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세피로스와 류진, 율비네가 북쪽에서 내려오며 본 광경은 처참했다. 남동쪽 지역은 그나마 마수를 막아 내며 제 기능을 하는 도시들이 남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마수에 대응할 병력이 부족했던 북쪽의 부식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라일라가 연필 끝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지도 위에 표시된 지역들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쿤둘렌과 계산을 해 보았는데요. 부식 지역 안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면 외곽을 따라 정화하던 작업 속도의 3배 이상은 더 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와요.”
그러더니 사족을 덧붙였다.
“물론 목숨은 보장 못 합니다.”
“하지만 니콜라우스가 신경 쓰여. 난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단축하고 싶다.”
그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용주가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나.
“아리스가 있으니 삼 일 정도는 괜찮을 걸세.”
“제가 뭘 해야 하는데요?”
“부식 지역은 데르카이드에게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다. 부식 지역 안에서는 데르카이드가 신이다.”
세피로스는 라우노가 했던 말을 상기시켜 주었다.
“중간중간에 네 마력으로 채운 결계를 치도록 하지. 그렇게 되면 결계가 쳐진 범위는 정상적인 영소의 흐름을 가질 수 있으니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
“칠 수야 있는데 결계를 유지하는 저는 어떡해요? 삼 일 내내 마력을 써야 하니 힘들단 말입니다.”
그 말에 세피로스가 아리스를 한심하단 얼굴로 바라보았다.
“누가 그렇게 마력만 퍼붓는 무식한 방법을 쓰라 그랬나? 마력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쿤둘렌에게 마법을 배우지 않았나. 술식만 잘 짜서 돌리면 몸에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네 마력으로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어.”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건데요?”
“당초 계획이 변경되었다 보니 추가로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모레나 돼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쿤둘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울로가 들어왔다.
“말씀하셨던 거 사 왔는데요.”
그 말에 미레아와 시오, 진이 창문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숙소 건물 벽 쪽으로 엄청나게 큰 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생각보다 평범한데.”
“그럼 이런 곳에서 트럭을 구해 봤자 얼마나 대단한 게 있겠어.”
시오가 김샌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자 라일라가 두 눈을 빛내며 양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니까.”
시들거리던 라일라의 얼굴에 광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삼 일 안에 개조해야지.”
누가 시키기도 전에 라일라는 여러 공구를 트럭 앞에 나열해 놓고 마도 기구와 기계 장치들을 트럭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쿤둘렌과 진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육체노동에는 세피로스를 제외한 전원이 동참하긴 했지만, 설비를 담당한 라일라는 사흘 동안 철야 작업을 해서 할 수 있는 만큼 트럭을 개조해 냈다.
외양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결과물은 그 스펙이 상당히 어마어마했다. 우선 트럭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운전과 기계장치들을 조작할 수 있는 운전석, 10명이나 되는 인원을 태울 좌석칸, 그리고 짐칸.
외벽에는 충격 흡수 마법과 여러 종류의 오염에 대응한 보호 마법 술식을 설치했다. 그 덩치에 시속 15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고 여러 화기를 내장하고 있어서 트럭 안에서 버튼만 하나 누르면 폭탄이 발사되기도 했다.
중형 마수를 그대로 들이박아도 마수가 죽지 트럭은 멀쩡할 것이다. 마치 움직이는 작은 요새 같았다. 짐칸에는 그들이 타고 다니던 지프 두 대를 수납할 수 있었고 추가로 기동력을 위해 바이크를 구매하여 같이 실었다. 물론, 이 인원이 다 안락하게 앉을 좌석도 충분했다.
“이건 무기 역사에 남을 만한 작품 아니냐.”
부족한 자원 속에서 이 정도까지 개량한 그 능력에 감탄하며 아리스가 그렇게 평가하자 라일라의 사기가 한껏 올라갔다.
출발하자는 파울로의 명령대로 미레아는 신나서 트럭에 올라타다 아리스와 몸이 부닥쳤다. 하지만 그들은 사과를 따로 주고받지 않고 상대방을 외면했다. 그렇다. 그들은 아직도 화해는커녕 대화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는 좌석은 서로 끝에서 끝자리에 각각 앉았다.
트럭의 엔진이 부릉부릉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리스 옆에 앉은 율비네가 혀를 끌끌 찼다.
등신 같은 우리 주군.
서로의 속 사정이야 어떻든 파울로의 신호에 따라 라일라가 운전대를 잡은 움직이는 요새가 출발했다.
제9장 하늘섬과 보비네의 신전
“더워…….”
미레아는 선글라스 사이로 흐르는 땀을 연신 훔치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아직 5월이잖아…… 왜 이렇게 더워…….”
하늘 높게 뜬 태양이 쨍쨍했다. 미레아는 지금 트럭 지붕 위에 깔개를 깔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붕에는 작은 울타리를 둘러놔서 굴러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그래서 마음껏 늘어져 있는데 태양 빛을 온몸으로 받으니 제법 더웠다.
참다못해 울타리에 우산을 고정해 그늘을 만들었지만 공기 자체가 뜨거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가 록산의 해변이었으면 운치라도 있지 사방을 둘러봐도 재미없도록 시커먼 광경뿐이었다.
“클라인의 여름은 다른 곳보다 빨리 찾아오는 편이라 5월만 되어도 기온이 상당히 올라갑니다. 하지만 비가 자주 내려 기온이 떨어지는 날도 많으니 위안 삼으시길 바랍니다.”
미레아의 옆에서 함께 보초를 서던 율비네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지만 그 말은 그렇게까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더위 속에서 움직이는 것과 빗속에서 움직이는 것 중 어느 쪽을 택할 거냐 물으면 난 둘 다 싫어요.”
“그렇게 더우면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 냉방기를 틀어 놨으니 여기보단 나을 겁니다.”
“며칠 내내 밀폐된 상자 같은 곳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숨 막혀 죽을 것 같거든요.”
그게 문제였다. 답답해서 창문을 열자니 냉방기로 식힌 공기가 전부 빠져나가고 안에 들어가 있자니 좁은 공간에 다른 사람들이랑 몸을 맞대고 모여 있는 게 진절머리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보초를 자처하고 나온 것인데 이건 이것대로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미레아와 율비네는 며칠 사이 많이 친해졌다. 율비네의 딱딱한 군대식 말투 때문에 초반에는 상당히 거리감을 느꼈으나 알고 보니 성격은 제법 융통성이 있었고 다정했다.
미레아보다 연상이기는 했지만, 율비네는 모두에게 존대하는 쪽을 택했다. 아리스를 다소 숭배하는 경향이 없지는 않았어도 아닌 건 아니라는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어제는 대뜸 아리스에게 등신 같다고 말해 당사자는 물론 주변 사람들마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부식 지역을 들락거리며 정화기를 설치한 지 벌써 2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처음 걱정과는 달리 일행들은 그럭저럭 살아 있었다.
세피로스와 라일라의 말대로 부식 지역 안쪽까지 정화기를 설치했더니 암흑 지대를 한 번에 정화할 수 있는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시간적 여유가 생긴 그들은 물자를 바리바리 싸 들고 부식 지역으로 잽싸게 달려가서 정화기를 설치하고 하루나 이틀 안에 다시 잽싸게 나와 인근 도시나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아직도 마검의 기운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벌써 이 일을 시작한 지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난 시점이었다. 다들 슬슬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오히려 세피로스는 느긋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리스와 미레아는 그사이에도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일적으로 정말 꼭 필요한 대화만 몇 마디 했을 뿐 미레아는 여전히 그에게 냉랭한 기운을 뿜었다. 미레아는 아직도 쥬드의 일을 마음에 품고 있었고 그 때문에 기분이 저조한 그녀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 부식 지역은 안에 들어온 지 이틀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직은 별다른 이상 징조 없이 수월하게 부식 정화기를 설치하면서 달려왔다.
율비네와 진의 말에 따르면 부식 지역이라고 해서 마냥 이상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 했다. 비록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땅이었지만 어느 지역은 지나치게 평온했고, 또 어느 지역은 이상 현상들이 심하게 나타나 접근 자체가 위험한 때도 있다고 그랬다.
덧붙여 미레아와 아리스가 일전에 보았던 고대의 신수라는 괴물 같은 것들이 돌아다니는 것 역시 모든 지역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땅이었다. 바람도 불지 않으니 대기 현상도 멈추었다. 구름도 없었고 물은 더더욱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하늘은 푸르렀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태양만 떠 있을 뿐이었다.
이곳은 평온해도 지나치게 평온했다. 하지만 자연의 순환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니 이런 식의 평온은 좋은 것이 아니었다. 미레아가 처음 부식 지역 안으로 들어갔던 날 본 괴물 같은 것들은커녕 벌레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허벌판만 있을 뿐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완전히 죽은 땅이었다.
이런 상태면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두세 군데를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리스와 리비엘로의 부담이 지나치게 커졌다. 처음부터 너무 힘을 써 버리면 아리스는 몰라도 리비엘로가 버틸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조용하다 보면 긴장이 풀려 사고가 날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피곤해도 긴장을 풀지 않고 사방을 주지했다.
“음?”
대자로 누워 있던 미레아가 선글라스를 벗어서 눈을 비비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가 또 벗더니 하늘의 한곳을 지긋이 응시했다.
“내 눈이 잘못됐나, 하늘에 이상한 게 떠 있는 것 같아요.”
미레아의 손가락 끝에는 커다란 바위 같은 것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것을 본 율비네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하늘섬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