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오늘은 일행들이 지쳐 있으니 이곳에서 하룻밤을 나게 허락해 주면 내일 해결해 주어도 되겠소?”
세피로스의 말은 뜻밖이었다. 갑자기 이곳에서 하루를 나자는 말에 쿤둘렌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원래대로라면 내일 안으로 이 지역을 벗어나야 했다. 덕분에 쿤둘렌은 이 지역을 더 조사하고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꾹 참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고 생각했다. 영소가 가득한 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지금까지 몸에 누적되어 있던 피로가 싹 가실 것이었다. 그 대가로 마수를 퇴치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별에서 내린 자, 세피로스. 그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약속하지.”
그리고는 한 가지 더 양해를 구했다.
“아래쪽에 동료가 있소. 그들을 데려와도 되겠소?”
알툰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눈을 통과한 이들만 허락하겠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그들은 신뢰할 만한 자들이오.”
〔내가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별에서 내려온 자.〕
그러자 쿤둘렌은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이곳을 좀 더 조사해 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금지된 지역만 아니라면 이곳을 돌아다녀도 좋다. 신전의 뒤쪽으로는 가지 말아라.〕
“그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
알툰은 알려 주고 싶지 않은지 침묵했다. 쿤둘렌이 손날로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위대하신 보비네의 두 번째 뿔, 알툰이시여. 넓은 아량으로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보비네께도 감사를 표합니다.”
쿤둘렌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거창한 인사를 하였다.
세피로스는 아리스를 전서구로 임명했다. 자신을 탈것이라 지칭한 대가였다. 아리스는 쿤둘렌과 아래로 내려가 일행들에게 세피로스의 말을 전하고 일행들을 옮길 계획을 세웠다. 참고로 쿤둘렌은 낙하 속도를 늦추는 마법을 사용해서 내려갔기 때문에 아리스가 그를 힘들게 옮겨야 하는 일은 없었다.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전해 들은 시오와 라일라는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남은 일행들은 아리스와 쿤둘렌이 옮기기로 했다. 마법을 쓰면 하늘섬이 있는 곳까지 무리 없이 공간 워프 게이트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간 워프 게이트를 만드는 것은 말로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거리가 먼 공간을 단거리로 단축하는 마법이었다. 일전에 아리스가 떼로 덤벼드는 마수들을 멀리 치워 버릴 때 사용했던 마법이기도 했다.
공간 워프 게이트 마법은 쿤둘렌이 아래쪽에서 신호를 보내면 아리스가 위쪽에서 그 신호를 받아 그사이의 공간을 ‘접어서’ 통로를 만든다. 공간 전이와는 달랐다. 공간 전이는 술자의 몸을 지정된 공간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 것이지만 그 마법은 타인에게는 사용할 수 없다는 큰 단점이 있었다.
처음에는 위쪽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섣불리 게이트를 만들 수 없었지만, 안전이 확보된 지금은 위험부담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마력이 상당히 많이 드는 마법이었다. 거리가 멀면 멀수록 공간을 왜곡하는 힘이 더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리스의 마력이라면 큰 문제가 없었다. 좌표만 확실하면 아리스 혼자서도 게이트를 만들 수 있었지만 쿤둘렌이 있는데 그런 위험부담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뒤늦게 하늘섬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먼저 왔던 일행들이 그랬듯 그 위의 풍경을 보고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탄성을 내질렀다. 거기에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알툰까지 보고는 정말로 기절하기 직전까지 갔다.
알툰은 먼저 왔던 사람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일행들에게도 자신만의 평가를 했다. 리비엘로에게는 ‘서리 여신을 대신하는 눈’이라 그랬고, 파울로에게는 ‘가장 어두운 곳에 있는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자’라 그랬다. 시오는 ‘길을 여는 자’, 라일라는 ‘세계의 탐색자’라 평했다.
쿤둘렌이 리비엘로와 라일라를 대동하고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동안 물의 시원함을 한번 맛본 미레아는 부츠를 벗고 무릎에 찼던 보호대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까지 벗어 버리고 연못 안에 다리를 담갔다.
“살 것 같다.”
미레아는 연못가에 걸터앉아 다리를 담근 자세 그대로 뒤로 벌렁 누웠다. 물속에서 다리를 흔들거리며 이 꿀 같은 순간을 맛보았다. 진이 그 옆에 앉아 미레아와 똑같은 자세로 다리를 담그고 나란히 누웠다. 진은 연평균 기온이 낮은 산악 지역 출신이라 이 더위가 익숙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나비가 미레아의 코에 앉았다가 코를 씰룩거리자 다시 나풀거리며 날아갔다. 미레아는 그것을 보며 진에게 말했다.
“지상 낙원 같네요.”
“응.”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미레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언제 왔는지 알툰이 미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진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물러나는 바람에 물방울이 튀었다.
미레아는 진을 따라 일어나려 그랬지만 알툰이 고개를 내려 미레아의 코에 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서 미레아는 누운 자세에서 꼼짝 못 하고 굳었다.
가까이서 본 알툰은 아까보다 더 위압감이 넘쳤다. 저절로 일렁거리는 털과 보석 같은 눈은 그가 이 세상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해치려는 의도는 아닌지 담담한 어조로 미레아에게 말을 걸었다.
〔서리 여신의 조각.〕
“네?”
미레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알툰을 올려다보았다.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조율자의 파편.〕
“저…….”
미레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를 왜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하지만 알툰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미레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미레아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대답을 했다.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으니 부담감만 느껴졌다.
“제가 뭔데요?”
〔서리 여신의 조각.〕
미레아는 그냥 알툰의 말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애초에 보비네의 두 번째 뿔이라 불리는 신수 아니던가.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알툰은 미레아를 만족스럽게 관찰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이 세계의 변칙.〕
아리스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알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툰이 진과 미레아에게 갑자기 접근하자 그 역시 놀라 다가온 것이었다. 알툰은 미레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리스를 그렇게 칭한 이유를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우리를 이곳에 머물게 허락해 줘서 감사합니다만 만약 불쾌한 일이 있다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시정하겠습니다.”
아리스치고 상당히 정중한 어투였다.
〔그대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다.〕
알툰이 미레아와 진에게 접근한 이유는 별다른 의도는 없고 그저 호기심 때문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미레아와 아리스를 바라보는 알툰의 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알툰은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앞발을 구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우리를 싫어하는 건 아닌가 봐.”
진이 알툰이 있던 자리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아리스는 그제야 그 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레아를 짧게 바라보고는 진에게 물었다.
“알툰에게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니야?”
“우리에게도 그냥 자기 할 말만 하고 갔어.”
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됐어.”
아리스가 몸을 돌려 그들을 떠나려는데 진이 뒤에서 아리스를 불렀다. 아리스가 진을 돌아보자 그녀가 대뜸 아리스의 어깨를 잡더니 오금을 걷어차서 균형을 잃은 그를 연못으로 집어 던졌다. 그 기습에 아리스는 반항 한번 못 해 보고 풍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못에 빠졌다.
“아리스!”
심상치 않은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쪽을 바라본 율비네가 기겁하며 달려왔다.
“괜찮습니까?!”
아리스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가 헤엄을 쳐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가 연못가까지 와서 땅에 물을 토해 내며 진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뭐야?!”
진이 해사하게 웃으면서 물을 거하게 먹은 바람에 연신 기침을 하는 아리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율비네에게 말했다.
“등신.”
진의 말에 아리스를 걱정하던 율비네는 뭔가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리스는 기가 막혀서 연못 밖으로 나와 따지기 시작했다.
“아니, 다짜고짜 사람을 연못에 집어 던져 놓고, 등신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누나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게걸음으로 슬슬 멀어지며 말했다.
“나 수건 가져온다!”
“저도 같이 가시죠!”
번개같이 달려가는 진을 율비네가 따라가자 황당한 표정을 한 미레아와 살짝 열이 받은 아리스 둘만 남았다.
“대체 뭐야? 왜 저래?”
아리스가 투덜거리며 흠뻑 젖은 옷들을 바지만 남기고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미레아가 아리스의 머리부터 발끝을 훑어보며 부럽다는 듯 말했다.
“시원해서 좋겠다.”
“너도 해 볼래?”
조금 빈정거린 아리스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잠시 생각해 보던 미레아가 셔츠의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자신의 꼴도 만만치 않은 것을 잊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미레아는 반바지에 브라탑을 입은 채로 입수했다.
“너는 부끄러움이란 게 없냐!”
아리스는 미레아가 남기고 간 옷가지들을 보며 외쳤다. 다른 일에는 얼굴에 철판을 잘만 깔면서 유독 이런 일에는 내외를 했다.
“더위 앞에 장사가 없는 법이지. 홀딱 벗은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너야말로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이 상반신 탈의남아.”
오히려 미레아가 그를 변태 보듯 봤다. 미레아는 물귀신처럼 머리통만 수면 위에 내밀고 동동 떴다. 그러더니 내친김에 묶었던 머리도 푸르고 그 안에서 머리까지 감고 있었다.
“보비네의 성소에서 그런 차림으로 연못 안에서 헤엄친다고 알툰께서 노하면 어떡해?”
“아까 발장구칠 때도 괜찮았는걸. 뭐라고 할 거였으면 더 일찍 했겠지. 내가 물을 더럽게 어지럽히는 것도 아닌데.”
물고기들이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왔다 갔다 하자 미레아는 발가락을 오므렸다. 머리카락을 다 감은 미레아가 물 위에 대자로 누워 떠올랐다. 아리스가 연못가에 쭈그리고 앉아 손에 턱을 괴었다. 둘은 한동안 각자 그 자세로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