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래서 이번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화가 났군요.”
파울로가 버석해진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맞아. 쥬드라는 아이를 구할 방법을 찾을 새도 없이 끝나 버렸으니까.”
“지금까지 대인 살상 임무는 잘했으면서…….”
테러리스트로부터 대상을 비밀리에 보호, 적대 세력의 본거지에 침투하여 제압, 불온한 계획을 꾸미는 조직에 잠입하여 큰 사건 사고를 방지하는 것 등등 미레아가 참여했던 작전들을 회상하며 파울로는 한탄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세피로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미레아의 사상은 무고한 사람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지 불살(不殺)이 아니니까. 내가 장담하건대 미레아가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참여했던 임무들의 인명 피해가 세 배는 됐을 거야.”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미레아는 그런 식으로 무리해요.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좋은데 그걸 위해서라면 지나치게 몸을 혹사하니…… 하지만 매번 그런 식일 순 없어요.”
“동의해.”
“좀 말리지 그러셨어요.”
“했지.”
“뭐라던가요.”
“남을 대신해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라고.”
“환장…….”
세피로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파울로는 간이 쪼그라들어 없어질 지경이었다.
“내가 미레아를 이번 일에 참여시킨 이유는 이 과정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거나 마음에 짐을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아리스를 다짜고짜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건 나도 예상치 못했지만. 그런 걸 보면 효과가 좀 있는 것 같기도?”
세피로스가 파울로에게 어떠냐는 식으로 바라보았다.
“사실은 제가 보고 드리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만…….”
파울로는 미레아가 부식 지역 안으로 떨어진 일을 세피로스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런데 파울로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세피로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여간 제가 봤을 땐 미레아는 변한 게 없…….”
“라우노 듀랜트라고?”
파울로의 말을 끊고 세피로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지금 라우노라 그랬어?”
“아시는 분인가요?”
심상치 않은 상대방의 반응에 쿤둘렌이 걱정스럽게 묻자 세피로스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말했다.
“니콜라우스를 다른 식으로 발음하면 라우노가 돼.”
그것은 지금은 잊힌 고대의 표기법이었다. 사람들의 언어가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닐 때 사용하던 발음기호 방식으로 읽은 이름이었다.
“미레아가 만났다던 그 라우노 듀랜트란 데르카이드는 아마 백익 니콜라우스일 가능성이 커.”
그 말에 파울로와 쿤둘렌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세피로스가 다급하게 일어났다.
“미레아 제인스터는 지금 어디 있지?”
* * *
일행과 떨어져 나와 공원 분수대에 멍하니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던 미레아는 건너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신경 쓰여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미레아는 갈색 눈을 반짝이고 있는 장신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음…… 저기…… 류진 씨……?”
미레아가 아는 척을 하자 진이 방긋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앉아라.”
초면부터 반말이었지만 존댓말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서 나온 것을 알기에 미레아는 불쾌하진 않았다. 다만 다른 이유로 불편했다.
“저는 마이련어를 조금 알아요. 루아드어가 불편하면 마이련어로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아, 그래? 진작 말하지 그랬어. 너는 루아드어로 말해. 나도 루아드어는 다 알아들으니까.”
정정하자. 마이련어로 말하기 시작한 류진은 초면이라 해도 반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해도 미레아는 그녀가 친숙하게 구는 것이 싫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미레아는 일단 어색하게 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게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 말에 더더욱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류진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아까 익숙한 인상이라고 느꼈던 이유가 아리스의 혈육이라 그런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은 아리스가 장난스럽게 웃을 때의 얼굴과 똑같았다. 그리고 저 능청스러운 성격도 비슷했다.
“아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내 이름은 류진이야.”
진은 미레아에게 자기소개를 한 번 더 했다.
“나이는 25살이고, 너희랑 몇 살 차이 안 나니까 편하게 대해도 괜찮아.”
“시오랑 동년배시네요. 마이련은 나이에 대한 서열이 확실하다 들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난 상관없어. 그리고 여기는 마이련이 아닌걸.”
진이 밝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쨌든 잘 부탁해.”
“네, 저도요.”
미레아가 악수를 청하자 진이 그 손을 꽉 잡았다. 미레아는 슬슬 진이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저…… 혹시 제가 아리스에게 화를 내서 이러시는 건가요?”
“응.”
이쯤 되니 미레아는 그냥 도망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진은 생글거리며 자기 할 말을 했다.
“나는 걔가 그렇게까지 남 눈치 보는 걸 처음 봐서 신기해!”
“아리스가 제 눈치를 보던가요.”
“응! 걔는 원래 남들 눈치 같은 거 안 보거든.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래. 그런데 네 눈치는 엄청나게 보고 있는걸 보니 뭔진 모르겠지만 걔가 잘못했겠지. 제대로 사과 받아 내.”
“아뇨, 그게…… 다른 사람들은 분명 제가 틀렸다고 할 거예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아리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미레아는 자신의 주장이 남들에게 어떤 식으로 보일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반발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진은 가볍게 말했다.
“그럼 미레아가 잘못한 거야?”
그 말에는 미레아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잘못이에요. 사실 따지고 보면 아리스가 제게 사과할 이유가 없어요. 뭐…… 제가 이해 못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애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행동을 했다고 봐요.”
“저기,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오늘 합류했기 때문에 아직 일행들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전이거든. 너만 괜찮다면 이야기를 들려 줘.”
미레아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머뭇거리다 쥬드에 대한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래서 제가 아리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는데…….”
“그 이후로 이런 분위기다, 이 말이지?”
미레아가 주억거리자 진은 양손을 머리 뒤에서 깍지 끼고 뒤통수를 받혔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하며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요컨대 가치관의 충돌이란 소리구나.”
“그런 셈이죠.”
미레아는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어쩌다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건지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진과 대화를 하고 있으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진은 마치 오래된 친구 같았다. 진은 미레아에게 거리를 두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례하지도 않은 적당한 선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것도 아리스와 닮았다.
“그리고 네가 말한 부분에서 네 잘못이라고 할 만한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자책하는지 모르겠어.”
“아니요.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제 잘못이에요.”
그 부분에서는 미레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 잘못이 맞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죠.”
진은 미레아를 이해할 수 없어서 볼을 긁적였다.
“왜 네 잘못이라 여기는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사고였잖아. 게다가 쥬드가 그렇게 변한 원인은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게 누군가의 잘못이겠어.”
하지만 미레아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지 표정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아리스와 얘기는 해 봤어?”
“생각해 보니 제가 일방적으로 화만 내고 대화는 안 했어요.”
“그럼 지금이라도 대화해 보는 게 어때? 그래도 마음을 풀 수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진은 팔짱을 끼더니 자기 생각에 취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 사이의 많은 문제는 보통 대화의 부족으로 생기는 법이야.”
“으으…….”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리스를 완전히 이해시키려면 자신의 과거 일까지 같이 설명해야 할 텐데 그건 싫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진이 미레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꼭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괜찮아. 이야기할 준비가 되면 천천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류진 씨.”
“류진 씨 말고 진이라고 불러. 다른 마이련식 이름보다 너희가 발음하기 쉽잖아?”
“알겠어요, 진.”
미레아의 인사에 진이 쑥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 숙소까지 가는 길이 어떻게 되니?”
* * *
아리스는 율비네를 대동하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것보다 병원 근처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회포를 푸는 쪽을 선택했다.
율비네는 과거 아리스의 부관이었지만 몇 년 전에 아리스가 잠적한 이후 그의 어머니인 류은현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아리스는 5년 전, 마법으로 공간 워프 게이트를 만들어 식솔들을 피난시킨 후 자신 역시 같은 길로 피신하여 그들과 합류해 마이련의 외조부 댁에 의탁했다.
류은현의 아버지이자 아리스의 외조부 되는 류가의 가주인 류광준은 마이련의 무신 출신이었다. 비록 정계에서 은퇴했다 해도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위세를 떨치던 인물이었다.
류광준은 그들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었지만, 아리스 자신이 그들과 함께하는 것을 반대했다. 다른 사람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리스는 2년 전에 그 집을 나왔다. 율비네에게마저 말하지 않고 훌쩍 떠나 버렸다.
율비네는 단순한 부관의 관계를 넘어 아리스가 죽으라 그러면 죽는시늉이 아니고 정말 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된 사연은 참으로 기구한 그녀의 인생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진 어린 시절이었지만 율비네는 아리스를 만난 날이라 하면 아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