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93화 (93/257)

<93화>

라슈온에는 크게 세 개의 대륙이 있다. 하나가 루아드 제국과 세로킨 공화국이 있는 로아메나 대륙. 그리고 아리스의 외가가 있는 마이련과 카스카디아, 시오의 출생지인 히루카가 속해 있는 아이나 대륙. 거주민 대부분이 오빈들로 구성된 리프칸 대륙. 이 세 대륙 사이에는 넓은 바다가 자리 잡고 있었고 비공정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왕래가 잦지 않았었다.

지금의 오빈 족의 국가들은 리프칸 대륙에 주로 모여 있었고 과거 아이나 대륙에 진출한 일부를 제외하면 로아메나 대륙에는 오빈들의 국가가 없었다. 사실 과거 오빈들은 유목 생활을 주로 했던지라 여기저기 옮겨 다녀 국가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그래도 그들은 주로 리프칸 대륙에서 생활하였고 그들만의 문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미레아가 알고 있던 일반 상식선에서 루아드 제국 내에 오빈 문명의 유적지가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답은 세피로스의 입에서 나왔다.

“과거에 오빈들은 리프칸 대륙뿐만이 아니고 로아메나 대륙과 아이나 대륙 전반에 걸쳐 생활했었어. 지금처럼 리프칸 대륙으로 밀려난 것은 3,000년 전이야.”

머릿속에서 짧은 계산을 마친 미레아가 말했다.

“테나력이 시작할 때 즈음이네요.”

“그도 그럴 게 테나력은 인간들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면서 오빈들을 몰아내고 만들어진 연호니까. 원래 그 이전까지 오빈들이 쓰던 연호인 귤람력은 5,000년이 넘었어.”

“그 말대로입니다. 그러니 이 유적은 3,0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졌단 의미죠.”

그러니 쿤둘렌이 흥분할 만한 대발견이었다. 아리스가 알기로도 지금까지 루아드 제국에서 오빈의 고대 유적이 출토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루아드 제국의 일이라면 이것저것 자세히 알고 있는 아리스에게는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이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쿤둘렌이 발견한 대리석 조각 중 하나는 오빈들의 창조주인 보비네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테나력 이후에 나온 성서에는 서리 여신에 관한 이야기가 함께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 유적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서리 여신이 인간 중심의 여신이라 그래도 다른 신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종교는 서리 여신을 따르는 서리교이기는 하지만 다른 종교들도 다양하게 퍼져 있었다.

다른 신들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인간들과 오빈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신화 중에 이런 내용도 있다.

원래 라슈온은 보비네가 다스리던 땅이었다. 바다와 대지, 너른 하늘에는 보비네의 영소가 흘러넘쳤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빛나는 불길이 비처럼 내리고 보비네는 영소를 숨기고 그것을 피해 지하로 숨어 들어갔다.

땅속에서 보비네가 흘린 눈물과 공포에서 태어난 서리 여신은 숨어 버린 보비네를 대신하여 불길이 번진 라슈온을 돌보기 시작했다. 보비네가 숨어 버리자 오빈들은 리프칸 대륙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불길 때문에 문명을 모두 잃은 인간들을 서리 여신이 불쌍히 여겼고 그들에게 자신의 영소와 많은 은총을 내려 주었다. 그 결과 인간들은 오빈만큼 번성할 수 있었다.

서리 여신이 라슈온을 완전한 지상 낙원으로 만들면 은둔해 있던 보비네가 이 땅에 재림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보비네를 모시는 사제들이 쓴 성서와 서리 교단의 성서 양쪽 모두 언급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테나력이 시작된 이후에 전해진 이야기였다. 지금은 그때를 기억하는 세대의 용들도 전부 명을 다해 죽고 없었다. 그러니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을 뿐이었다. 어느 정도 주변 탐색을 끝낸 미레아가 물었다.

“이런 유적이 갑자기 왜 나온 거지?”

“네가 들어갔었던 부식 지역에는 고대의 신수들이 나타났었지.”

세피로스가 골똘히 생각하며 묻자 미레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기서 만난 라우노…… 니콜라우스의 말대로라면 그랬어요. 라슈온을 관장하고 있던 여신의 영소가 사라지면서 지하에 숨어 있던 보비네의 영소가 움직인 까닭이라고요.”

“그렇다면 이건 그런 현상의 연장선이지 않을까?”

과거 보비네의 신전이었다면 수천 년 전에는 보비네의 영소가 다른 지역에 비해 이 일대에 가득했을 것이었다. 서리 여신의 영소가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보비네의 영소가 영향력이 커져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 수 있다는 게 세피로스의 추측이었다. 매번 땅에서만 올려다봤을 뿐 실제로 접근한 것은 처음인 율비네 역시 이 사실이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마이련에서 제가 본 하늘섬들도 이것과 비슷한 것일까요?”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오빈의 역사를 보면 보비네의 신전이 마이련에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관련 유물이 마이련 주변국에서 출토된 적이 있지요. 그리고 그런 신전들에 남아 있던 보비네 신의 영소가 중력 법칙을 변형시켜 이러한 하늘섬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부식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들의 원인이 보비네의 오래된 영소들 때문이라는 주장은 일리 있어 보였다.

“다른 하늘섬에도 유적이 있을까요?”

쿤둘렌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추측보다는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빨랐다. 쿤둘렌의 부탁으로 세피로스는 다시 용으로 변해 사람들을 싣고 바로 옆에 있는 하늘섬으로 날아갔다.

그곳은 처음 내렸던 곳보다 위쪽에 있었고 크기도 더 컸는데 그 상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사막의 신비로운 오아시스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었다.

대리석 파편이 여기저기 두서없이 흩어져 있던 앞선 공간과 달리 이곳은 신전 건물의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비록 많이 파손되기는 했어도 분수에서는 맑은 물이 샘솟고 있었다.

물줄기는 도랑을 따라 인공 연못으로 흘러갔다. 인공 연못은 제법 규모가 컸는데 물이 정말로 깨끗해서 바닥까지 훤히 비쳐 보였고 놀랍게도 그 주변으로 여러 종류의 풀들과 들꽃들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나비 몇 마리가 분주하게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꿀을 먹거나 풀잎에 앉아 쉬고 있었다. 따듯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사람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이곳만 마치 다른 세상 같군요.”

율비네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이것 봐! 물고기도 있어!”

미레아가 연못가에 쭈그리고 앉아 말했다. 그 말대로 송사리처럼 생긴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수생식물 틈바구니를 숨바꼭질하듯 왔다 갔다 하며 노니는 모습을 보니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깨끗한 물인가요?”

아리스가 미심쩍게 바라보자 세피로스가 물에 손가락 끝을 담갔다가 그대로 혀에 찍어 먹어 봤다. 입안에서 시원하게 퍼지는 감각에 세피로스가 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 정도면 식수로 쓸 수 있겠는걸.”

그 말이 끝나자마자 미레아는 연못 물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한동안 물속에서 공기 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왔고 사람들은 그 용감한 행동력에 감탄했다. 미레아가 숨을 토해 내며 얼굴을 들자 햇볕에 익어 벌겋게 익었던 얼굴이 어느 정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시원해!”

좀 지저분한 이야기였지만 미레아는 부식 지역에 들어온 이틀 동안 땀만 흘리고 깨끗한 물로 제대로 씻지 못했다. 물론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마법으로 만들 수야 있었다. 하지만 목욕을 위한 본격적인 설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세수만 하는 정도였다.

“세상에…… 여긴 대체 뭐지?”

진이 마이련어로 중얼거렸다. 전부 흑백인 세계에서 이곳만 유채색이었다. 피부를 태울 것 같던 따가운 햇볕도 이곳에서는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쿤둘렌은 먼저 분수대를 살펴보았다. 몇천 년이나 지난 유적인데도 분수가 정상 작동하는 것이 놀라웠다.

“일반적인 기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 마석이라도 설치한 걸까요?”

율비네의 의문에 아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마석으로 증폭된 마력은 아닌 것 같아.”

“자체적인 마법 술식일 거다. 아마 보비네의 영소로 작동하게끔 되어 있겠지.”

세피로스의 말에 쿤둘렌이 또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다면 그 말도 사실이겠군요! 오빈들은 보비네가 땅속으로 숨어 들어가기 전까지 마법을 쓰기 위해 마석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가설 말입니다!”

“그런 학설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출토된 오빈들의 고대 유적을 보면 마석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과거의 어느 기점부터입니다. 하지만 그전에도 마법을 사용했다는 흔적은 꾸준히 있었기 때문에 마석의 흔적이 없는 먼 과거에는 대체 어떤 식으로 마법을 썼는지 의문이었죠.”

“마석을 쓸 필요가 없던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아리스가 데르카이드이기 때문에 낼 수 있는 역발상이었다.

“제가 서리 여신의 제약에 거의 묶이지 않아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처럼요.”

“오빈들의 전설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오늘날 같은 수준의 과학 기술과 마도 공학이 발달하기 전에 온전히 마법 기술만 발달한 시기가 있었고 당시의 마법 문명은 지금과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현재는 잃어버린 기술이 되었습니다만…… 그런 이야기들로 추론해 봤을 때 지금 오빈들의 마력은 인간보다 조금 더 많은 정도지만 보비네의 영소가 지배하고 있을 땐 영소를 마력으로 전환하는 게 더 쉬웠을 수 있겠군요. 서리 여신의 영소와는 달리 보비네의 영소가 오빈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다면 가능하겠지요. 이 세계에 흐르는 서리 여신의 영소는 상당히 고정적이라 인간과 오빈 모두가 영소를 마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하했을 겁니다.”

쿤둘렌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방도가 없으니…….”

“저쪽에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반대편으로 돌아가 본 율비네가 돌아오면서 자신이 본 것을 알렸다.

“무너질 염려는 없을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행들은 율비네를 따라 조심스럽게 신전에 접근했다. 많이 무너져 내렸지만 아치 형태를 유지 중인 하얀 대리석 입구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석재 틈바구니로 푸른 이끼가 끼거나 잡초들이 돋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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