죽일 예정이다. 적당히 봐주는 것도 슬슬 그만할 때가 되었지. 생포는 안 돼. 그런 게 먹힐 상대가 아니다.”
그 폭탄 발언에 일행들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자네들은 될 수 있으면 그자를 상대하지 마. 나 없이 니콜라우스를 마주쳤을 땐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길 것. 길게 재 볼 것도 없이 상대되지 않으니 빨리 후퇴해.”
의미심장한 말을 마친 세피로스의 눈은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는 메르티어스 황제를 죽이고 세피로스 님은 니콜라우스를 죽이면 되는 거네요?”
아리스가 그렇게 일축하자 일이 상당히 단순한 것처럼 느껴졌다.
“맞다.”
세피로스 역시 짧고 간단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일의 규모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래서 어떻게 죽이는데요?”
미레아의 질문에 쿤둘렌이 대신 대답했다.
“마검을 회수한 후 다음 작전을 시행하는 것이 좋겠지요. 상대방이 마검을 손에 넣는다면 모든 일이 수포가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눈앞에 주어진 임무가 우선이란 소리다.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이해하자 그것으로 짧은 회의가 끝이 났다.
* * *
클라인의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가로질러 가기로 한 원정대가 중간 보급을 위해 벨베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하필이면 마을의 축제 날에 딱 맞춘 것이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도시는 상당히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은 바쁘게 오갔고 도심 한복판에는 꽃으로 된 거대한 장식물이 세워져 있었다. 인파가 몰려 큰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트럭은 꼼짝없이 길에 갇혀 버렸다.
운전하던 라일라는 지루함에 늘어졌다. 경적을 울려도 사람들은 도무지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키고 싶어도 그럴 만한 공간이 없기도 했다. 좌석에 앉아 있던 아리스가 날짜를 셈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러고 보니 벌써 그렇게 됐나.”
“왜? 무슨 날이야?”
미레아의 호기심 어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클라인에서는 6월 첫 번째 보름달이 뜨는 날에 큰 축제가 열려. 달의 신 사르파니께서 클라인에 내려와 하룻밤 지내고 가는 날이라 생각하거든.”
“아하, 이 지역 사람들은 아직 사르파니를 모시는구나.”
시오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운전대 위에 엎어져 있던 라일라가 벌떡 일어나고 진이 흥분해서 말했다.
“축제 재미있겠다.”
“구경거리도 많아?”
“구경거리라 해 봤자 대단한 건 없고 사르파니께 음식을 대접하고 춤과 노래로 즐겁게 해 드려야 하니까 하는 일은 뻔하지.”
사람들 틈바구니로 행상들이 돌아다니고 상인들은 본격적으로 좌판을 펼치고 부지런히 물건을 진열하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포차들이 늘어섰다. 그것들을 보는 일행의 눈빛이 빛났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축제나 즐길 여유가 없잖습니까. 하필이면 시기를 잘못 잡았군요.”
현실을 일깨워 주는 율비네의 말에 사람들은 축 처졌지만, 파울로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좀 쉬었다 가도 괜찮지 않나? 어차피 보급하려면 시간이 좀 있어야 하고…… 정화기를 설치하는 속도는 빨라졌다지만 그만큼 무리하고 있었으니 하루쯤 축제 행렬에 껴서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허락을 구하는 눈빛으로 세피로스를 바라보았다. 세피로스 역시 젊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허락했다.
“벌써 이렇게 붕 뜬 마음으로는 일해도 어수선할 테니 기왕 온 김에 축제나 즐기라고. 어차피 하룻밤일 테니.”
그 말에 사람들이 쾌재를 울렸다.
“와, 감사합니다!”
“세피로스 회장님, 그대는 이 세상의 소금과 같은 분…….”
시오가 또 주접을 부리며 나섰다. 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술을 진탕 마셔 다음날 숙취 때문에 죽네 어쩌네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가 따라붙었다. 세피로스는 자신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너무 눈에 띈다고 조용히 숙소에 틀어박혀 있기를 희망했다.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남는 숙소가 별로 없었고 방이 있다 해도 가격이 비쌌다. 심지어 한 숙소에 열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 번에 묵을 만한 방이 없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제각각 다른 숙소에 묵어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세피로스가 쿤둘렌과 같은 방을 쓰고 다른 숙소에는 남은 남자들이, 여자들끼리는 바로 옆 숙소에 묵기로 했다.
낮 동안 파울로가 필요한 것들을 사러 시오와 아리스를 대동하고 나갔다. 이 축제는 달의 신을 위한 축제답게 밤에 절정을 맞으니 그들로서는 다행히 아닐 수 없었다. 도시를 부지런히 돌고 온 시오가 아리스를 끌고 여자들이 머무는 숙소를 기웃거렸을 땐 여자들끼리 까르륵 웃으면서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우던 중이었다.
“그보다 여자들끼리 다녀도 괜찮겠어?”
시오의 말에 미레아, 진, 율비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우리 셋이 남자 열을 상대해도 식전 운동밖에 안 될 텐데 뭐라고?”
“소매치기 같은 걸 당할 일은 없다.”
“상인들이 덤터기 씌우는 것도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셋이 자신의 말뜻을 오해한 것 같아서 시오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지. 당연히 너희들이 무시무시한 인간 병기인 건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내 말뜻은 그런 게 아니고 오늘 같은 날일수록 남자 일행이 한 명쯤은 있어야 귀찮은 일이 없다는 소리였어.”
여자들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리송한 얼굴을 하자 시오는 나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축제 같은 날 여자들끼리 돌아다니면 별 시답지 않은 사내새끼들이 헌팅한답시고 추파를 던지거나 귀찮게 군단 말이다.”
그제야 여자들은 이해했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듣고 보니 그렇네.”
“우리가 너무 예뻐서 그래.”
저들끼리 ‘그치?’라고 입을 모아 말하더니 또 깔깔거리며 웃었다. 리비엘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에 걸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 잡배들 방어용으로 데리고 다녀 달라?”
“누가 데리고 다녀 달라 그랬어? 내가 걱정……! 되니까 같이 가 주겠다, 이 말이지.”
시오의 태도를 보고 있던 진이 미레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혹시 쟤…… 라일라 좋아하냐?”
“생각보다 늦게 알아차리셨네요.”
미레아가 작은 목소리로 허허 웃었다. 진은 마이련어를 듣는 것쯤은 문제가 없었다 보니 회화 실력도 금방 늘었다. 일행들의 말을 몇 번 따라 하더니 지금은 제법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같이 움직이자.”
“우리?”
아리스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자 시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 하면 제일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 안내 가능한 현지인.”
“율비네가 있잖아.”
“저는 아리스를 보좌하기 바빠 사르파니 축제 때 제대로 즐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자신을 악덕 고용주 보는 얼굴로 보자 아리스가 작게 한숨 쉬었다.
“어? 아리스는 우리랑 같이 안 갈 생각이었어?”
“혼자서 할 일도 없을 텐데 같이 가시죠.”
미레아와 율비네의 제안에 아리스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따라나섰다.
“사진기 챙겨야지, 사진기.”
미레아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사진기를 들고 나오자 일행들은 우르르 시내로 향했다. 그러다 파울로와 마주쳤다. 파울로 역시 축제 구경하러 가던 길이었는지 제법 멋들어진 모습이었다.
“너희 지금 나가? 나랑 같이 가자.”
“와! 젊은이들 노는데 눈치 없다, 30대!”
미레아의 말에 파울로가 버럭 소리쳤다.
“뭐?!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30대 안 될 것 같아?”
“옷 빼입은 거 봐라! 젊을 때 놀던 습관 못 버렸다 이거지!”
“야! 나 지금도 젊어!”
“카디 언니한테 일러야지!”
“일러 보든가!”
리비엘로가 옆에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저 둘이 하는 행동만 봐서는 둘 다 10대 이하야.”
그 말에 일행들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레아는 정말로 싫은 게 아니라 단순히 파울로를 놀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어쨌든 파울로도 그들의 행렬에 껴들었다.
슬슬 해가 낮게 걸린 시간대였다. 시내에는 벌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들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거리를 나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미레아는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것을 보고 아리스에게 물었다.
“저 옷은 뭐야?”
“이 지역 전통 복장이야.”
발목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하얀색의 긴 치마 허리께에는 앞치마처럼 천을 두르고 있었다. 저마다 개성 있게 각양각색의 색으로 맞춘 천에 알록달록한 실로 여러 문양을 수놓은 복장은 상당히 우아했다. 저마다 다른 그림을 수놓았는데 어떤 옷에는 파랑새를 수 놓았고 또 어떤 옷에는 붉은 장미를 수놓는 등 저마다 개성 있고 다양하게 옷을 지어 입었다.
“원래는 수놓는데 손이 많이 가서 잘 안 입고 축제 때나 명절 때 꺼내 입어. 자신이 직접 수를 놓는 게 보통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수를 잘 놓는 사람에게 의뢰해서 사 입기도 해.”
“저도 한 벌 있었는데 잃어버렸습니다.”
율비네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예쁘다.”
라일라가 감탄하자 미레아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옷가게를 하나 발견하고 라일라의 손을 잡아끌었다.
“저기 가게가 있어. 가서 구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