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하늘섬?”
“정식 명칭인 것은 아니고 제가 임의로 붙인 이름입니다. 부식 지역에는 가끔 저렇게 공중에 떠 있는 대지가 나타나는데 저는 하늘섬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중력 법칙의 이상으로 발생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자세한 원인은 저도 잘 모릅니다. 애초에 접근할 수 있어야지요. 비행정을 함부로 띄울 수 없어서 땅에서 관측한 것이 전부입니다.”
“오, 정말 신기한데?”
그러더니 미레아는 달리는 트럭 지붕에 거꾸로 매달려 창문을 콩콩 두드렸다.
“선배! 저기 신기한 게 있어!”
“무서우니까 그렇게 불쑥불쑥 몸 좀 내밀지 마.”
시오가 창문을 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뭔데 그래?”
리비엘로가 시오의 옆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저기 하늘에 땅이 떠 있다? 신기하지?”
“무슨 말도 안 되는…….”
피식 비웃던 시오가 하늘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음…… 쿤둘렌. 이건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리비엘로의 말에 쿤둘렌이 안경을 쓰고 양 눈을 한껏 찌푸리더니 그들이 손가락질한 것을 보았다.
“조사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군요.”
그는 운전석 쪽으로 난 작은 창을 옆으로 밀어서 열었다. 차를 세우라는 말에 운전 중이던 라일라가 바로 정차시켰다. 일행들은 황야 한복판에 내려서 미레아가 발견한 것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저런 건 처음 보는걸.”
“조사해 볼 수 있을까요?”
쿤둘렌이 세피로스에게 부탁했다.
“부식 지역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일리 있는 의견이긴 한데…….”
세피로스가 고민하는 것을 라일라가 대신 말했다.
“저기까지 어떻게 올라가죠?”
그러자 파울로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아리스와 세피로스를 번갈아 가리켰다. 세피로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불쾌하군.”
“용으로 변신해서 트럭을 들고 날면 되잖아요. 뭐가 어렵습니까? 그게 싫으면 등에 몇 명 태우면 될 것 같은데요.”
아리스가 파울로의 의견을 거들며 나서자 세피로스가 그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를 짐꾼이나 탈것으로 여기는 건 네놈들이 처음이다.”
“영광입니다.”
아리스가 과장된 몸짓으로 꾸벅 절을 했다. 라일라는 잠시 고민하다 의견을 내었다.
“트럭을 들어 올리는 건 좀 위험해 보여요. 튼튼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차체가 분리될 수 있어요.”
결국, 탈것이 되었다는 소리에 세피로스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미레아가 옆에서 조금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살다 보니 세피로스의 등에 올라타 보는 날도 오네.”
“그 이상 말하면 3개월 감봉이다.”
미레아는 바로 까불거리는 것을 그만두고 찌그러졌다.
“그럼, 여기 남을 사람과 올라가서 조사해 볼 사람으로 나누어 보자.”
위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비전투원인 리비엘로와 라일라는 아래에 남기로 했다. 일전에 말한 대로 아리스가 결계를 치면 당분간 아래쪽의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세피로스와 아리스, 쿤둘렌은 당연히 조사팀이었다. 아리스가 가니 진과 율비네가 따라붙었다. 그것이 아니라 해도 율비네는 이런 현상을 몇 번 목격한 적도 있으니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을 수 있었다.
하극상인 것 같지만 파울로는 마음속으로 세피로스를 부대장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대장 자리를 뺏을 생각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부대장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파울로는 두 개의 사령탑이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 각자 한 팀씩 맡는 것이 효율적이라 여겼다. 그래서 아래에 남기로 했다.
시오는 무조건 라일라 옆이었다. 이쯤 되면 시오가 라일라를 좋아한다는 말을 직접 하지 않아도 합류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진과 율비네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이 전부 알 수밖에 없었다! 파울로와 미레아는 헤실거리면서 라일라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시오를 한심한 얼굴로 바라봐 주었다.
지상과 공중에서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부식 지역 안에서는 전파가 터지지 않았다. 이쯤 되면 통신기의 존재 의의는 구색 갖추기에 불과했다.
미레아는 가고 싶은 마음 반, 그냥 남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아리스의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 위가 미친 듯이 궁금했다. 그리고 세피로스의 등에 탈 수 있다는 유혹도 제법 구미가 당겼다.
세피로스가 몇 걸음 물러나 몸을 털자 이마의 용주가 빛나고 체세포 조직이 활성화되며 골격이 변했다. 목은 길어지고 팔다리가 쭉쭉 뻗어나며 꼬리도 생겼다.
마침내 완전한 용의 모습으로 변한 세피로스는 우아하게 반짝이는 은색 비늘이 몸을 뒤덮고 피막으로 된 날개를 가졌으며 서 있을 때의 체고는 10m인 거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용이 아닌 사람들 기준으로 봤을 때는 어마어마한 덩치였지만 사실 세피로스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다. 300살이면 아직 성장기였기 때문에 앞으로 여기서 더 커질 예정이었다.
세피로스는 몸을 굽히고 날개를 내려 다른 사람들이 올라타기 쉽게 자세를 잡았다.
“실례합니다.”
진이 제일 앞쪽에 얼른 올라탔다. 진이 세피로스의 어깻죽지 부근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자 미레아는 조사팀을 쫓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건 50년 치 얘깃거리였다. 이런 기회를 마다할 수 없었다. 미레아는 얼른 진의 뒤에 올라탔고 연이어 다른 사람들도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아리스가 오르려 하자 세피로스가 몸을 홱 일으켜 버렸다.
“넌 알아서 올라가.”
“자리 아직 남았잖아요?”
“무거워.”
그 덩치에 고작 네 사람을 태우고 무겁다는 변명 따위를 해 대는 세피로스에게 아리스는 더 따지지 않고 날개를 꺼냈다.
“그리고 나한테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네가 잡아.”
세피로스의 말이 마음에 걸려 마냥 신나 했던 사람들은 서로 뭉쳤다. 세피로스가 그 커다란 날개를 푸드덕거리자 돌풍이 몰아쳤다.
그가 몸을 살짝 굽혔다가 뛰어오르자 등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시야가 확 높아졌다. 세피로스의 비늘이 매끈한 데다 안장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에 등에 올라탄 사람들은 세피로스가 날갯짓할 때마다 출렁거리는 미끈한 몸에서 잡을 곳이 부족했다.
거기에 상공으로 갈수록 강풍이 몰아쳐 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세피로스가 괜히 떨어지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고 언질을 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정적인 운전과 안장을 요구하면 기분 상한 세피로스가 전부 내동댕이칠 것 같아서 항의할 수 없었다.
근접해서 본 하늘섬은 장관이었다. 그저 바윗덩어리가 떠 있는 줄 알았는데 암석들이 울퉁불퉁한 하부에 비하면 위쪽은 평지였다. 부식 지역의 땅답게 시커멓게 죽은 흙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위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하얀 바위들이 있었다.
세피로스는 적당한 평지에 내려앉았고 아리스가 뒤이어 착지했다. 육중한 몸이 내려앉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섬은 고도가 낮아지거나 움직임이 있다거나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리자 세피로스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하였다.
“올라올 때와는 달리 생각보다 바람이 잔잔하군요.”
율비네가 신기하단 듯 중얼거렸다. 흙을 살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진이 하얀 바위 위에 폴짝 올라가 발을 굴러 보았다.
“이거, 여기 아니다. 다른 바위.”
“원래 이 지역의 바위가 아니고 다른 곳에서 옮겨 온 석재라는 뜻이야?”
아리스가 진의 말을 적당히 해석해 주자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언가 건물이라도 있었나?”
“최근 것이 아니군요.”
몇 발치 떨어진 곳에서 쿤둘렌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것의 전체적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깎아내린 형태가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이 분명했고 대리석으로 된 건축물로 추정되었다.
호기심이 일은 일행들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대리석들을 각자 살폈다. 대리석에는 정교하며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상당히 큰 석재들이었기 때문에 건축물의 원래 규모가 제법 컸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림이 있어요.”
문양만 새겨진 것이 아니고 여러 동물과 식물을 조각한 대리석도 있었다. 쿤둘렌이 다가가 흙먼지를 손으로 문질러 쓸어 버리자 더 뚜렷한 형상이 나왔다. 그것을 본 쿤둘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은 과거 오빈 문명의 유적이군요!”
그렇게 외친 쿤둘렌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콧김을 흥흥 뿜었다. 평소의 점잖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현재의 그는 마법사이기도 했지만, 원래는 오빈의 신학을 배우고 연구했었다. 마법은 그 과정에서 함께 연구한 것이었다. 덕분에 다른 오빈들보다 유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 때문에 이 유적지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쿤둘렌은 여기저기 흩어진 대리석 유물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그것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이곳은 과거 보비네의 신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쿤둘렌은 안경을 꺼내 써서 대리석에 조각된 글자들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입으로 발음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이 석재에는 고대어로 된 성서의 구절이 적혀 있군요.”
보비네는 오빈들이 자신들의 창조주라 여기는 신이었다. 인간들에게 서리 여신이 있다면 오빈들에게는 보비네가 있었다.
보비네는 서리 여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라슈온을 다스렸으며 자신을 닮은 오빈을 만들어 내었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에게도 라슈온에서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준 신이었다.
쿤둘렌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제일 좋아하는 분야의 엄청난 유적지가 나오자 누가 물어보지도 않아도 신이 나서 혼자 설명을 줄줄 읊어 대었다.
“대단하군요. 일부만 남았는데도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
미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루아드 제국에서 오빈들의 유적지가 나올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