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건 네가……! 아니, 아니다. 이런 말을 하러 온 것이 아닌데…….”
울컥했던 아리스는 얼른 감정을 추스르고 손으로 마른세수하였다. 그러다 문득 알툰이 해야 할 말을 하라고 언질을 준 것과 진과 율비네가 자신을 등신이라 부르며 떠민 것이 떠올랐다.
“나는 화가 난 게 아니고 그냥…….”
그랬다. 아리스는 화가 난 게 아니고 미레아가 자신과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서 내버려 둔 것이었다. 사실 미레아가 자신의 얼굴에 주먹질했던 것도 반쯤은 잊고 있었다.
“그냥…… 너를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랬어. 화가 난 건 아니었어.”
아리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미레아는 발끝으로 촉촉한 흙을 툭툭 치며 고민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는 서리 교단의 신녀였어.”
미레아가 대뜸 자기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하시면서 그만두었고 록산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셨지. 우리 엄마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음식 솜씨가 정말 끝내주셨거든.”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아리스는 당황했다.
“그 얘기를 왜 지금 해?”
“네가 나를 불편하게 여기거나 싫어할까 봐 말하지 않았어.”
미레아가 아무것도 없는 정면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우리 가족들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미레아의 목울대가 꿀꺽 울렸다.
“우리 가족이 잘못된 건…… 나 때문이야.”
그 말을 듣자마자 아리스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5년 전 마수 대습격의 원인을 찾자면 자신 때문이었다. 그러니 미레아가 자신을 원망한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미레아는 지금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하는데 아리스는 그게 쉽지가 않았다.
“당시의 난 동생을 구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구한 것도 아니었어.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야. 이번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정말로 다시는…….”
미레아는 말꼬리를 흐리다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만큼은 모두를 구하려 그랬는데 또 내가 망쳤어. 쥬드가 그렇게 되기 전에 막았어야 했어. 쥬드 때문에 다른 인명 피해가 나오기 전에 해결책을 찾았어야…….”
“그게 왜 네 탓이야?!”
아리스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그 애의 목을 쳤잖아! 그럼 내 탓 아니야? 나를 원망하던 것도 그 때문에 아니야? 거기에 네 잘못이 어디 있어?”
“너를 막지 못한 것은 나잖아!”
맙소사…… 미레아의 대답에 아리스는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이건 거의 병적인 강박 증상이었다.
“어린애를 밤에 혼자 나돌아 다니게 둔 것도 나잖아. 그날 밤에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줬어야 했어. 그랬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 악마라 말한 것도 어린애가 한 말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진작에 조사해 봤어야 했어. 그 일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는 많았어. 그것을 전부 무시한 것은 나야!”
미레아가 붉어진 눈가로 소리쳤다.
“안이했던 것도 나고! 멍청하게 굴었던 것도 나야! 난 아리스 네 선택을 잘못이라 말할 수 없어. 네 말대로 그 순간의 해결책은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나도 알아. 그때 때렸던 건 미안해. 그래서 너에게 사과 받을 수 없어.”
“차라리 내 맞은편 얼굴에 주먹질이라도 해. 얼마든지 맞아 줄게.”
아리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건 네 잘못도 아니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아무 죄 없는 어린애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야!”
“여태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
아리스는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미레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려다 그만두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일로 여태 네가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봐 무서웠어. 그런데 지금은 차라리 그편이 나아 보인다.”
미레아가 하는 생각은 얼마나 자신을 갉아먹을지 안 봐도 뻔했다. 지금까지 아리스가 봐 온 미레아는 항상 밝았고 그 때문에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긍정적이라 생각했던 것은 부정적인 결과를 선택지에서 아예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긍정적인 결말로 이끌려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혹사했다. 그런데도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레아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걱정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자신에게 죽지 말라고 붙잡은 세피로스의 얼굴이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아서 그랬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단단해야 했다. 약하면 이도 저도 되지 않는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은 괜찮아야 했고, 절망에 빠져있을 새도 없이 다시 일어나야 했다. 지금의 밝고 긍정적인 모습은 그렇게 만들어 낸 모습이었다.
그래도 인간인데 어떻게 흉터로 남은 부분이라 해도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리스는 미레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네 말을 듣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해 버렸어.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 정말 미안해.”
“아리스 잘못이 아니야.”
“그렇다고 네 잘못도 아니지.”
미레아는 양손에 얼굴을 묻는 대신 억지로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눈물이 빨리 마르길 바랐다.
“부탁 하나만 해도 돼?”
그 말에 미레아가 축축한 눈가로 아리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건……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란 것쯤은 아니까 당장 기대하지는 않을게. 대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한테 꼭 말해 주면 안 될까?”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미레아의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혼자 그렇게 고민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앞으로는 말 잘 들을게. 그러니까…… 나에게도 그 짐을 나눠 주면 안 될까?”
아리스는 그래야만 했다. 5년 전에 있었던 일은 어찌 되었든 책임을 피할 수 없었고 지금의 미레아를 만든 것은 아리스가 저지른 5년 전의 일들이었다. 아리스는 미레아에게 속죄해야 했다.
“내 나름대로 노력하는 게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미레아는 어쩔 줄 몰랐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리스는 길이라도 잃어버린 어린애 같은 얼굴이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아리스는 미레아를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최소한 나한테 얘기라도 해 줘.”
“……그래.”
미레아가 아리스의 정수리 위에 자신의 턱을 올려놓았다.
“그럴게.”
“약속 지켜.”
“응.”
“고마워.”
“나야말로 고마워.”
둘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 * *
다음날, 원정대는 알툰과 약속한 대로 오염된 성소로 향했다. 성소는 하늘섬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원래라면 다 같은 신전 부지였을 것을 생각하면 당연하였다. 숯처럼 변한 나무들 사이로 보비네의 신전 석재로 추정되는 하얀 대리석 잔해들이 보였다. 그런데 알툰이 말한 것처럼 마수들이 들끓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온했다.
“이미 부식되어서 마수들이 없나?”
시오가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조용한데?”
“하지만 영소가 아직 남아 있어.”
아리스가 흙의 냄새를 맡고는 오염된 흙 특유의 역한 냄새에 코를 훔쳤다.
“마수들이 몰려오기 전에 정화기부터 설치하면 괜찮을 것 같아.”
그들이 신전 근처에 접근하자 어디선가 기분 나쁜 저음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일행들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비쩍 마른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진이 등 뒤에 메고 있던 도끼를 풀어 들었다.
“일단 소리로는 한 놈이다.”
진의 말에 일행들은 서로에게 등을 맞대고 원형으로 섰다.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고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레아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혹시 마수가 투명해질 수도 있어요?”
“투명한 게 아니야. 보호색으로 몸 색깔을 자유롭게 바꾸는 종이다. 펠니카에서 발견된 타입의 마수가 그랬어. 눈을 믿지 마.”
진의 설명을 들은 시오가 머리를 끄덕거리며 기관단총의 공이치기를 딸깍거리며 말했다.
“좋아, 그럼…… 다들 몸 숙이고 머리 조심하세요.”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자 시오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기관단총을 연사했다. 일행들의 머리 위로 탄피가 우르르 떨어졌다. 어느 한 지점에서 괴성과 함께 초록색 체액이 튀었다. 체액이 몸에서 흐르자 어디 있는지 눈으로 포착할 수 있었다.
화가 단단히 난 마수는 보호색을 풀고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지네처럼 생겼는데 마수가 몸을 일으키자 그것을 보고 있던 일행들의 목이 한없이 꺾였다.
“이렇게 크단 얘기는 없었는데.”
“보비네의 영소까지 먹고 저만큼 자랐나 봅니다.”
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율비네가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아. 겨우 한 마리야.”
파울로가 여유 있게 검을 빼 드는데 마수가 입을 움직여 따닥따닥거리는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멀리서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똑같이 생긴 다른 마수가 나무 사이로 몸을 치켜들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소식을 연달아 주고받기라도 하는 듯 나무 위로 나타난 마수들은 모두 열이 넘었다. 일행들의 얼굴이 굳었다.
“전혀 안 괜찮잖아.”
미레아가 검을 고쳐 잡았다. 시오의 총알받이가 되었던 마수가 아래로 빠르게 머리를 숙였다. 일행들은 마수를 피해 산개했다. 세피로스는 라일라와 리비엘로를 뒤쪽으로 빼 자신의 보호하에 있도록 두었다.
“세피로스, 모범을 보여 주시지요.”
미레아의 말에 세피로스가 몸에 마력을 두르며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속전속결이 좋지 않을까 생각 중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