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89화 (89/257)

89화.

“네 음모론이 진짜였어.”

리비엘로가 눈을 비비며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말도 안 돼, 진짜로 젊은 모습 그대로 살아 있었어.”

미레아는 반쯤 쇼크 상태였다. 대부분의 음모론이란 것이 그렇듯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믿는 쪽이 더 재미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미레아는 진심이라기보다는 재미 삼아서 그 음모론을 믿고 있었다. 그게 진짜인지는 정말로 상관없었다.

“하, 하지만 라우노 씨한테 내가 장난삼아 백익 니콜라우스랑 특징이 똑같다 그랬더니 자기는 니콜라우스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단 말이에요!”

“그럼 거기서 ‘예, 제가 백익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

아리스가 미레아를 타박하자 세피로스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생각했다. 라우노가 미레아에게 자신은 백익 니콜라우스가 아니라고 한 말은 아예 틀린 게 아니었다. 미레아가 만난 사람은 정확하게는 ‘과거에’ 백익 니콜라우스‘였던’ 사람이었다.

지금의 라우노 듀랜트는 온전한 백익 니콜라우스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일행들에게 그 말을 구태여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군. 적어도 마검을 찾은 뒤에 만날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이 마검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아리스의 말에 세피로스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이번 임무에 직접 움직이게 된 이유야. 니콜라우스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었다고요?”

미레아의 말에 세피로스는 짧게 고개를 까닥였다.

“하지만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은 나도 몰랐어. 이유야 어쨌든 내가 직접 움직이길 잘했군. 니콜라우스는 우리가 마검을 손에 넣기 전에 마검을 빼앗으려 할 거다.”

그 말에 아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죠?”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에게 마검 페니드란은 미지의 공포를 주거든.”

아리스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하자 세피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요컨대 그가 상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타난 불확실 요소란 소리지. 니콜라우스는 너를 없애고 싶어 해.”

아리스가 세피로스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난데없이 니콜라우스가 왜 자신을 적대시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했다.

“지금 제 목숨이 위험하단 소리인가요?”

“음…… 그가 너를 쉽게 없앨 수 있었으면 부식 지역에서 마주쳤을 때 없앴겠지. 그리고 네 목숨은 지금까지 위험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그 대답에 아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실제로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은 적보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한 시기가 더 많았으니 말이다.

“맞다, 그랬지. 모두가 나를 싫어하지…….”

아리스가 투덜거리자 세피로스가 덧붙였다.

“옛날부터 니콜라우스에겐 원대한 꿈이 있었어. 그런데 그 계획에 너와 페니드란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거든.”

아리스는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제가 대체 뭔데요?”

“우리도 몰라.”

대답은 리비엘로에게서 들려왔다.

“서리 여신의 예언도 그렇고 우리는 생각보다 너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어.”

“말했잖아. 너는 불확실 요소라고. ‘이레귤러’이기도 하지. 너는 자각 못 하고 있지만 네가 가진 잠재력은 네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해. 서리 여신의 발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네 힘을 구속하는 것조차 없어. 너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도 있지. 그건 같은 데르카이드인 니콜라우스가 더 잘 알 거야.”

아리스는 이런 선문답 같은 대화를 포기하고 질문을 바꿨다.

“그럼 니콜라우스는 누구인가요? 그가 가진 꿈이란 건 대체 뭐죠?”

“니콜라우스는 로아메나 대륙을 포함해 이 라슈온 전체를 암흑 지대처럼 만들고 싶어 해.”

그 말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세피로스는 그들이 되묻기 전에 먼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부식 지역 안에서는 서리 여신의 영소 개입이 없으니 데르카이드가 신처럼 군림할 수 있다. 파울로에게 전해 듣자 하니 부식 지역 안에서 라우노가 자네들에게 했던 말이라지?”

“네.”

미레아의 긍정에 세피로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래.”

“그 말은 꼭 니콜라우스가 신이라도 되겠다고 그러는 것처럼 들리네요.”

“맞아. 그게 꼭 신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지만, 그처럼 되는 것이 니콜라우스의 목표야.”

사람들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지금 자기가 뭘 들었는지 귀를 의심하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혼란스러워 하는 일행들을 보고 세피로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세피로스가 이러한 내막에 관한 이야기를 전투 부대원들에게 하지 않은 이유는 임무를 하는 동안 그러한 사실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마수 때문에 암흑 지대로 변한 클라인의 땅을 정화하고 마검을 회수해 온다.

이런 단순한 설명 이상의 것으로 이번 임무를 묘사할 필요가 없었다. 뒷배경이야 어떻든 세피로스가 원한 것은 정말 그 두 가지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아리스를 이용한 것도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전투부는 세피로스의 검이었다. 라슈발렌 전투 요원들은 세피로스의 명에 따라 여러 분쟁 지역을 돌며 무력으로 분쟁을 해소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가치관과 상관없는 세피로스의 명령만으로 움직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임무에 투입되기도 하지만 이유는 묻지 않는다. 주인의 의지대로 휘둘리는 검의 의사는 필요 없었다. 세피로스를 따르는 일부는 단순히 돈으로 움직이는 계약직 용병이기 때문에, 다른 일부는 세피로스가 하는 일을 신용하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세피로스의 예상을 깨고 니콜라우스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과 접촉하기도 했다. 일부러 훼방을 놓으러 친히 행차하신 분 때문에 일이 골치 아파졌다.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로 세피로스가 두통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니콜라우스는 아주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선언해 두자면 니콜라우스는 우리의 주적이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는 세피로스의 선언에 라슈발렌 소속 사람들은 굳은 얼굴로 세피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라슈발렌으로 불리는 ‘라슈온 지적 생명체 협회’는 라슈온의 다양한 종족과 국가 간의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고 평화협정을 위한 조직이었지 누군가를 배척하기 위한 곳이 절대 아니었다. 세피로스가 주적이라고 선포한 것은 상당히 파급력이 강한 단어 선택이었다. 라슈발렌의 주적이라 함은 라슈발렌의 설립 이념과 정 반대편에 있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세계에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

쿤둘렌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리스마저 포용하는 길을 선택한 세피로스는 백익 니콜라우스를 쿤둘렌의 말뜻대로 정의 내렸다.

“이유는 추가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사람들은 여전히 석연치 않아 하는 얼굴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니콜라우스는 로아메나 대륙을, 나아가서는 라슈온 전역의 신이 되고 싶어 하고 그 일에 제가 방해될 수도 있다는 소리로군요.”

“맞아.”

“하긴, 그 이야기를 듣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그에게 대적할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말입니다.”

아리스의 말에 세피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메르티어스 황제 옆에서 마검을 회수하자고 부추긴 건 아마 니콜라우스일 거야.”

“황제랑 니콜라우스랑 아는 사이인가요?”

“니콜라우스가 먼저 접근했겠지. 최소 5년 전에.”

아리스의 눈빛이 변했다. 그 오싹한 기운에 바로 옆에 있던 미레아와 리비엘로가 흠칫거리며 거리를 벌릴 정도였다.

“그럼 메르티어스 황제가 갑자기 혼자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나를 죽이려고 한 게 그 혼자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똑똑하군.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알아.”

하지만 아리스는 세피로스의 칭찬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어마어마한 분노가 밀려와 목을 옥죄였다.

“제가 그를 죽이면 문제가 되나요?”

사실 그 질문은 아리스에게 의미가 없었다. 만류한다 해도 시행할 생각이니 말이다. 살기를 풀풀 풍기는 아리스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도 세피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역시 그 개자식은 없는 쪽이 더 속 편하니까.”

세피로스의 거친 언사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 바라보자 그는 능청스럽게 턱을 괴었다.

“왜? 나도 욕할 줄 알아.”

다른 사람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사이 아직 험악한 얼굴을 풀지 않은 아리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혹시 그자 때문에 우리의 거래 조건 중에 바뀌는 것이 있나요?”

“조항이 하나 추가될 순 있겠지. 백익 니콜라우스를 조심할 것. 그자가 네게 어떤 조건을 내걸며 접근해도 우리와 한 거래를 우선시할 것. 니콜라우스는 아마 너를 없앨 수 없다면 역으로 이용하려 들 거다. 사실 그에게 가장 좋은 상황은 네가 니콜라우스에게 협력하는 것이니까. 실제로 5년 전에 황제를 꼬드겨 너를 한 번 이용하기도 했고 말이지. 하지만 그자 대신 이쪽을 선택한다 해도 네게 불리한 부분은 없다고 본다. 니콜라우스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건 나도 해 줄 수 있거든.”

“제가 왜 그 자식이랑 협력합니까.”

“그렇게 확언해 주면 나야 고맙군.”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네요. 백익 니콜라우스는 100년 전 마수 대전에서 영웅으로 추대 받던 인물 아니던가요? 왜 인제 와서 분란을 만드는 거죠? 세피로스 님, 당신은 100년 전에 그와 함께 마수에 대항하여 싸웠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지금은 그를 주적이라 말하는 건가요?”

파울로가 세피로스에게 물었다.

“마수 대전이 끝난 이후 니콜라우스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었어…….”

그 말에 대답하는 세피로스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래서 40년쯤 전에 나와 크게 다투었고…… 그 이후에 우리는 갈라서서 지금 이 상황까지 온 거야. 그래, 따지고 보면 내가 그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설득하지도 못했고, 그 옛날 그가 엇나가는 것을 막지도 못했으니 어느 정도는 내 업보지. 당시 니콜라우스와 가장 가까웠던 것은 나니까.”

미레아는 세피로스가 5년 전, 마수 대습격 사건에서 왜 아리스보다는 자신이 원망받아야 한다고 말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이 사람도 책임감 때문에 자기 탓을 하는 중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서 왜 그렇게까지 책임감을 느끼는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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