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사실 아리스는 몇 번 대화를 시도했었다. 문제는 시도로만 그쳤다는 게 율비네와 진의 환장하는 점이었다. 지금 상태에서 미레아는 오히려 괜찮았다.
미레아는 아리스와 대화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지만 옆에서 안달복달하는 쪽은 명백하게 아리스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아리스와 함께한 세월이 길었던 진과 율비네였기 때문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대화를 하라고! 제발!”
진이 때리는 등이 너무 아팠기 때문에 아리스는 미레아를 쫓아가는 척이라도 할 생각으로 일어났다.
한편 미레아는 저녁을 소화할 목적으로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성소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던 미레아는 알툰이 신전 뒤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경고한 것을 깨닫고 그 앞에 멈춰 섰다. 가지 말라면 더 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인지라 접근하지는 못하고 그 근처에서 안쪽을 기웃거렸다.
저 멀리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여러 조각상이 보였다. 보비네를 포함해 그를 보좌하는 여러 하위 신들이 모셔진 곳 같았다. 미레아는 본격적으로 구경할 수 없는 게 좀 아쉬워 입맛을 쩝 다시며 몸을 돌렸다.
〔서리 여신의 조각.〕
“아으악! 깜짝이야!”
자신의 코앞에 알툰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미레아는 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죄송합니다, 알툰! 신전 뒤쪽으로는 들어가지는 않고 멀리서 보기만 했습니다. 설마 멀리서 보는 것도 안 되는 건가요?”
미레아가 다급하게 변명을 했지만, 알툰은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아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누군가 풀을 헤치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리스가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는 검 자루에 손을 올리고 언제든지 뽑을 준비를 하고 미레아와 알툰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좀 아까 미레아가 깜짝 놀라 내지른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미레아가 아리스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냐, 별일 아니야. 내가 혼자 깜짝 놀라서 그런 거였어.”
〔이 세계의 변칙.〕
알툰이 자신을 응시하자 아리스는 얼른 뒤로 물러나 일단 사과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알툰.”
〔불쾌하진 않다.〕
“감사합니다.”
아리스와 미레아는 알툰에게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이 뒤쪽이 궁금한 것인가?〕
알툰이 미레아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궁금하긴 한데…… 안 된다고 하시니 참겠습니다.”
알툰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생각을 마친 듯 미레아에게 말했다.
〔그대에게는 이곳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다른 사람은 안 되는데 저만 가능한 건가요?”
〔그렇다. 그것은 서리 여신의 조각에게 허락된 최소한의 권리.〕
“저기에 무엇이 있는데요?”
알툰은 아리스를 힐끔 보더니 미레아에게만 말했다.
〔……이 세계의 기록.〕
그 말은 아리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정신을 통해 직접 소통하는 알툰이 미레아에게만 말을 흘려보낸 것이다. 뜻밖의 말에 미레아의 눈이 커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리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알툰을 바라보았다.
〔원한다면 볼 수 있게 해 주겠다.〕
“왜 제게만 허락된 건가요? 제가 대체 무엇인데요?”
〔그대가 원치 않는다면 엿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러더니 알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허나, 언젠가는 그대가 접근할 진실.〕
“혹시 제가 알면 제 인생이 크게 바뀔 수 있는 일인가요?”
〔그렇지 않다. 그대의 역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으니 진실에 접근한다 해도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
“위험하지는 않고요?”
〔위험하지 않다. 그대의 곁에는 내가 있을 것이다.〕
그 말에 미레아는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볼래요.”
〔그런가.〕
“제가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라면 미리 아는 것쯤은 괜찮겠죠. 그리고 방금 서리 여신의 조각이 무엇인지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더니 더 궁금해졌어요.”
미레아는 여전히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해 멀뚱멀뚱 서 있는 아리스에게 말했다.
“나 잠시 다녀올게.”
“어딜 가는 건데?”
“알툰께서 재미있는 걸 보여 줄 생각인가 봐.”
미레아는 신전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 아리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막아섰다.
“뭐? 미쳤어?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혼자 가?”
“보비네의 두 번째 뿔이 위험하지 않다 그랬어. 괜찮을 것 같아.”
미레아의 옆에서 알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혹시 다른 사람들이 날 찾으면 잘 둘러대 주길 바라. 세피로스나 파울로가 알면 혼날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한 미레아는 알툰을 따라 신전 뒤쪽으로 걸어갔다.
“야! 미레아!”
아리스가 뒤쫓으려 하자 알툰이 막아섰다. 알툰은 분명 방금 미레아를 데리고 신전 뒤쪽으로 사라진 것을 아리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알툰은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아리스 앞에 서 있었다.
〔이 세계의 변칙.〕
아리스는 괜히 돌부리를 걷어차고는 알툰에게 물었다.
“미레아는 괜찮은 건가요?”
〔걱정하지 말아라.〕
“그거 약속하실 수 있는 것인가요?”
〔약속하마.〕
아리스는 머리를 싸매고 땅에 주저앉았다.
“애가 겁이 없어.”
그런 아리스를 알툰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알툰이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아리스는 머쓱한 얼굴로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이 세계의 변칙이라는 뜻은 저 하나를 뜻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데르카이드 전체를 뜻하는 것인가요?”
〔그대와 비슷한 존재들은 그저 이 세계와 함께 흘러갈 뿐. 하지만 그대는 다르다.〕
“제가 서리 여신의 신탁을 받았기 때문인가요?”
알툰은 고개를 내저었다.
〔신탁 이전에 그대가 있었다.〕
“저는 신탁이 내린 날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존재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것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
알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대에게는 별에서 내린 자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인가.〕
“세피로스를 뜻하는 것인가요?”
〔그는 별에서 내린 자 중 하나. 별에서 내린 자는 다수.〕
“저는 그게 뭔지 모릅니다. 알툰께서 말씀하시는 별에서 내린 자들은 누구입니까.”
〔이 세계의 조율자를 만든 자들. 하지만 그 이상은 모른다. 나는 보비네와 함께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별에서 내린 자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알툰이면서 정작 모른다고 하니 아리스는 궁금증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이 세계의 변칙.〕
알툰이 아리스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세피로스가 자신을 ‘불확실 요소’라고 부르는 의미와 일맥상통할 것 같았다.
〔나는 그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대 주변에 있는 자들이 그대에게 내린 평가를 참고하여 판단을 유보했다.〕
“알툰께서 저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면 어떡하실 건가요?”
〔나는 보비네의 두 번째 뿔. 악하고 삿된 것들을 몰아내는 것이 나의 사명.〕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것을 거꾸로 해석하면 아리스는 아직은 악하고 삿된 것이 아니라는 뜻도 되었다. 아리스는 그게 어쩐지 제법 위안이 되었다. 서리 여신이 아닌 다른 신은 적어도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없었다.
아리스는 내친김에 질문을 또 던졌다.
“서리 여신의 조각은 무슨 뜻인가요? 미레아를 왜 그렇게 부르는 건가요?”
〔그자는 조율자의 파편.〕
미레아가 그랬듯 아리스 역시 알툰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혹시 조율자는 서리 여신을 뜻하는 것인가요?”
〔그렇다.〕
“왜 그렇게 부르는 건가요?”
그 질문에 알툰은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현재 이 세계 영소의 흐름을 조율하는 것은 서리 여신. 조율자라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보비네도 그렇게 부를 수 있지 않나요?”
알툰은 고개를 저었다.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위대하신 보비네는 이 세계를 조율한 적이 없으시다. 보비네께서는 이 세계의 거대한 흐름 그 자체.〕
아리스는 성직자도 아니었고, 오빈도 아니었기 때문에 알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기껏 설명해 주어도 아리스가 하나도 이해 못 한 얼굴을 했지만, 알툰은 괘념치 않았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당장 이해할 필요는 없으니.〕
“그래서 미레아는 언제 나오는데요?”
〔지금.〕
알툰이 턱짓을 한 쪽을 바라보자 언제 나왔는지 미레아가 서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나와서 아리스는 속으로 안도했다. 알툰은 그제야 아리스의 앞에서 비켜섰다. 아리스는 꾸벅 인사를 하고 미레아에게 다가갔다.
“빨리 나온 것을 보니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나 봐?”
아리스는 미레아에게 말을 걸다 멈칫했다. 미레아의 표정은 어딘가 공허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레아?”
“죄송해요, 알툰.”
미레아가 양손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훔쳤다.
“이렇게 슬픈 이야기일 줄 몰랐어요.”
* * *
미레아는 알툰의 뒤를 쫓아 보비네를 보좌하는 여러 하위 신들의 석상이 양옆으로 정렬된 길을 따라갔다. 알툰이 걸음을 멈춘 곳에는 대리석을 깎아 만든 원형의 지붕이 있는 작은 정자였다. 정자의 중앙에는 매의 모습을 한 신이 양 날개를 펼친 문양이 장식된 둥근 청동거울이 있었다.
〔그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지혜의 신, 벨타. 그가 가진 거울로 세상을 비추면 진실한 모습만 볼 수 있지.〕
그 말에 미레아가 그 앞으로 다가가 옷소매로 청동거울의 표면을 깨끗하게 닦아 자신의 모습을 비추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요모조모 뜯어본 다음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알툰에게 말했다.
“그냥 전데요……?”
거울에 비춘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혹시나 다른 게 있나 한 번 더 들여다봤지만, 여전히 자신의 모습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