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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85화 (85/257)

85화.

미레아는 멍하니 방을 둘러보다 부부 침실로 몸을 옮겼다. 부모님이 쓰는 침대 위에 몸을 엎어트리고 이불에 배어 있는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레인의 몸에서 나던 따듯한 살 내음과 케이드의 면도 크림 냄새가 났다.

미레아는 그렇게 몇 시간이고 있었다. 날이 어둑해지는 동안 미레아는 졸리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달이 환하게 떴다. 미레아는 부스스 일어나 뒷마당으로 나갔다. 뒷마당에서는 록산의 앞바다가 바로 있었다. 마수를 토해 내는 것 같던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다. 달빛이 수면 위에 너울너울 흩어졌다.

미레아가 돌연 바다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해변을 가로질러 그대로 바닷물에 몸을 풍덩 담갔다. 물에 젖은 옷이 달라붙어 움직이기 어려웠어도 미레아는 꾸역꾸역 전진했다. 무릎에 오던 수심이 금방 어깨까지 올라왔다. 한발만 더 내디디면 미레아의 키보다 더 깊은 곳이었다.

“미레아!”

뒤에서 풍덩 풍덩거리는 소리가 났다. 미레아는 그보다 더 빨리 앞으로 가려 했지만 뒤따라온 사람이 미레아의 몸을 붙잡았다.

“놔!”

“죽을 셈이야?!”

“그래!”

미레아가 처절하게 외쳤다. 그런 미레아를 세피로스가 여러 감정이 일렁이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죽을 거야!”

하지만 세피로스의 힘은 미레아가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는 미레아를 수심이 얕은 곳으로 끌고 왔다. 미레아는 해변에 도달할 때까지 연신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세피로스는 해변에 미레아를 끌어다 놓자 그녀는 주저앉은 채 손에 잡히는 대로 자갈이며 모래며 이것저것을 세피로스에게 던졌다.

“세피로스가 뭔데! 내가 죽겠다는데, 왜!”

“죽지 마.”

“나만 남았어! 나만 남았다고! 그런데 어떻게 살아!”

“나는 네 대부야.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지 말아라.”

“그래 봤자 진짜 부모도 아니면서!”

미레아가 모진 말들을 내뱉는 동안 세피로스는 화내지 않았다.

“나도 오래된 친구를 잃었어.”

그렇게 말하는 세피로스는 어쩐지 한없이 작아 보였다. 미레아는 항상 그를 커다란 용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미레아보다 더 길을 잃은 어린애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죽지 마라, 미레아.”

300년 이상을 살아왔고 그보다 몇 곱절은 되는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용에게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기나긴 세월에 비하면 스쳐 지나가는 시간일 텐데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용에게는 고작 인간인데…….

“내가 네게 케이드나 레인 만큼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너마저 잃고 싶지 않다. 죽지 마.”

“내가…… 나 때문에 모두 죽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요?”

“네 탓이 아니야.”

“내가 구하려 했는데, 아니 사실은 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외면했어…… 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선택하는 것에서 도망쳤고,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런 주제에 나만 살아남았고…… 그렇게 살아남았는데 어떻게 살아가라는 건데요?”

“그렇게 살아남았으니까 살아야 하는 거야.”

“무서워요, 세피로스. 난 그렇게 살 수 없어요.”

“어려운 것 없어. 그저 살아 있으면 돼. 그거면 돼.”

미레아가 모랫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꺽꺽 울었다. 세피로스는 허공에서 담요를 꺼내 미레아의 몸에 둘러 주었다.

“앞으로도 처절하게 살아남는 거야, 미레아 제인스터. 그게 네 삶의 이유야. 다른 사람들이 이어 준 네 목숨을 어떻게 쓸지 잘 생각해 봐.”

미레아가 세피로스를 올려보자 그 역시 어딘가 공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미레아가 몸을 던지려 했던 먼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케이드마저 떠나 버렸어…….”

그러고는 짧게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너마저…….”

그렇게 말하는 세피로스의 얼굴을 따라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며칠 후, 죽은 이들의 장례식이 열렸다. 마수로 인한 사망자가 절대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근래 들어 매일같이 묘지에서는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미레아는 고집스럽게 케이드의 묘를 만들지 않았다. 그것을 나무라는 이는 없었다. 미레아는 검은 상복을 입고 어머니와 동생의 관이 땅에 묻히는 걸 묵묵하게 바라보았다.

마수가 습격할 때도 그랬지만 새파란 하늘은 고요했다. 조문객들은 날이 좋아 장례식이 평온하게 치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미레아를 위로했지만 그건 결코 위로로 들리지 않았다. 장례식을 하기 좋은 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간신문에는 로아메나 대륙 전반에서 일어난 마수 대습격 사건에 대한 전말이 대서특필 되었다.

「흑익 루데키아스 대공자, 클라인을 마수의 소굴로 만들다!」

요약하자면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 대공자가 모반 당시부터 조짐을 보였던 광증을 이기지 못하고 폭주하였으며 마수를 불러 조종하여 사람들의 피를 취했다는 내용이었다.

혈육을 학살한 검은 날개의 악마가 재림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외치고 다녔지만, 세피로스는 웃기지도 않는다며 신문을 구겼다. 미레아가 왜냐고 묻자 세피로스는 그답지 않게 사나운 얼굴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며 으르렁거렸다. 덧붙여 자신에게는 그를 욕할 자격이 없으니 이 사태에 대해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거든 차라리 자신을 원망하라 그랬다.

“어쨌든 그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가 맞지만, 그가 아니야.”

당시에 세피로스가 미레아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미레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는 말이었다. 세피로스의 입에서 나온 정보다. 허튼 정보일 리 없었다. 배후가 더 있었다. 미레아는 적어도 그 정도를 알아차릴 머리는 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조문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끝내자 혼자 남은 미레아에게 파울로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파울로는 미레아의 양손을 쥐고는 말을 이었다.

“난 당분간 아이나 지부에 계속 있을 것 같아. 카디가 몸이 회복되기까지 고향에서 요양하고 싶어 해서 내가 곁을 지키고 싶어.”

미레아는 파울로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파울로.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카디 언니를 잘 봐 줘.”

그 말에 오히려 파울로의 안색이 더 좋지 않았다.

“너는 앞으로 어떡할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 봐. 하고 싶은 게 있다거나…….”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계속할 거야. 그쪽은 마수가 습격하지 않았으니까 피해가 없어서 학업에 지장이 있지 않거든. 당분간 기숙사에서 지내려고.”

미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뭣하면 세피로스도 있고.”

세피로스는 그 와중에 팔짱을 끼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파울로는 세피로스가 누군가를 돌볼 만한 성격은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안했다. 그렇다 해도 미레아와 카스카디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그는 카스카디아였다.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미레아에게 죄스러웠고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미레아는 파울로가 싫다 해도 그를 카스카디아의 옆에 붙여 놓을 생각이었다. 카스카디아에게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전부 양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파울로와 이번 일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파울로는 카스카디아를 신경 쓰는 것만 해도 벅찼고 미레아는 속에 있던 것들을 남들에게 더는 꺼내 놓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게 각별하게 지낸 파울로라 해도 말이다.

“난 괜찮아, 파울로.”

괜찮지 않았다.

“혼자여도 노력해 볼게.”

혼자 있기 싫었다.

“그러니까…….”

미레아는 의연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사실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마냥 늘어져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세피로스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괜찮아야 했다.

* * *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식후 입가심 차를 마시고 있는 세피로스에게 쿤둘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미레아 군을 알고 지낸 지 2년 정도 지난 거로 기억하는데 미레아 군은 당시에 이미 아리스에 대한 악감정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의 말을 들어 보니 사건의 경위를 알고 나서도 하루아침에 용서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미레아는 어린 나이에 갑자기 자연재해처럼 덮친 마수에 양친과 동생을 잃었다. 보통은 그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면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의 불씨는 온전히 아리스에게 향했었고 지금도 원성이 자자했다.

“보통 그 정도의 일이 있었으면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사건 자체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텐데…… 그동안 아리스 군에 대한 원망은 안 하던가요?”

“했었어.”

“과거형이네요.”

그 대답에 파울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게 미레아 제인스터의 가장 대단한 부분이지.”

세피로스는 자랑스럽단 얼굴로 씩 웃었다.

“힘이 없어서 아무도 구할 수 없었던 것에 충격을 받은 그 애는 이번에야말로 모두를 구원하려 하거든.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말이야.”

“설령 아리스여도 말인가요.”

“아리스이기 때문이지.”

당시의 아리스는 이용당했을 뿐이다. 미레아는 영리했고 세피로스가 흘린 몇 마디의 단서로 아리스가 처했던 상황을 금방 파악했다. 아리스가 원해서 이런 결과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미레아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특별히 용서라는 것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상황을 이해하고 아리스에 대한 분노라는 감정을 털어 냈을 뿐이다.

보통의 사람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파울로는 세피로스가 미레아를 대단하다고 평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겨서 서로 한참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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