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당연하다. 네 본질은 너 그 자신이니.〕
“제 외면과 내면이 똑같다는 소리인가요?”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나저나 알툰의 말대로라면 저는 이 거울을 봐 봤자잖아요. 무슨 의미가 있죠?”
〔내가 그대에게 보여 줄 것은 그보다 더 너머에 있는 것들.〕
갑자기 청동거울에서 빛이 났다. 미레아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러다 빛이 사라진 것을 느껴 눈을 가렸던 팔을 치우자 미레아는 뜻밖에도 너른 초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짙은 푸른색의 털을 몸에 두르고 세 쌍의 뿔을 가진 오빈이 저 멀리 서 있었다. 낮에 석상으로 보았던 보비네의 모습과 일치했다. 손에 든 지팡이를 휘두르자 초목이 자라났고 오빈들은 비옥한 대지 위에서 평화를 누렸다. 보비네가 그들을 굽어보며 축복을 내리는 인자한 마음이 미레아에게도 흘러들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찢어지면서 깨졌다. 그 틈바구니로 새하얀 괴물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수.
그것은 분명 100년 전에나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마수였다. 지금의 마수와 형태는 조금 달랐어도 마수가 확실했다. 마수는 오빈들을 잡아먹으며 땅을 부식시켰고 대지는 오빈들이 흘린 피로 젖어 들었다.
보비네의 옆으로 알툰이 나타나 두 쌍의 뿔로 마수들을 들이받았다. 하지만 마수들의 수는 어마어마했고 그들은 알툰의 살을 찢고 보비네의 뿔을 꺾었다. 보비네는 결국 땅에 쓰러져 오빈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던 중 보비네의 꺾인 뿔 앞에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위대하신 보비네.〕
보비네는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에 그 모습을 담았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 젊은 여인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대는 소멸하고 이 별은 그대로 마수에게 먹혀 영소 고갈로 죽은 땅이 되겠지요.〕
〔원통하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저 역시 동의하는바. 당신께 시간을 벌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오른손에서 빛나는 별을 내밀었다.
〔이것은 나의 소중한 연인이 만들어 준 특이점.〕
그렇게 말한 여인은 울고 있었다.
〔이것으로 깨진 하늘을 이어 붙여 마수를 막고 이 세계의 영소를 되돌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영소는 이미 고갈되어 힘이 충분치 않다.〕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인은 서글프게 웃었다.
〔제가 있는 한, 이 세계는 원래의 형태를 유지할 것입니다.〕
〔그대는 일개 인간일 뿐. 무리다.〕
〔그 말대로 저는 일개 인간. 하지만 이 특이점과 우리의 기술을 결합한다면 신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 지위는 인간의 정신이 감내하기 힘든 위치이다. 이 라슈온에 흐르는 영소가 흐려지면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다. 기쁜 일도 있겠지만 슬픈 일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세상이다. 그때마다 인내할 수 있겠는가.〕
〔그것까지 감안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손에 쥐고 있던 별의 파편 같은 빛에 입을 맞췄다.
〔저는 이미 가장 큰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이 특이점을 전해 준 그의 의지를 잇는 것.〕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여인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는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여인의 감정이 미레아에게 흘러들어 왔다. 미레아는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헐떡였다. 힘이 빠져 무릎이 꺾였고 눈가가 뜨거웠다. 그와 동시에 미레아는 여인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설.’
지금은 서리 여신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자의 원래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환상으로만 치부했던 설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너는 그와 얽힌 인연 중 가장 심지가 곧은 아이.〕
미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명백하게 미레아를 향한 말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기록이었고 미레아에게 말을 걸고 있는 그녀는 환영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레아는 설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째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인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네게도 나눠 줄게. 사실 너밖에 없어.〕
설이 ‘특이점’이라고 말한 별빛을 반대편 손으로 일부 옮겼다. 그러더니 누군가에게 건네주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한 미레아는 일순 눈을 깜박이는 것을 잊었다. 그것은 미레아의 어머니인 레인이었다. 레인은 미레아에게 다가가 그것을 그녀의 가슴께에 밀어 넣었다. 미레아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것은 서리 여신의 특이점. 너는 지금부터 이대로 흘러가기만 하면 돼.〕
그러더니 생긋 웃었다.
〔안녕, 나의 소중한 딸.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시간 내내 평안하길.〕
그러더니 미레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 미레아는 어안이 벙벙해 레인이 있던 자리를 한참 보다가 옆에 있던 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의 얼굴에는 슬픔, 연민, 안쓰러움, 동정, 존경심, 죄책감 같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설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슬픔으로 얼굴을 감싸고 오열했다. 미레아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환상에서 깨어났다.
* * *
미레아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서러움에 흐르는 눈물을 닦을 정신도 없었다.
‘이 세계에 마수가 나타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군요.’
미레아가 속으로 말하자 알툰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이것을 보여 준 이유가 무엇이죠?’
〔그대가 우리의 슬픔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알툰은 그리 말하며 눈을 감았다.
〔필시 그대가 우리의 슬픔에 깊이 동조하는 자 중 하나일 터.〕
“아아, 알툰…… 당신 말이 맞아요.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어요.”
미레아가 흘린 눈물이 붉게 상기된 뺨을 타고 흘러내려 땅에 뚝뚝 떨어졌다.
“당신이 저를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고 말한 이유도 알겠어요. 서리 여신이 제게 자신의 일부를 건네주었기 때문…… 하지만 제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어요. 대체 왜죠? 왜 하필이면 저인 거죠? 알툰과 서리 여신이 제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이죠?”
그 말에 알툰이 미레아에게 다가갔다. 미레아가 알툰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이마를 맞대었다. 미레아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알툰이 미레아와 맞댄 이마를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이것은 언젠가는 그대가 접근해야 하는 진실. 하지만 현시점에서 그대가 슬픔을 이겨 내지 못한다면 잠시 기억은 봉인해 주겠다.〕
“봉인?”
〔때가 되면 저절로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알툰의 몸에서 푸른 빛이 나더니 미레아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미레아!”
아리스가 얼른 달려와 그녀의 몸을 받았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적대 어린 시선을 보내는 아리스에게 알툰이 고개를 흔들었다.
〔단순히 정신을 잃었을 뿐. 금방 깨어날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일인지 설명 정도는……!”
〔서리 여신의 조각이 정신을 차리면 그대가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 좋을 거다.〕
“내가 해야 할 말?”
알툰은 그러더니 턱을 추켜올렸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더니 낮에 그랬던 것처럼 발을 구르더니 사라졌다. 아리스는 알툰이 있던 자리를 허무하게 바라보고는 품에 안고 있던 미레아를 내려다보았다.
알툰의 말대로 미레아는 금방 깨어나려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이마를 쓸었다. 그리고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아리스를 바라보며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올라 아리스를 확 밀쳤다. 기습과 같은 봉변에 아리스는 뒤로 넘어졌다.
“헉? 허억? 아리스? 지금 뭐 해? 어떻게 된 거지?”
미레아는 벌렁거리는 가슴께를 손으로 누르며 아리스에게 물었다. 아리스는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일어났다.
“네가 갑자기 쓰러져서…….”
그 말에 미레아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알툰이 기억을 잊게 해 준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미레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답답한 마음에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진짜 기억이 안 나네! 이럴 거면 왜 보여 준 거지?! 아니, 애초에 내가 무언가를 본 게 맞긴 한가 싶고?”
“때가 되면 저절로 기억이 날 거래.”
“그게 무슨 날을 말하는 건데?”
아리스는 낸들 알겠냐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레아는 깊은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손으로 얼른 얼굴을 정리하는 미레아의 눈가가 살짝 붉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신경 쓰이지 않았을 텐데 빌어먹게도 달빛이 너무나도 환해서 안 볼 수가 없었다.
“이리 와 봐.”
아리스는 옆에 있는 분수대로 미레아를 데리고 갔다. 미레아가 맑은 물로 세수를 하며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아리스는 그 옆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어느 정도 감정이 진정된 미레아는 코를 훌쩍이며 분수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둘은 한동안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말이 없었다. 아리스는 슬슬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초조해지려는데 미레아가 불쑥 말을 꺼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안에서 엄마의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해.”
“돌아가신?”
“응.”
그러더니 둘은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타이밍에 좀 뜬금없는 소리인데, 우리 그만 화해하자.”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미레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그날 때려서 미안해.”
쥬드를 죽인 아리스에게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날린 일을 마치 처음부터 별것 아닌 일이었던 것처럼 그냥 무마하고 넘어가려는 것 같았다. 그 뻔한 태도에 아리스는 되레 화가 났다.
“잘못했다고?”
“그래. 잘못했어.”
그러더니 지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사과해도 네가 화가 풀리지 않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하니까…….”
“내가 왜 화가 났을 거로 생각하는 거야?”
“그날 이후 나랑 제대로 대화하지 않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