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94화 (94/257)

94화.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아리스가 고개를 쭉 빼서 안쪽을 기웃거렸다.

“영소가 이상하다거나 하는 건 못 느끼겠는데…….”

괜찮다는 소리에 흥분한 쿤둘렌이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신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일행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 뒤를 따랐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은 여러 색의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벽면과 천장에는 여러 종류의 부조물로 장식되어 있었다. 신전 중앙부로 짐작되는 곳에 다다르자 세월에 풍화되어 형태가 여기저기 손상된 보비네의 석상이 있었다.

보비네는 세 쌍의 뿔을 가지고 있었고 거대한 들소 같은 모습이었다. 한 손에는 여러 종류의 초목 가지를 쥐고 있었고 반대편 손에는 굵은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지팡이 위에는 라슈온의 모습을 따서 만든 것 같은 구체가 올라가 있었다. 5,000년 전부터 라슈온은 행성이며 그 모습은 구형이란 것을 오빈들은 알고 있었다.

보비네의 세 쌍의 뿔은 각자의 의미가 있었다. 보비네는 첫 번째 뿔로 태양과 달을 들어 올려 하늘을 만들었다. 두 번째 뿔로는 악한 것들을 몰아내고 약한 자들을 지켜 주었다. 그리고 세 번째 뿔로 비옥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 대지를 가르고 땅을 돌보는 이들의 축복을 내려 주었다.

쿤둘렌은 보비네의 석상 앞에서 공손히 예를 취하자 다른 사람들도 쿤둘렌과 보비네를 존중하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보비네의 석상 뒤로 돌아가 보자 다른 통로로 통하는 부분은 천장이 무너져 내려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그들은 더 전진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다시 지나왔던 길을 따라 나가려는데 선두에 있던 세피로스가 멈춰 섰다. 천장에 남아 있는 성화의 흔적을 보려고 고개를 꺾고 있던 미레아가 그의 등에 부닥쳤다.

“앗, 죄송해요.”

미레아가 얼른 세피로스의 등에서 한 발 떨어지면서 뒤늦게 다른 일행들을 보니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진은 놀란 얼굴로 반쯤 입을 벌리고 있었고 아리스와 율비네가 각자의 무기에 손을 얹는 것을 쿤둘렌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미레아는 세피로스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미레아는 사람들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을 보고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두 쌍의 뿔이 돋은 푸른 짐승이 우아하게 서 있었다. 짐승의 눈은 보석같이 빛났고 긴 털은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저절로 넘실거렸다. 머리 양옆과 정수리에 돋은 네 개의 뿔은 둥글게 휜 모양으로 위를 향해 솟아 있었다. 덩치는 커다란 순록 같아 짐승이 그들을 내려보는 시선에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짐승의 정체를 모르니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세피로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실례하였소.”

그러더니 고개를 숙였다.

“부디 노여워 마시길 바라오.”

짐승은 세피로스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살짝 까닥거렸다.

〔이곳의 평화를 깨트리는 자 누구인가.〕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세피로스를 제외한 사람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저 짐승이 마이련어를 하는데 내 귀가 잘못되었나?”

진이 미레아에게 마이련어로 속삭였다. 그 말에 미레아는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제 귀에는 로아메나 동부 공통어로 들려요.”

“음성으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으로 직접 의사가 흘러들어 오는 것이라 언어의 형태로 묻는 것이 아니야.”

세피로스가 짐승에게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일행들에게 말하였다. 그는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공포심이 서린 얼굴은 아니었다. 세피로스는 침착한 목소리로 짐승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내 이름은 세피로스.”

그러더니 자신의 이름 뒤에 수식어를 하나 붙였다.

“나는 별에서 내린 자 중 하나.”

세피로스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다들 처음 들어 봤다. 그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짐승은 한동안 고요하게 세피로스를 바라보았다. 세피로스를 제외한 사람들은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짐승이 다시 말을 했다.

〔별에서 내린 자, 세피로스. 나는 위대하신 보비네의 두 번째 뿔, 알툰.〕

그 말에 쿤둘렌이 펄쩍 뛰었다.

“신화 속에서만 존재하던 알툰입니다.”

알툰은 보비네의 두 번째 뿔이 화한 신수였다. 쿤둘렌은 옛 자료에 알툰이 묘사된 형태를 알고 있지만, 설마하니 알툰이 자신들의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때문에 짐승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졸도할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보비네가 땅으로 숨어들면서 알툰 역시 함께 사라졌다 믿고 있었다. 그런 알툰이 이 공간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세피로스와 쿤둘렌을 제외한 이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실질적인 형태를 갖춘 것이 아닌 영소의 잔재지만 그가 이 공간에 끼치는 영향력은 진짜다.”

세피로스가 빠르게 속삭였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게 해서 좋을 게 없겠지.”

자신을 알툰이라 소개한 짐승이 쿤둘렌을 보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쿤둘렌은 자신의 손날로 이마를 두 번 툭툭 치는 오빈식 인사를 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비네의 백성, 쿤둘렌입니다.”

〔위대한 보비네의 아들 쿤둘렌. 이곳은 그대에게는 허락된 공간이다.〕

그러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고요한 시선을 보냈다. 쿤둘렌이 바로 옆에 있던 아리스를 팔꿈치로 툭 쳤다. 자기소개를 하란 뜻이었다. 아리스는 잠시 본명과 가명 중 어느 쪽을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편한 대로 말했다.

“아리스 클라인셔드.”

그리고 자신 역시 쿤둘렌이나 세피로스처럼 수식어라도 붙여야 하나 싶어 덧붙였다.

“이명은 흑익.”

〔서리 여신의 흐름에 속하지 않은 자.〕

아리스를 보는 알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대지에 암흑을 몰고 온 이 세계의 변칙.〕

알툰의 말에 아리스는 양심이 찔려 항변을 하지 못했다. 알툰의 태도를 보아하니 자신을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알툰은 이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대에 관한 판단을 유보하겠다.〕

아리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보라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자신을 어떻게 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제 다른 사람들의 자기소개 시간이었지만 다른 자들은 이름 뒤에 붙일 멋들어진 무언가 따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설령 있다 해도 자기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류진입니다. 음…… 위대한 알툰, 잘 부탁드립니다.”

〔약자들을 수호하는 자. 선한 이여, 그대를 신뢰하겠다.〕

“율비네 엘레시드입니다. 보비네의 두 번째 뿔이신 알툰께 경의를 표합니다.”

〔혼돈 속에서 신념을 관철하는 자. 그대의 올곧은 걸음의 앞길에 빛이 있기를.〕

마지막으로 미레아는 오빈식 인사를 정중하게 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레아 제인스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알툰.”

알툰은 미레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 여신의 조각.〕

그 말에 세피로스의 눈가가 살짝 떨렸고 쿤둘렌이 가벼운 동요를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불린 당사자는 아무것도 눈치 못 채고 의미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알툰을 바라보았다.

〔그대에게 서리 여신에게 하듯 예를 다하겠다.〕

알툰은 그리 말하며 미레아에게 살짝 앞다리까지 굽히며 예를 취했다. 미레아는 당황해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왜, 왜 나한테만?”

“좋은 거다. 가만히 있어라.”

세피로스의 말에 미레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알툰에게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몸을 곧게 세운 알툰이 물었다.

〔이 공간에는 무슨 일인가.〕

정신으로 바로 의사를 보내어 소통하는 알툰의 의사소통 방식은 몹시 생소했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의 형태는 고저가 없었고 그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그래서 알툰의 기분이 어떤지 추측하기 힘들었다.

“지나다가 호기심이 일어 들어왔소. 모르고 그랬으니 사과드리오.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세피로스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알툰은 쿤둘렌을 보며 말했다.

〔다들 지쳐 있군.〕

“그렇습니다만 원치 않으신다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위대하신 보비네의 신전은 선한 자들을 위해 항상 열려 있다.〕

알툰의 눈매가 가늘어진 것이 꼭 눈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쉬었다 가도 좋다.〕

그 관대한 처사에 쿤둘렌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대신 조건이 있다.〕

그러면 그렇지, 공짜가 아니었다.

〔작은 부탁이다. 이 근방의 위대하신 보비네의 성소 중 한 곳은 아직 마수로 들어차 있다. 그곳은 보비네의 영소가 거의 없어서 내가 힘을 발할 수 없는 땅이다. 때문에 부식이 진행되어 마수들이 떠난다고 해도 나는 땅을 살릴 수 없다. 완전한 부식이 진행되기 전에 그 땅에서 마수를 쫓아 주면 허락하겠다.〕

뜻밖의 부탁에 일행들은 세피로스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직접 나서고 싶지만 나는 이곳에 묶인 알툰의 사념. 위대하신 보비네의 영소는 나의 힘을 강하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 국한된 힘.〕

세피로스는 혼자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 땅을 정화하러 왔소. 그대가 원하는 일은 우리가 하려는 일과 같은 듯하니 마수를 몰아내 주고 땅을 정화하면 되겠소?”

〔땅을 정화하면 서리 여신의 영소가 가득 차겠지.〕

알툰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되면 보비네의 영소는 지하로 숨을 테니 나는 또 잠들게 된다.〕

그래서 싫다는 의미인가 싶었지만 알툰은 바람을 따라 잎사귀를 살랑거리고 있는 들풀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의 힘이 아니라 해도 이 공간은 다시 생명으로 충만하겠지…… 나에게 휴식이 허락되는군.〕

여전히 어투는 담담했지만 그의 얼굴은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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