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82화 (82/257)

82화.

“카디 언니!”

“난 괜찮아! 빨리 가!”

그리고는 마수를 향해 덤벼들었다. 레인이 손을 잡아끌고 달렸기 때문에 미레아는 카스카디아가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둘은 얼마 못 가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이 손을 내젓는 것을 보고는 멈췄다.

“17번가 대피소가 마수에게 파괴되었습니다! 이 뒤쪽으로 가면 위험해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큰 사자처럼 생긴 마수들이 건물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비명을 제대로 지르기도 전에 마수들이 달려왔다. 미레아는 몸이 굳어 다리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레인이 미레아를 자신의 등 뒤로 밀치더니 도망쳐 오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마수를 향해 양손을 벌렸다.

“이 땅에 그분의 영광을!”

그와 동시에 금색 빛이 땅 위에 그림을 그리듯 퍼져 나갔다. 레인은 숨을 헐떡거리며 신성력을 내뿜고 있었다. 한때 서리 교단의 신녀로 있었던 그녀였다. 결혼하면서 교단에서 나왔지만 아직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을 쓸 수 있었다.

마수들은 신성력이 퍼진 땅을 밟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레인은 신녀의 자리에서 내려온 지 오래라 신성력으로 모든 땅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수의 앞길을 막는 것쯤은 가능했다.

“이 틈에 도망쳐!”

레인이 소리치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아났다.

“엄마!”

레인은 등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미레아에게 말했다.

“미레아, 너는 휴레오에게 가.”

“나, 나 혼자?”

“엄마는 여기서 못 움직여. 휴레오를 찾아서 함께 대피소로 피해. 할 수 있지?”

그 말대로 레인은 이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레인의 앞쪽에 포진하고 있는 마수는 신성력이 사라지자마자 레인을 공격할 것이었다.

“엄마를 두고 어떻게 가!”

“엄마는 괜찮아. 다른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어.”

“그래도 나 혼자서 어떻게 휴레오한테 가?”

“그 검만 있으면 너는 잘할 수 있을 거야.”

미레아는 자신이 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미레아의 쌍검은 지난 생일 때 아버지인 케이드가 선물해 준 진검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연습용으로만 썼지 살아 있는 무언가를 벤 적은 없었다.

미레아가 아무리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실전 경험이 없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런 미레아의 마음을 아는지 레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레아, 너는 죽지 않아. 네게 여신의 가호가 너와 함께할 거야. 왜냐하면…….”

레인은 확신이 있었다. 미레아는 여신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리비엘로가 그랬던 것처럼 레인에게도 강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미레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안심하라는 말뿐이었다. 레인은 뒷말을 삼키는 대신 애써 웃었다.

“엄마 믿지?”

“응.”

“그러니 어서 가. 휴레오를 지켜 줘.”

“으, 응!”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미레아는 주춤거리며 레인에게서 멀어졌다.

“뛰어!”

레인의 고함에 미레아는 다시 앞을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휴레오가 다니는 아카데미는 레인의 레스토랑 근처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미레아에게는 뛰어서 갈 만한 거리였다. 미레아는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마수들을 피해 달렸다.

물량으로 승부 중인 마수들에게 라케드와 라라미드가 만들어 놓은 공중 방어진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마법사가 여럿 붙었지만 새발의 피였다. 하늘에서는 죽은 마수가 추락하며 건물 위를 나뒹굴었고 바다에서 기어 나온 마수들 역시 해안을 따라 방어 중이던 라슈발렌 전투부 요원들을 따돌리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대피하라는 사이렌은 계속 울리고 있었고 사방에서는 비명이 난무했다. 미레아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휴레오를 생각하면 울고 있을 수 없었다. 레인은 신성력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케이드는 오로지 실력만으로 전투부 부장의 자리를 꿰찬 능력자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카데미에 있는 휴레오는 달랐다. 휴레오가 가장 무방비한 상태였다.

해안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방심하고 있었다. 기어이 용들을 따돌린 마수들이 미레아를 향해 날아왔다. 나방과 새를 섞어 놓은 것처럼 생긴 마수가 미레아에게 따라붙었다. 마수의 발톱을 피할 수 있었던 건 거의 요행에 가까운 움직임 덕분이었다.

연달아 피하던 미레아는 뒷걸음질 치다가 무언가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레아의 움직임에 공백이 생기자 마수가 땅에 내려앉아 느긋하게 식사를 즐길 준비를 했다. 미레아는 마수의 시선에 충격을 받았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포식자. 그런 시선은 미레아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미레아가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움직이자 마수가 성큼 다가왔다. 미레아의 움직임을 따라 허리에서 금속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레아는 두 자루의 검 중 하나에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미레아는 지금까지 곤충이나 물고기 정도를 제외한 동물을 죽여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검으로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저것은 보호받아야 하는 생명체인가? 아니, 적이다. 자신을 먹으려는 포식자다. 원래는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될 이물질이다. 그렇다면 죄책감이나 거부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없다.

미레아가 망설인 시간은 짧았다. 결론을 내리자마자 두 검을 뽑아 든 미레아는 바로 마수에게 덤벼들었다. 미숙하지만 검기를 실은 공격이 묵직하게 들어갔다. 뇌간의 핵을 찾아 공격하면 바로 무력화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레아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당장 공격 해 오는 다리를 베기 바빴다. 몸을 지탱하던 두 다리를 끊어 놓자 마수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미레아는 숨을 몰아쉬며 마수를 바라보았다.

핵은 뇌간에 있지만, 미레아가 마수의 해부학 구조 따위를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미레아는 검을 들어 마수의 목을 내리쳤다. 검신을 타고 손으로 전해져 오는 감촉이 불쾌했다.

미레아는 마수의 머리에 검을 연달아 내리 꽂아 보았다. 체액이 튀고 마수의 머리가 점점 흉측하게 변해 가자 토할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을 더 내리 찔렀을 때 검 끝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더니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수의 핵이 파괴된 것이었다. 마수는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안심한 미레아는 잠시 앉아서 구역질을 하다 몸을 다시 일으켰다. 아카데미까지 거리가 멀지 않았는데 여기까지 마수가 들이닥쳤으니 아카데미에도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미레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아카데미에 도착한 후 뒤늦게 휴레오가 있는 강의실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주말을 맞은 강의실 대부분은 텅 비어 있었고 그마저도 학생과 교사들은 대피했는지 사람들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휴레오가 무사히 대피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휴레오가 재학 중인 일반 아카데미는 미레아의 모교이기도 했기 때문에 근처 대피소의 위치는 잘 알고 있었다. 미레아는 건물 뒤쪽에 있는 대피소로 향했다. 해일을 피하고자 만들어진 대피소는 상당히 안쪽에 있었다. 강당 건물을 지나고 있는데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미레아는 발을 멈추고 강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강당 정중앙에 늑대처럼 생긴 마수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의 긴 꼬리는 꼭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수와 대치 중인 것은 한 무리의 학생들이었다. 그들 중 눈에 익은 한 명의 얼굴을 확인한 미레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휴레오가 왜 저기 있는 거야? 휴레오는 자신의 등 뒤에 아래 학년으로 보이는 다른 학생들을 숨겨 보호하고 있었고 손에는 어디서 났는지 쇠로 된 지렛대를 들고 있었다.

미레아는 창틀 위를 손으로 잡고 반동을 이용해 유리창을 발로 차 깨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괴성을 지르며 뛰어들어 휴레오의 앞에 있던 마수 위에 올라탔다.

“누나!”

휴레오가 생각지도 못한 미레아의 등장이 경악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자신의 등을 급습한 미레아를 떨치려고 몸을 털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마수의 등에 찰싹 달라붙은 그녀는 검을 들어 아까 만난 나방과 새를 섞은 것 같은 마수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했다.

대충 뇌간이 있을 법한 자리에 검을 연달아 꽂아 넣었다.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수에게 아무렇게나 박아 넣은 검을 뽑을 때마다 살점이 미레아의 얼굴에 튀었다. 마수가 기운을 잃고 털썩 쓰러지자 미레아는 헉헉거리면서 마수의 등에서 내려오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굴렀다.

“누나!”

휴레오가 얼른 미레아에게 다가와 일으켜 세웠다.

“너, 허억, 왜, 헉, 아직도, 여기야?”

거친 숨소리 때문에 발음이 엉망진창이었지만 휴레오는 용케 알아듣고 대답했다.

“저 애들이 대피소까지 못 가고 이곳에 숨어 있길래 도와주다…….”

“네가 지금 남 도와줄 때야?!”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화를 내었다.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겨도 살까 말까 한 판국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고작 쇠 지렛대 하나 들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지킨단 말인가.

“저, 저기…… 감사합니다, 미레아 선배.”

휴레오의 등 뒤에 있던 학생들이 미레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레아는 학생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1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미레아는 잘 모르는 얼굴들이었지만 학생들은 미레아가 일반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때부터 미레아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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