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다친 곳은 없고 무리로 인한 탈진 상태라 하니 누워 있어라.”
당시의 세피로스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그의 긴 은발 머리는 헝클어지고 지저분한 것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평소의 세피로스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함할 만한 행색이었다. 그래서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꼴이 그게 뭐야.”
“기억 안 나나?”
세피로스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자 미레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무슨……?”
그러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휴레오!”
세피로스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려는 미레아를 억지로 침대 위에 다시 앉혔다. 뒤늦게 기억이 밀려 들어왔다. 날카로운 발톱이 지난 자리에 흩어지는 선홍색의 피.
미레아는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있는 곳은 병원의 병실이었다. 밖에서는 다급하게 의사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미레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피로스의 팔을 잡았다.
“휴레오는? 휴레오는 괜찮아요?”
그 말에 세피로스의 눈이 가라앉는 것을 보니 미레아는 자신의 정신 역시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내가…… 휴레오는 괜찮냐고 묻잖아요. 세피로스?”
세피로스는 미레아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지금까지 미레아가 봐 온 세피로스의 모습 중 가장 여유가 없는 얼굴이었다.
“미레아 제인스터. 우선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라.”
세피로스의 큰 손이 붉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레인은…… 신성력으로 마수의 접근을 막아 거리의 시민들이 대피할 수 있게 도왔다.”
“엄마는 신녀를 그만둔 지 오래라 신성력이 거의 없어서 오래 못 버텼을 거예요. 나랑 헤어졌을 때 이미…….”
“그래서…….”
세피로스는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본인은 제대로 대피하지 못했어.”
미레아는 세피로스의 말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미레아가 입을 열기 전에 세피로스는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케이드는 가장 격전지에서 앞장서 싸웠다. 그 누구보다 용감하게. 덕분에 많은 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어. 현재 케이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다.”
“……잠시 대피해서 어디엔가 있을 거예요.”
미레아가 애써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려 그랬지만 세피로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휴레오는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받아 병원까지 운송할 수 있었지만 도중에 과다 출혈로 인한 심정지가 와서…….”
“그만해!”
미레아가 세피로스의 손을 쳐 내며 벌떡 일어났다. 미레아의 얼굴이 백지장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래서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요?!”
세피로스는 기계적인 어조로 정보를 읊었다.
“휴레오 제인스터 사망. 레인 마리어드 사망. 케이드 제인스터 실종.”
“아니야!”
미레아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정했다.
“엄마가 휴레오를 지키라 그랬어! 내가 휴레오에게 지켜 주겠다 그랬어! 내가 휴레오에게 다 괜찮을 거라 그랬단 말이야! 휴레오가 죽었을 리 없어!”
“…….”
“엄마도 자기는 걱정하지 말라 그랬단 말이야! 나한테 거짓말했을 리 없어!”
“…….”
“아빠도 아무 일 없이 돌아올 거야! 아빠가 누구인데! 무슨 일이 있을 사람이 아니잖아!”
“…….”
세피로스의 침묵에 미레아가 아연한 얼굴로 고함을 쳤다.
“내 말이 맞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 보란 말이에요, 세피로스!”
“미안하다.”
세피로스가 시선을 내리깔며 한 말에 미레아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쾅쾅 때렸다.
“그런 말을 바란 게 아니잖아요! 세피로스가 왜 미안한데! 뭐가 미안한데!”
“…….”
“나한테 미안하단 소리 하지 마! 그냥 괜찮다는 소리 하나만 해 달란 말이야!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세피로스는 미레아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흔들면 흔드는 대로 내버려 두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실을 부정하면 뭐가 달라져?”
그 말에 미레아는 헉하고 숨을 들이켜며 굳었다.
“왜, 왜 말을…… 그렇게 해요?”
미레아는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을 손으로 연신 훔쳤다.
“더…… 더, 긍정적인 말이라도 해 주면 안 돼요? 희망은 언제나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렇잖아.”
세피로스는 미레아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였다.
“네가 지금 말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기적이야.”
어차피 지금의 미레아는 세피로스가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병신 문이 다급하게 열리더니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리비엘로였다.
“미레아…….”
자신에게 비척거리면서 걸어오는 그 모습에 미레아의 눈시울도 함께 뜨거워졌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리비엘로의 눈물이 미레아의 옷깃을 적셨고 미레아는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엉엉 울었다.
리비엘로가 본 대로 미레아는 무사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미레아가 무사할 뿐이었다. 다른 것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미레아의 마음 역시 말이다.
리비엘로는 그것이 전부 자기 탓인 것 같았다. 미레아가 무사하기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건 미레아가 무사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미레아는 앞으로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
“미안해, 미레아.”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알고 있을 리 없는데도 미레아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리비엘로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 줄 뿐이었다.
* * *
마수의 습격이 있었던 이틀 후 파울로가 로아메나 지부에 도착했다. 대략적인 소식을 듣고 아이나 지부에서 달려온 참이었다. 미레아의 병실보다 먼저 달려간 곳은 카스카디아 쪽이었다. 그녀가 입원해 있는 곳을 찾아가자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쬐고 있던 카스카디아가 고개를 돌렸다. 파울로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잃었다.
“누구시죠?”
피고름이 흘러나오는 양 눈을 붕대로 가리고 왼쪽 뺨 부분에는 살이 우그러진 큰 상처가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카스카디아는 병실에 들어온 상대가 문을 열고 움직이는 기척이나 말도 없이 멀거니 서 있으니까 의아해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파울로…… 야?”
“……응.”
카스카디아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미레아에게는 다녀왔어?”
그 말에 파울로가 화를 내었다.
“지금 네 꼴을 보고 그런 말이 나와?!”
“아…… 미안해…… 내가 지금 꼴이 말이 아니지……?”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더듬는 카스카디아의 손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도 나는 목숨을 건져서 다행이지만 미레아는 식구들이……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너는 삼촌 같은 사람이잖아. 빨리 가 봐.”
파울로는 카스카디아의 앞에 다가갔다가 멈추었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몸 여기저기가 붕대와 반창고투성이라 어디를 어떻게 안아 줘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변명 같은 말들을 두서없이 나열하고 있는 카스카디아의 머리를 살짝 끌어와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나 얼굴…….”
“미안, 아파?”
“아니, 그게 아니고.”
카스카디아가 코를 훌쩍거리며 웅얼거렸다.
“흉할 텐데…….”
“바보 아냐? 내가 너 얼굴 때문에 만난 줄 알아?”
“바, 바보는 파울로 아니야? 빈말로나마 예쁘단 소리 정도는 해야…….”
카스카디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꺽꺽거리면서 울었다. 눈물이 나와야 하는데 눈이 망가져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미, 미안, 미안해. 내가 눈을 뗀 사이 레인 씨가…… 내가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부, 부장은 행방불명이고 나는, 나는……!”
“너라도 무사하면 됐지…….”
자신의 옷깃에 매달린 카스카디아의 어깨를 다독이다 파울로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카스카디아가 자신의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과 동시에 차라리 두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자신이 어떤 꼴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파울로가 왔단 소식에 카스카디아의 병실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미레아는 그들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기 힘들어서 자리를 떴다.
카스카디아는 레인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탓하였지만, 미레아는 카스카디아를 그렇게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고 자책 중이었다. 카스카디아가 지원군도 없이 혈혈단신의 몸으로 마수들을 막아 주었기 때문에 자신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것이 너무 죄스러워서 감사를 표하는 것도 기만으로 보였다.
자신 때문에 카스카디아는 두 눈을 잃었다. 마수의 앞에 레인을 두고 갔으면서 휴레오마저 지키지 못했다. 휴레오를 지키겠다고 어린 학생들을 버렸다. 그랬으면서 휴레오마저 구하지 못했다.
전부 자신 때문이었다. 포기해서는 안 됐다. 그 누구도 포기해서는 안 됐다. 상황이 그랬다는 것은 변명이었다. 적어도 노력은 해야 했었다.
미레아가 향한 곳은 자신의 집이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것은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탓이지 몸은 멀쩡했다. 미레아는 기운 없는 손을 들어 타일로 장식된 대문을 열었다. 그 소란 속에서 집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으나 한쪽 벽이 허물어져 있었다.
미레아는 벽돌 잔해들을 조심스럽게 피해 손으로 집을 더듬거리다 현관을 열었다. 무너지면서 문틀까지 틀어졌는지 뻑뻑하게 열렸다. 집 안은 유독 휑했다. 한쪽 벽이 뚫려 있어 바람이 들어오는 탓에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미레아는 2층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방 대신 휴레오의 방문을 열었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책상 위에 떨어졌다. 보충수업을 따라가느라 읽고 있던 교과서들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있었다. 발치에 무언가가 채여 밑을 내려다보니 낡은 라디오였다. 미레아가 라디오가 고장이 나 버리려 했던 것을 가져와 고쳐 보겠다고 손보고 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