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어디서 흙을 잔뜩 묻히고 온 도련님 같아 보이는 애가 자기 또래로 보이는 어린애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지 같이 놀지 않겠냐, 집은 어디냐, 부모님은 어디 가셨냐며 말을 걸어왔다.
율비네는 그때 길거리에서 구걸 중이었던지라 그가 귀찮았다. 하지만 집도 없고 부모님도 없다고 하자 그 도련님은,
“그럼 우리 아빠한테 집을 달라고 하자.”
라며 거리에서 구걸이나 하고 다니던 꼬질꼬질한 꼬마의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았다. 율비네는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도련님에게 끌려갔다. 그의 어머니에게 ‘주웠다’라며 율비네를 들이밀었을 때 아리스는 어머니에게 크게 혼이 났다. 거렁뱅이 꼬마를 데리고 온 것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혼난 이유는 첫째, 가정교사를 따돌리고 미리 파 놓은 개구멍으로 집을 빠져나간 것. 둘째, 사람에게 물건에나 쓰는 ‘주웠다’라는 말을 썼다는 것.
아리스는 그 대가로 반성문을 열 장이나 써야 했다. 당시의 아리스는 9살 정도 되는 어린애였는데 율비네는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험하게 살았다 보니 발육 상태가 좋지 못해 11살인데도 한참 어려 보였다. 그래서 아리스는 동생인 줄 알고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동생이 아니란 말에 좀 실망했지만 그래도 아리스는 친구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율비네는 아리스의 아버지인 마라피네스에게 그의 저택에서 하녀 일을 배우며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훗날 기사 서임을 받을 땐 ‘엘레시드’란 성도 하사받았다.
그러다 보니 율비네에게 있어서 아리스는 그녀의 인생에 내려온 단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거기에 어린 시절부터 함께 볼꼴 못 볼꼴까지 다 보면서 구르고 끝까지 아리스의 곁을 지키다 보니 그 충성심을 감히 따라올 자가 없다시피 했다.
율비네는 이렇게 아리스와 재회한 게 감개무량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눈 후 아리스는 율비네를 살살 꼬드겨 어머니의 행방을 알아내려 그랬다.
“세피로스 님께서 발설하지 말라 이르셨습니다.”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율비네는 정말로 난처한 얼굴이었다. 류은현의 행방을 아리스에게 함구하는 것은 세피로스가 책임지고 류은현의 안위를 봐 주기로 한 조건 중 하나였다.
“세피로스의 사유지는 아닐 것 같고 용족의 유적지 중 하나야?”
“모릅니다.”
“그래,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어머니는 잘 계셔? 거기는 날씨가 어때?”
“모릅니다.”
직접적인 정보를 알 수 없다면 주변 환경을 캐물어서 유추해 내려 그랬는데 아리스를 몇 년이나 모신 율비네는 그의 뻔한 수작에 절대로 말려들지 않았다. 아리스는 자신의 앞머리를 헝클며 율비네를 쏘아보았다.
“왜! 왜 내가 알면 안 되는데! 우리 어머니 일인데 왜!”
“그렇게 궁금하시면 이번 임무만 무사히 완수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리스는 그대로 탁자에 엎어졌다.
“세상사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그 한탄에 율비네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원하는 대로 하실 수 있잖습니까.”
아리스가 엎어진 자세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며 눈동자만 굴려 율비네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무서운 방법을 두 번이나 쓰라고? 나도 양심이란 게 있어, 율비네. 너는 나를 대체 뭐로 보고 있는 거냐?”
“실언했습니다.”
빠르게 정정한 율비네는 결의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리스 님의 편입니다.”
“고마워 죽을 것 같은데 하나만 더 부탁하자. 기왕 이름 부르는 거 그 ‘님’자는 빼면 안 될까?”
율비네는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
“그게, 저, 그게…….”
율비네는 버벅거리다 애원처럼 말했다.
“그럼 대신 주군이라고 부르게 해 주십시오.”
“안 돼.”
율비네가 울상을 짓든 말든 아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이제 황족이고 나발이고 지겨워 죽겠다. 요즘 내가 깨달은 바가 있는데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최고야. 이번 임무 끝내고 마검 페니드란만 회수하면 다시 은둔 생활 할 거야!”
그러다 그 일의 최대 훼방꾼을 떠올리고 탁자에 다시 이마를 쿵 박았다.
“그런데 그러려면 백부의 목을 쳐야 하네…… 하, 역시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
“치십시오.”
율비네가 서늘한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 직접 황제가 되시는…….”
바로 전에까지 무기력하게 나자빠져 있던 아리스가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황급히 율비네의 입을 양손으로 막았다.
“너, 너 이렇게 사람 많은 곳 한복판에서 무서운 소리를 막 한다? 아니, 물론 목을 칠 기회가 있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뎅강 썰기는 하겠지만 복권은 안 한다고!”
아리스 역시 율비네 못지않게 무서운 소리를 막 하고 있었지만, 율비네는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리스의 손에 틀어막힌 입 안쪽에서 뭐라고 웅얼거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리스를 응시했다. 아리스 역시 지지 않고 눈싸움을 받아 주었다. 그 결과 율비네가 먼저 시선을 돌리자 아리스가 손을 풀고 탁자를 탕탕 두드렸다.
“대체 내가 복권해서 얻는 게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생각해 보면 아리스니…… 임…… 께서 이렇게 된 연유는 모두 루아드 황실과 서리 교단 사이의 폐단 때문입니다. 적폐 청산하시죠. 타인은 믿을 수 없습니다. 확실하게 하시려면 직접 하시는 게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얘가 왜 몇 년 못 본 사이 이상해졌냐.”
“제 나름대로 5년 동안 고민한 결과입니다.”
“나는 5년 동안 생각 안 한 줄 알아? 적폐는 황실이 적폐다. 지금 시대가 무슨 시대인데 그런 구세대의 유물은 없어질 때도 되었어. 다른 나라들처럼 공화정 만들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체계가 잡히기 전까지 사회가 혼란스러울 겁니다. 속국들 문제도 있고요.”
“어쩔 수 없지. 자연스러운 과정이야. 루아드 황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면 지금이 딱 좋아. 국민이 자립하는 걸 도와주는 게 황실의 마지막 일이야. 그리고 속국도 다 독립하라지! 내정간섭도 그쯤 했으면 할 만큼 했어.”
그 말에 율리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하.”
“야!”
“죄송합니다. 습관이 되어 버려서…… 어쨌든 아리스니…… 임. 다시 봤습니다.”
“무얼?”
“말씀으로는 싫다, 싫다 하셔도 사실은 누구보다 이 나라의 국민을 사랑하시는군요.”
그러면서 국민을 위해 권력을 포기하는 아리스의 선택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인 제도가 더 나은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사회 체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권력 계층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손에 쥘 수도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국민에게 주권을 넘기겠다니 감격했다는 율비네의 말에 아리스는 반박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아리스는 그저 복권하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율비네가 제멋대로 오해하고 감동한 대로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래서 복권은 안 하는 거로…….”
“뜻이 그러하시다면 더 권하지 않겠습니다.”
율비네가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겨우 잔소리에서 벗어난 아리스는 상큼한 레몬이 들어간 음료를 마시니 그나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율비네에게 대뜸 물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류은현 님 일이라면 저는 모릅니다.”
“아니, 그거 말고.”
아리스의 말을 듣고 율비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대방이 내게 화를 내는데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할 때는 어떡해?”
그 말에 율비네는 조금 황당하단 얼굴로 말했다.
“전에 그런 사람들 다 죽이셨잖습니까.”
모반을 일으켰던 이야기를 하자 아리스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랑 달라! 그거랑 다르다고! 이번엔 그럴 수 없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말버릇처럼 하시던 말 있잖습니까. 하지도 않은 일로 오해받고 해명해도 안 통할 상대에게는 진짜 일을 쳐 버려서 오해를 진실로 만들어야 억울하지 않다고.”
“그러니까 그거랑 다르다니까. 오해라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고 서로 옳다고 생각한 게 달랐던 것뿐이니까.”
“혹시 아까 그분과 관련된 일입니까?”
“음…… 뭐…… 그렇지…….”
“그렇다면 사과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 말에 아리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럼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그걸 모르겠으니까 너한테 의견을 묻는 거잖아.”
“저라면 먼저 상대방과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합치점을 찾아 서로에게 납득가는 결론이 나면 좋겠지요.”
“그게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이 서로 같을 순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서로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상과 신념에 동의할 수는 없어도 왜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이해는 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것을 아예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은 제법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비네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골머리를 썩고 있는 아리스를 딱하게 보았다. 이 사람은 이념이 다른 사람과 대화라는 수단으로 갈등을 해결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율비네는 아리스가 혼자 고민하는 동안 음료를 조금씩 마셨다.
아리스는 혼자 생각하는 듯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탁자 위에 엎어졌다.
“전하.”
“야!”
무심코 입에 밴 호칭이 다시 나오자 아리스가 이번에도 버럭거렸다.
“죄송합니다, 아리스 님.”
“‘님’ 빼고.”
아리스는 율비네의 호칭을 정정해 주는데 슬슬 이골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율비네는 마이련에 있을 때 아리스를 전하라고 부를 기회가 없었다. 그야, 마이련에 있는 동안 루아드어 대신 마이련어를 사용하며 지냈는데 마이련은 행정 체계가 루아드와 달라 대공이란 지위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전하’라는 호칭을 대신 할 만한 단어가 없었다. 대신 ‘주군’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그것도 쓰지 말란다. 율비네는 그게 영 어색하고 속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