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01화 (101/257)

101화.

지프의 원동력이 되는 기름을 쓸 수 없었다. 연료가 없으면 다음 마을까지 부식 지역을 걸어가야 하는 판국이었다. 기름이 없다는 소리에 시오와 율비네가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할 수 없군.”

세피로스가 자신의 물통을 꺼내더니 몇 번 위아래로 흔들었다. 흔들릴 때마다 물통에서는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자, 기름.”

세피로스는 물을 기름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려 그들에게 주었다.

“기름을 만들 마법을 부릴 기운으로 우리가 이렇게 되기 전에 마수를 때려잡으면 좋았잖아요.”

시오가 투덜거리자 세피로스는 그에게 내밀던 물통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치웠다.

“지금 내 탓 하는 건가?”

미레아가 시오를 거들며 나섰다.

“세피로스가 잘못했죠! 우리가 빨빨거리면서 마수 때려잡는 동안 옆에서 관조하고 있었잖아요. 세피로스한테는 별거 아닌 일이면서!”

“보조해 줬잖아. 그리고 나는 라일라와 리비엘로도 지켜야 했고. 게다가 그렇게 따지면 아리스도 대충했다.”

“저는 정화기 설치해야 하니까 마력을 아껴야 했거든요?”

아리스는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리비엘로는 그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사람들을 뗐다.

“싸우지들 마세요. 우리는 지금까지 세피로스 님이 없었으면 마수의 먹잇감이 되기 딱 좋았단 말이에요.”

시오와 율비네는 기름을 문질러 단단하게 굳은 점액을 열심히 녹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살을 녹이거나 태우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점액을 녹여 내자 이번에는 기름 때문에 온몸이 번들거렸다. 둘은 여전히 비위 상한 얼굴이었다.

라일라가 정화기를 설치하자 아리스는 마력을 흘려 넣어 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력의 흐름이 만들어지자 리비엘로가 성가를 노래했다. 신성력이 마력 위에 내려앉으면서 증폭됐고 땅이 정화되었다.

검게 오염됐던 흙들 역시 제 색으로 돌아왔다.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 풍경의 변화는 없었지만 대기가 순환하면서 구름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자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더니 금방 빗줄기가 굵은 소나기가 되어 땅을 적셨다.

“저것 좀 보십시오.”

쿤둘렌이 시원한 비를 맞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영소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높게 떠 있던 하늘섬들이 땅으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영소가 고갈되면서 비정상적인 중력 이상으로 생긴 것들이니 영소가 되돌아오면서 하늘섬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했다. 일행들은 그 경이로운 광경을 저마다 감탄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늘섬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고 서리 여신의 영소가 다시 돌아온다면 보비네의 신전과 알툰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시오가 중얼거린 말에 쿤둘렌이 대답했다.

“어제 알툰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긴 잠에 빠져들겠지요.”

〔그렇다.〕

어느새 알툰이 그들 곁에 와서 서 있었다. 알툰의 몸은 어제와 비교했을 때 제법 많이 투명해져 있었다. 푸른빛을 발하며 긴 털을 일렁이고 있는 그는 여전히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위대하신 보비네가 깨어나기 전까지 나는 보비네의 재림을 기다리며 이 땅에 잠들 것이다.〕

알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내리는군.〕

비록 뚜렷한 형제가 없었지만, 알툰은 빗줄기를 즐기는 것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감았다. 그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약속이었으니.”

세피로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서리 여신의 조각.〕

그 말에 미레아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세계의 변칙을 잘 부탁한다.〕

미레아가 이번에는 아리스를 가리키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알툰을 바라보았다. 아리스 역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알툰을 수상쩍게 바라보았다. 미레아는 아리스를 왜 자신에게 부탁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알툰은 자신의 할 말을 다 했다는 태도였다.

알툰은 앞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뒷다리로 섰다. 허공에서 앞다리를 몇 번 구른 후 대지를 쿵 하고 내려치자 그를 중심으로 눈 부신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빛은 순식간에 부식 지역이던 땅을 훑으며 퍼졌다. 그러자 땅에서 여린 새싹이 흙을 뚫고 머리를 내밀었고 까맣게 숯같이 변한 나무들이 자라나면서 새순이 돋고 꽃봉오리가 올라왔다. 빗줄기 덕분에 말라붙었던 시내에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들판에서 퍼지는 특유의 비 냄새가 났다.

일행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땅이 싱그러운 녹음으로 가득 찼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는 금방 그쳤다. 구름 사이로 눈 부신 태양 빛이 커튼처럼 땅에 내렸다. 마치 하늘에서 신이 강림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알툰은 그 햇살을 받으며 눈을 스르륵 감았다.

〔이것으로 나도 당분간은…….〕

자신의 기운을 다 쓴 알툰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면서 목소리도 함께 흐려졌다. 마치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흐트러지듯 알툰은 자잘한 빛으로 화하여 사라졌다. 알툰이 있던 자리에는 들꽃들이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쿤둘렌은 알툰이 있던 자리를 향해 오빈식 인사를 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제10장 사르파니 축제

어느 날, 일행들을 모아 놓은 세피로스가 문제가 생겼다며 서두를 열었을 때 그들은 올 게 왔다는 기분이었다. 메르티어스 황제가 움직인 것이다.

“왜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땅을 정화해 주고 좋잖아.”

“허락도 없이 자기 땅을 헤집고 다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게다가 마검이 걸려 있으니까.”

진의 의문에 아리스가 턱을 괴고 말했다.

“내가 마검을 되찾는다면 용을 제외하고 나를 대적할 만한 개인은 없어지니까. 아무래도 나나 마검 둘 중 하나는 없애고 싶겠지.”

다소 오만한 발언이었지만 세피로스마저 수긍했다.

“게다가 황제가 마검을 손에 넣는다면 대외적으로나마 강력한 무기를 얻은 셈이 되니 될 수 있으면 자기가 독차지하려 할 테고. 하지만 황제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만큼 마검을 다룰 순 없을 거야. 전에도 말한 적 있듯, 페니드란은 내게 충성심이 강한 검이거든.”

여하튼, 그들이 남동쪽을 지나치게 쑤시고 다닌 덕에 황제의 직속 부대가 그들을 추격해 오고 있었다. 세피로스는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이대로 북서쪽으로 간다.”

현재 있는 위치와 대각선 방향인 북서쪽 지역을 지도 위에 짚은 세피로스가 경로를 그려 보았다.

“이 정도 뒤졌으면 이 근방에는 마검이 있을 확률이 희박하다 보는 게 맞겠지. 북서쪽을 중심으로 수색해 보는 게 어떨까 싶네만.”

“정화 작업을 하지 않고 그대로 이동한다고요?”

세피로스가 지도에 그린 선들을 본 라일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최대한 빨리 이탈하는 게 좋겠지. 어차피 애초에 계획했던 석 달이란 시간은 우리가 황제의 움직임에 대비할 수 있는 기간을 추측했던 기간이다. 상황에 따라 그보다 앞당기거나 늦추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피로스는 나름 고심하며 말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너무 많습니다. 백익 니콜라우스도 그렇지만 우리가 본 마수로 변한 인간들, 그리고 대공자의 동료라 사칭하며 티몬에 나타나 용주를 건네주었다는 데르카이드. 하나씩만 놓고 보아도 이상한 일들인데 짧은 기간 동안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니…….”

쿤둘렌의 말에 세피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봤을 땐 배후에 있는 건 전부 한 사람의 소행이야.”

“니콜라우스 말인가요.”

“그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요?”

파울로의 물음에 세피로스는 한숨 쉬었다.

“그 녀석의 목적은 뻔해.”

“전에 말한 그 이야기 말인가요?”

“그래.”

세피로스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되짚어 주었다.

“티몬에서의 일, 지난 마을에서 너희가 겪었던 일 모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의미지. 내가 봤을 때 그건…… 그것 자체보다는 니콜라우스의 목적에 집중해야 해.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니까.”

세피로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어쨌든 지금은 마검 페니드란을 회수하기 바빠서 그 녀석을 신경 쓸 여력이 없어.”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시오가 반발하고 나서자 세피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니콜라우스가 메르티어스 황제와 결탁했다면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그놈을 상대하다 황제 측에 마검을 빼앗기면, 그거야말로 그 개자식이 원하는 시나리오거든. 보란 듯이 이상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일부러 그러는 거다.”

세피로스는 손깍지를 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여기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 너희는 거기서 무력감이나 맛봐라. 뭐, 이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겠지.”

“그렇다면 쥬드 같은 피해자가 계속 나와도 보고만 있으란 소리인가요?”

미레아가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럴수록 세피로스는 더욱 단호했다.

“그러니까 더욱 마검을 찾는 데 노력을 쏟아야겠지. 마검을 최대한 빨리 찾을수록 니콜라우스를 상대할 시간을 버는 것이니까.”

“하다못해 다른 요원들로 팀을 새로 꾸려 조사할 수는 있잖아요.”

“니콜라우스에게 어쭙잖게 덤벼들었다간 전멸당해. 그놈은 아리스보다 더한 놈이거든.”

세피로스의 냉정한 말에 미레아는 머리로는 이해는 가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반면 갑자기 비교 대상이 된 아리스는 살짝 발끈했다.

“니콜라우스가 저보다 어떤 점이 더하다는 건데요?”

“여러모로. 실력도, 능력도, 정신력도, 지금까지 저지른 일들의 규모도.”

세피로스는 하나하나 손에 꼽아 보았다. 한마디로 아리스는 니콜라우스에 비하면 애송이의 재롱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그건 마냥 긍정적인 것도, 그렇다고 마냥 부정적인 것도 아닌 애매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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