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90화 (90/257)

90화.

“그나저나 신이라……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하군요. 대체 그런 게 왜 되고 싶은 걸까요?”

파울로의 말에 세피로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일종의 욕망 같은 거지.”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이 이상은 알 필요 없다.”

그러고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일행들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의문이 떠올랐지만 세피로스는 대답할 의사가 없는 듯했다. 세피로스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생각에 잠기자 일행들의 표정 역시 덩달아 가라앉았다. 보다 못한 세피로스는 다시 밝은 얼굴로 손뼉을 짝 쳤다.

“이보다 더 자세한 내막은 설명해 줄 수 없지만,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것저것 사정이 얽혀서 마검 페니드란이 니콜라우스에게 들어가 봤자 내게 좋을 건 없다, 이 말씀이다.”

“그 걱정이라면 마세요.”

다른 건 몰라도 아리스는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페니드란은 제가 아니면 아무도 손 못 대요.”

마검 페니드란은 마지막에 아리스가 죽기 직전까지 마력을 짜내서 넘겨주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자아를 가진 검이었다. 페니드란은 주인에게 충성심이 강한 검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자신의 임무를 자랑스럽게 여긴 검이었다.

본인의 일을 방해받거나 임무를 지속해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판단한다면 최우선 목표인 마수의 섬멸을 시행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리스 이외의 사람이 다른 목적을 갖고 억지로 마검 페니드란에 접근하려 한다면 페니드란은 마수와 함께 자멸해 클라인이란 지역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는 쪽을 택할 것이다.

“든든하군.”

세피로스가 아리스에게 짝짝짝 손뼉을 쳐 주었다.

“니콜라우스는 기회가 있다면 우리를 방해할 거야.”

“그런데 저는 왜 도와주었을까요?”

미레아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묻자 세피로스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아마도 네가 케이드의 딸이라 그럴 걸.”

뜻밖의 대답에 미레아가 눈썹을 찡그렸다.

“참고로 케이드도 니콜라우스를 개자식이라고 불렀어.”

“니콜라우스가 아버지랑 아는 사이였어요?”

하지만 미레아가 알고 있던 음모론의 출처가 케이드인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한 사실은 아니었다.

“케이드도 니콜라우스와 과거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많았지. 하지만 그가 직접 만난 것은 세 번밖에 안 돼.”

그래 놓고 또 그 이상의 이야기는 기밀이라며 안 알려 주었다. 미레아는 세피로스의 화법에 진심으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쨌든 미레아 제인스터, 너 말이다.”

세피로스는 미레아를 콕 짚으며 말했다.

“넌 죽다 살아난 줄 알아. 다른 사람이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니콜라우스가 너를 도와준 것은 엄연히 말해서는 호의가 절대 아니야. 그저 케이드의 딸이니 호기심에 한 번 구경한 것뿐이지.”

미레아는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이미 한번 수작질을 부리려 했으니 앞으로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마라.”

어린애 취급하는 말에 미레아는 항변하고 싶었지만 맞는 말이라 입을 다물었다. 세피로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일행을 해산시켰다.

라슈발렌 협회의 전투부 소속이라는 위치는 지금까지 세피로스의 충견으로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어도 자신 앞으로 떨어진 명령만 수행하면 그만인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였다.

비록 전투부 요원들은 국가에 충성을 바친 군대나 주종관계에 속해 주군을 모시는 기사 같은 대단한 자긍심은 없는 단순 계약직 용병이었지만, 그래도 그들 나름의 직업의식은 있었기 때문에 고용주나 다름없는 세피로스의 일에 토를 달지 않았다.

명령 복종과 비밀 엄수는 가장 기본적인 철칙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처럼 자세한 내막을 전혀 알 수 없던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미레아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세피로스에게 알려 달라고 드러누웠지만, 파울로의 손에 질질 끌려가 방 밖으로 쫓겨났다.

새로운 정보가 워낙 충격적이라 사람들은 그 누구도 새로운 주제를 쉽사리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식사 시간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율비네가 말을 꺼내자 먼저 식사를 한 세피로스와 파울로, 쿤둘렌을 제외한 사람들은 뒤늦게 허기가 밀려왔다. 하지만 라우노와 직접 만났던 셋은 여전히 정신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세피로스와 대화를 하는 동안 미레아가 쥬드에 대한 일을 잊고 있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리스, 식사하셔야지요. 끼니는 제때제때 챙기셔야 합니다.”

율비네가 아리스의 눈앞에 손을 흔들며 그의 정신을 돌려놓았다.

“아리스 몇 살? 식사 챙겨 줘?”

옆에서 진이 웃으며 사람들을 식당으로 내몰았다. 계단을 우르르 내려가는 일행들의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걷는 미레아의 어깨 뒤에서 파울로의 손이 올라왔다. 미레아가 돌아보자 파울로는 아무 말 없이 미레아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참다못한 미레아가 먼저 의아한 얼굴로 파울로를 불렀다.

“파울로? 할 말 있어요?”

파울로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양손을 들어 미레아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그리고 미레아가 반항하기도 전에 머리를 꾹꾹 누르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무슨 짓이야!”

미레아가 성을 내어도 파울로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 미레아는 착하고 예쁘고 주먹도 잘 쓰고, 참 잘 컸다.”

미레아가 파울로를 미친놈처럼 봤다. 그러든 말든 파울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서 했다.

“카디는 너를 참 좋아해.”

“그렇군…… 요.”

“록산에 돌아가면 놀러 와.”

“그럴게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요?”

“갑자기가 아니야. 놀러 오라고 누누이 말했어도 네가 도통 놀러 올 생각을 안 했잖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피차 바쁜 처지에…… 어쨌든 알겠어요.”

미레아는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웅얼거렸다. 파울로가 이번에는 점잖게 미레아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 * *

밤늦은 시간이었다. 세피로스는 원래 밤잠이 없던 터라 자신의 방에서 소지품을 여기저기 늘어트려 놓고 자잘한 일거리를 처리하고 있었다. 한창 몰두하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려 열어 보니 불만 어린 표정의 리비엘로였다.

“왜 제게 아무것도 알려 주시지 않으세요?”

리비엘로가 세피로스를 새초롬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세피로스는 리비엘로를 방 안으로 들여보낼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방문에 기대어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넌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어.”

“아니요.”

리비엘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 예지는 그저 사건 사고를 보여 주는 것뿐이지 진실에 접근하는 능력이 아니에요. 쿤둘렌과 파울로 대장이 아는 것보다도 몰라요. 저는 아리스에게 내린 여신의 신탁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백익 니콜라우스가 어떤 사람인인지도 모르지요. 데르카이드와 마수란 생명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특히 세피로스 님 당신에 대한 것을 가장 모르겠어요.”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쓰고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리비엘로 람.”

세피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내 비밀을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이제 온전히 나의 몫이 되어 버렸다.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가끔은 벗어 버리고 외면하고 싶지만…….”

그는 느릿하게 심호흡을 했다.

“그럴 수 있었으면 벌써 했어.”

그렇게 말해도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리비엘로의 어깨를 세피로스가 가볍게 툭 치며 방문을 반쯤 닫았다.

“늦었다. 일찍 쉬어라.”

세피로스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리비엘로가 닫히려는 문의 문고리를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여신의 조각은 대체 뭐죠?”

그 질문은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세피로스가 문을 다시 열어주진 않았다.

“다른 건 다 몰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려 주세요. 여신의 조각이 해야 하는 일은 뭔가요?”

“너는 이미 한번 그 애의 운명을 보지 않았나. 그거면 된 거야.”

세피로스의 목소리에 짙은 피로감이 어려 있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돌리자 마치 은사 같은 그의 머리가 찰랑거렸다.

“여신의 조각이 해야 할 일 같은 건 없어.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돼.”

그러더니 이번에야말로 리비엘로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방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 * *

하룻밤 사이 병원에서 별일 없이 잘 쉰 시오는 다음날 퇴원했다. 하지만 퇴원하기 무섭게 백익 니콜라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 까무러칠 뻔했다. 그리고 정신을 수습하기 전에 내려진 다음 임무에 그는 다시 입원하고 싶어졌다.

“농담이지요?”

쿤둘렌과 파울로가 머무는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일행들 틈바구니에서 시오가 불안한 얼굴로 세피로스를 바라보았지만, 상대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들은 대로, 우리는 부식 지역에 들어갈 거야.”

“하지만 저희가 부식 지역에 들어갔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전해 듣지 않으셨나요?”

“부식 지역 안에서 하는 정화 작업이 더 빠르고 시간도 단축할 수 있어. 네가 걱정하는 부분에 대한 건 나도 있고 류진과 율비네도 합류했으니 이 정도 인원이면 못 할 일도 아니지.”

“출발 전 회의할 때만 해도 이 인원으로 부식 지역에 들어가면 3일 안에 전멸한다면서요.”

시오의 지적에 세피로스가 간단한 해결책을 내밀었다.

“그럼 3일 안에 하면 되지.”

“회장님!”

시오가 땍땍거렸지만, 진이 웃으면서 엄지를 척 올려 보였다.

“마수는 문제없다.”

율비네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시오를 안심시켰다.

“마이련의 세진이라는 지역이 급속도로 부식이 진행되는 동안 류은현 님의 명으로 부식 지역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막을 수 없다면 속도라도 늦춰 지역 주민들을 대피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부식 지역을 여러 차례 들락거렸고, 돌발상황에 완벽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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