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96화 (96/257)

96화.

“진 누나는 왜 안 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리스는 뒤늦게 진이 수건은 핑계였고 돌아올 생각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햇살이 강했기 때문에 옷은 몰라도 피부 위에 맺혔던 물은 진작에 다 말랐다. 자신만 바보가 된 것 같아 한숨을 푹 쉬며 축축한 옷가지를 챙기고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2주 만에 미레아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사실을 깨달았다. 아리스는 연못을 둥둥 표류하고 있는 미레아를 힐끔 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아직 화가 안 풀렸어?”

“무슨 화?”

의외로 미레아의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그 어투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그…… 아니다.”

아리스는 손을 휘적거리며 몸을 돌렸다. 뒤에서 미레아가 물에서 나왔는지 물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자박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아리스에게 다가갔다. 미레아는 예고도 없이 아리스의 발을 걸어 그의 몸이 기우뚱거리는 순간 연못 쪽으로 세게 밀쳤다.

아리스는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에 빠졌다. 두 번이나 연못에 빠진 아리스는 황당한 얼굴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미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옷을 챙기고 있었다. 아리스가 이마에 달라붙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연못에서 다시 기어 나오자 미레아가 말했다.

“네게 사과받을 생각은 없어.”

미레아는 그러더니 자기 옷을 챙겨 쌩하니 가 버렸다. 아리스가 양어깨를 늘어트리고 철벅철벅거리며 율비네의 앞에 나타났을 때 율비네는 이제는 그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며 미간을 찡그리고 말했다.

“아리스는 역시 등신이 맞는 것 같습니다.”

* * *

쿤둘렌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조사하는 동안 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워서 저녁 준비를 했다. 쿤둘렌이 원하는 만큼 보고 돌아왔을 때는 군침 도는 저녁밥 냄새에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왔다.

파울로가 쿤둘렌과 리비엘로에게 식기를 주었고 그들은 냄비에서 끓고 있는 따듯한 스튜를 한 국자씩 떠서 담았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동안 진은 쿤둘렌에게 호기심 어린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오빈의 신화는 재미있다.”

이것저것 궁금해하는 진을 위해 쿤둘렌은 새로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일곱별의 바다가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별의 신인 호드란이 어두운 심해에 사는 바다의 신인 넬로를 사모해 어두운 곳에서도 외롭지 않게 일곱별을 내려 주었기 때문에 아닌가요?”

아직 말이 어설픈 진 대신 아리스가 대답하자 쿤둘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전설 역시 테나력이 시작될 때…… 그러니까, 귤람력으로 2,000년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시오가 육포를 씹으며 물었다.

“대체 3,00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세피로스 님께서는 아시는 게 없습니까? 지금 세대 용이라 해도 선조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수도 있잖습니까.”

율비네의 말에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차로 입가심을 하던 세피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용은 질서와 규율의 종족이다. 용들은 오랜 수명 덕분에 이 세계의 거대한 흐름을 알고 있고 누군가의 간섭으로 그 규칙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러므로 나를 포함한 내 종족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유가 있는 거다.”

실제로 미레아는 세피로스에게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많았지만 아무리 세피로스라 해도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들이 백익 니콜라우스에 대해 캐물어도 입을 다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용들은 자신의 종족에 대한 일들은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용이 어떻게 번식을 하는지마저 세간에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하지만 마수가 나타나면서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어. 용들의 성지에서 숨죽이고 있던 용들마저 일어나 함께 싸웠으니까.”

“전설이 있다. 지금의 용들 전부가 아니다.”

“글쎄, 어떨까.”

진이 어설픈 루아드어로 끼어들자 세피로스는 의뭉스럽게 눈썹을 늘어트리며 말을 아꼈다. 그러는 사이 미레아는 리비엘로 옆에 앉아 알툰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리비엘로 있잖아, 알툰이 나를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고 불렀어.”

그 말에 리비엘로가 분주히 움직이던 손을 멈칫하더니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져 있어서 미레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리고 나한테 기대하겠대. 혹시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리비엘로가 흐린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나도 정확하게 몰라. 다만, 서리 여신의 조각이란 서리 여신의 일부를 옮겨 받은 사람을 뜻하기도 해.”

“서리 여신의 일부를 전해 받았다니 그게 뭐야?”

“말 그대로 여신에게 무언가를 받고 태어난 사람들이야. 서리 여신의 조각은 지금까지 이 세계에 꾸준히 등장했었어. 저마다의 역할을 가지고 말이야. 서리 여신을 대신해 여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자들을 뜻하는 것을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고 말해. 다만 조각이 서리 여신에게 무엇을 받았는지는 아무도 몰라. 당사자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미레아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위아래로 까닥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리비엘로를 응시했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투인데.”

“난 예지의 신녀잖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어 있어. 참고로 레인 씨도 알고 계셨어.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겠지만.”

“엄마가?”

“응.”

“그것도 내게 비밀이었어?”

“물론 대외적인 비밀인 까닭도 있었지만…… 굳이 네게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 나도 그렇고 네 어머니도 그렇고 말이야. 네 어머니가 먼저 내게 미레아에게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었어. 말했잖아. 서리 여신의 조각이 이 세상에서 무슨 역할을 맡았는지는 모든 것이 다 지나가기 전에는 알 수 없다고.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태어나 자기 뜻대로 삶을 살아가는 게 그들의 의무라면 의무야.”

“그게 뭐야. 알 수 없네.”

“꼭 대단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소리야. 자신을 특별하게 여길 필요도 없지. 그마저도 여신의 안배이니 말이야.”

“음…… 역시 알 수 없네…….”

미레아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혹시 우리 엄마랑 관련이 있어? 엄마가 서리 교단의 신녀였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서리 여신의 조각으로 태어난 건가?”

미레아의 의문에 리비엘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그냥 우연이야. 서리 교단과 관계없는 사람 중에서도 여신의 조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

미레아는 리비엘로의 생각보다 자신의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레아는 리비엘로가 해 준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정리하고는 결론지었다.

“그럼 서리 여신의 조각이고 뭐고 상관없이 난 ‘평범한’ 사람이라는 소리지?”

“맞아.”

“그럼 됐어.”

미레아는 식사를 마저 입안으로 넣다가 신전 꼭대기에 반사된 빛을 보고 멈칫했다. 건물 꼭대기에 알툰이 올라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반사된 몸은 반투명하게 반짝거려 알툰이 실제로 육체를 가진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 주었다.

“보비네의 두 번째 뿔이라니,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아. 지금도 대단해 보이는데 보비네가 정말 깨어나면 얼마나 더 멋있을까.”

미레아는 몽롱한 목소리로 리비엘로에게 물었다.

“실제로 서리 여신의 속삭임을 받는 성녀는 이보다 더 경이로운 느낌을 받으려나? 궁금하다.”

“신화 속 존재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어. 다만, 몰랐을 뿐.”

사람들은 신성력에만 기대지 않고 마법과 과학을 연구해 눈부신 발전을 이륙했다. 그 결과 마냥 기적만 바라고 신들에게 기대지 않고 자립할 수 있었다. 수많은 신화 속 존재들은 그렇게 잊혔고, 한때 하늘을 수놓던 용들은 그들의 성지로 숨어들었다.

“나 역시 그분을 영접한 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 못 하겠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벼락을 맞은 것 같은 느낌이래.”

“그럼 별로 안 좋은 거 아닌가?”

미레아의 의문에 리비엘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엄마한테 더 물어볼걸…….”

미레아가 흘러가는 말처럼 중얼거리자 리비엘로가 짠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날, 쥬드가 죽은 이후로 리비엘로가 봤을 때 미레아는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누군가 툭 건들기만 해도 어딘가가 깨질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혼자 무리한 일을 칠 것 같았다. 저번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미레아의 폭주를 막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리비엘로는 자신이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식사를 마친 미레아는 자신의 그릇을 깨끗하게 설거지하고 일행과 따로 떨어져 나왔다.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율비네와 진이 아리스의 양옆에서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댔다.

“왜?!”

“너 제발 미레아랑 얘기 좀 해 봐라.”

요 며칠 동안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던 진이 아리스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나쁜 애가 아닌데 무슨 고집으로 관계 회복 할 생각을 안 해?”

“난 잘못한 게 없거든.”

그 말에 진이 아리스의 등짝을 퍽퍽 때렸다.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잖아!”

아리스는 억울한 얼굴로 옆에 있던 율비네에게 불쌍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아파! 아프다고! 율비네, 너는 왜 안 말려?”

“이게 다 아리스를 위해서입니다.”

“대체 그게 왜 나를 위한 거야? 영문을 모르겠네!”

“얜 등신이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몰라.”

진과 율비네는 고작 며칠 본 미레아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이전에 아리스가 두 눈 뜨고 봐 줄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하게 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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