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네, 아리스으…….”
율비네는 존칭을 붙이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자신의 입술을 얼른 한번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대화를 해 보십시오. 대화 자체를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도 많지만 저는 갈등을 해결할 때 대화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화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면 될 일입니다.”
아리스가 주섬주섬 자신의 검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렸다. 율비네가 대체 무슨 의도인가 싶어 보고 있자 아리스가 매가리 없이 중얼거렸다.
“이 검의 이름이 아직 없는데 이참에 이름을 ‘대화’라고 지을까.”
율비네는 오랜만에 본 자신의 주군이 못 본 사이 한심해진 것 같아 보여 좀 슬펐다. 잠시 아리스가 풀어놓은 검을 살펴보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검…….”
외관만 봤을 땐 특징이라고는 전혀 없는 평범한 검이었으나 마력에 감응된 것이 심상치 않았다. 율비네가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은 기색이자 아리스가 얼른 검을 수거해 갔다.
“남들에겐 아직 비밀이야.”
“그렇다면 이름 정도는 지어 주시죠. ‘대화’ 말고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아리스는 상체를 비척비척 일으켜 남은 음료수를 한입에 다 털어 넣었다.
“자, 네가 대화하라고 알려 줬으니까 어떤 식으로 물꼬를 트는 게 좋을지 좀 봐 줘.”
그는 목을 좀 가다듬더니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야, 미레아. 너 지금 한가해? 나랑 차 한잔할래?”
“만만한 여성들에게 작업 거는 한량 같습니다.”
“미레아,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난 있는데.”
“시비 거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 대화를 해 보자.”
“서먹한 상태에서 다짜고짜 그러면 부담스럽습니다.”
“네가 대화를 하라며! 다 별로라고 그러면 어떡하냐!”
“다른 건 다 잘하시는 분이 이런 쪽으론 정말 재주 없으십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부담되지 않게, 날씨 얘기라도 먼저 해 보시고!”
“몰라, 몰라. 포기할래.”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제 일이 아니니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리스는 낮아진 해의 위치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일어났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다 돼 가고 있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일행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으나 오늘은 그걸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카페를 나서 숙소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는 율비네에게 아리스가 투덜거렸다.
“내가 미레아랑 사이가 나빠져도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뭐. 피할 이유가 있나.”
그런 것치고는 혼자 머리 싸매고 쩔쩔매는 꼴을 보니 율비네가 봤을 때 가만히 내버려 두면 먼저 굽히고 들어갈 게 뻔했다. 율비네는 아리스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이 신선했다.
아리스는 고집이 세서 먼저 굽히고 들어간 적이 손에 꼽은 데다 뻔뻔한 성격 탓에 어지간한 일에는 남들 눈치를 거의 보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신경 쓰고 있단 것 자체가 반쯤은 미레아에게 넘어갔단 소리다. 그러니 미레아에 대한 호기심이 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분입니까?”
“누구?”
“미레아 제인스터 씨말입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아.”
아리스는 급격하게 피곤한 얼굴을 했다.
“내 앞길 생각만으로도 머리 터질 것 같아서 신경을 안 쓰고 싶은데 무시하자니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여서 말이야. 그걸 어떻게 내버려 둬. 사람 성가시게 하고 있어.”
율비네가 궁금해했던 것은 미레아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였다. 가령 어디 사는 누구인지, 성격은 어떤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이런 소소한 것들 말이다. 아리스가 미레아에게 내린 평가나 생각이 아니고.
그런데 아리스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내며 한탄을 주절주절 내뱉고 있었다. 아찔했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고자질했다. 율비네는 자신의 주군이 이렇게까지 남 험담하는 것은 처음 봤다.
아니, 애초에 이게 험담이…… 맞나? 율비네는 몇 년 만에 만난 아리스가 너무나도 새로워서 조금 공포감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성격마저 변할 정도로 그동안 고생이 많았나 보다.
불쌍한 우리 주군. 율비네가 자신을 딱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아리스는 머릿속으로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렸다.
“미레아는 항상 위태위태해 보여서 무서워.”
미레아가 겉보기엔 항상 명량, 쾌활, 유쾌해 보인다 해도 아리스는 한번 자신의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온 사람이기 때문에 동류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게 뻔히 보이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리스의 눈에는 율비네가 지금껏 아리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동정심이나 동질감과는 달랐다. 이해와 공감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아, 아리스가 낯설게 느껴지던 이유는 단순한 세월 탓이 아니고 저것 때문이었구나. 율비네는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불쌍한 우리 주군 대신 다른 칭호를 주었다.
등신 같은 우리 주군.
주로 아리스가 일방적으로 떠들었지만, 율비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숙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맞은편에서 미레아가 진과 함께 오다가 아리스를 보고 험악한 얼굴로 걸음을 멈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리스는 열심히 할 말을 궁리하고 있는데 숙소 건물의 출입문이 엄청난 기세로 열렸다. 세피로스가 다급해 보이는 얼굴로 튀어나오다 마침 문 앞에서 재회한 미레아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너희, 나 좀 봐.”
세피로스는 영문 모르는 얼굴을 한 미레아를 질질 끌고 와서는 아리스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둘을 데리고 숙소로 들어가더니 계단을 두세 칸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 리비엘로의 방문을 두드렸다.
리비엘로가 나오자마자 세피로스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배당된 방 안으로 전부 밀어 넣었다. 그 뒤를 다른 사람들이 따라 들어갔다. 갑자기 끌려 나온 셋은 서로를 보며 소리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혹시 이 중에 사고 친 사람?
난 아닌데?
나는 너무 많아서 모르겠는데?
“시오 미도르는…… 병원이구나.”
세피로스가 아차 싶은 얼굴을 하자 파울로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불러올까요?”
“아니, 지금은 이 셋이면 돼. 나중에 지금부터 할 이야기나 전해 줘.”
세피로스는 고개를 젓더니 미레아에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라우노 듀랜트.”
“네?”
“네가 만났다는 라우노 듀랜트란 데르카이드. 어떻게 생겼지?”
파울로가 고자질한 덕분에 혼나게 생긴 줄 알았는데 세피로스의 표정은 다른 의미로 다급해 보였다. 미레아는 기억을 더듬으며 라우노의 생김새를 묘사했다.
“어…… 하얀 날개를 가졌고 머리카락도 투명하다 느낄 정도로 새하얬어요. 그리고 눈동자 색은 진홍색이었는데 그런 붉은 눈은 처음 봐서 신기했고, 나이는 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제법 젊어 보였는데 인상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거든요. 약간 웃는 상에 얼굴은 다정하게 생겼고 콧대가 높고 눈매는 가늘고 길었어요. 상당히 미남이었죠.”
세피로스는 자신의 짐 가방 속에서 두꺼운 책을 한 권 꺼내더니 책 사이에 끼워진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렇게 생겼나?”
아리스와 미레아, 리비엘로가 머리를 맞대고 그것을 들여다보고는 동시에 어, 하고 소리쳤다.
“네! 이 사람!”
셋이 본 사람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생긴 사람이 그 사진 안에 있었다. 그들의 확답에 세피로스는 마른세수를 하였다.
“역시…….”
세피로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미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군데요?”
“백익 니콜라우스.”
그 짧은 대답에 셋은 각자의 귀를 의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요?”
“백익 니콜라우스. 이건 40년쯤 전의 모습이다.”
셋은 말을 잃고 세피로스의 손에서 사진을 건네받아 입을 헤 벌리고 그것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사진 속 인물의 모습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비록 지금보다 사진 기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흑백 사진인 데다 뭉개진 부분도 있었지만 셋의 의견은 똑같았다. 그 사진 속 인물은 라우노 듀랜트가 맞았다.
100년 전, 백익 니콜라우스가 한창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사진기라는 것이 발명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대부분 사람의 손으로 그린 초상화로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초상화를 남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니콜라우스의 모습을 본 화가가 그 모습을 온전히 그림에 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에 사람들의 상상력까지 덧씌워져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그림만으로는 니콜라우스가 정말 어떤 얼굴이었는지는 사실상 정확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세피로스 같은 용들을 제외하면 니콜라우스의 모습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대부분 명을 다해 죽었고 미레아나 다른 젊은 사람들이 니콜라우스의 얼굴을 알 리 없었다.
미레아를 포함해서 아리스와 리비엘로, 시오가 라우노를 보고 백익이 연상된 것을 우연으로 치부해 버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니콜라우스? 어떻게 만났어?”
당사자만큼은 아니었지만 놀란 것은 진과 율비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둘에게 느긋하게 설명을 해 주기에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런데 이건 40년 전의 사진이라면서요? 40년 전이라면 이 사진을 찍을 당시만 해도 대충 60대라는 셈인데 어떻게 늙지도 않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거죠?”
아리스의 의문에 세피로스는 허탈한 얼굴로 답했다.
“그는 나이를 먹지 않아. 니콜라우스의 영소는 인간의 것과 달라. 20대에 성장이 멈춘 후 줄곧 그 얼굴이었어.”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은 세피로스뿐이었고, 그는 이 이상의 설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할 생각이 아직 없었다. 평소 미레아가 음모론을 떠들고 다니던 말이 떠올라 아리스와 리비엘로가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백익 니콜라우스가 진짜로 살아 있었어…….”
미레아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로 늙지도 않고 살아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