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80화 (80/257)

80화.

“아, 아니야. 모르면 됐어. 나도 그렇게 궁금하진 않으니까…….”

“난 이제 그 화상이 나가 뒈지든 말든 신경 안 쓰련다. 다 알고도 사귄 내가 병신이지.”

어째 둘이 잘 사귀나 싶었더니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그사이 파울로의 나쁜 습관이 다시 나온 모양이었다. 파울로는 모든 여성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절했고, 그 때문에 그럴 의도가 아니라 해도 오해를 사는 일이 빈번했다. 카스카디아가 파울로와 교제하면서 그의 그런 성격 때문에 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전적이 수십 회인데 굳이 상대방에게 묻지 않아도 이건 무조건 파울로가 잘못했을 거다. 미레아는 둘의 애정 전선에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 둘은 벌써 3번이나 깨졌다 다시 사귄 과거가 있었다.

왜 매번 싸우면서 다시 사귀는 짓거리를 반복하는 건지…… 이쯤 되니 미레아는 카스카디아가 대단한 것인지 미련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이럴 바에 정말로 영영 관계 쫑 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미레아는 카스카디아보다 파울로를 알고 지낸 세월이 더 길었으며 파울로를 가족만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도 변론해 줄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기 마련이었다. 미레아는 이 둘의 관계만큼은 무조건 카스카디아의 편이었다.

“네가 성인이었으면 같이 술이나 한잔하는 건데.”

“1년만 기다려. 18살만 되면 언니가 깨질 때마다 술 살게.”

“웃기지 마! 이번엔 다시 안 사귀어.”

“음, 그렇구나.”

카스카디아는 미레아의 귓바퀴를 또 잡아당겼다.

“아야야야.”

“쪼그만 게 건방 떨지 말고 파울로에게 로아메나 본부에 돌아오기 전에 목 닦고 오라고 전해.”

무시하지 않고 손수 목을 칠 정은 아직 남아 있는 걸 보니 다시 사귈 게 확실했다. 미레아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고 열심히 아픈 척을 했다.

“적당히 하고 집에 가.”

카스카디아가 귀를 놓아주자 미레아는 잡혀 있던 곳을 문지르며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하지만 괜히 더 건드려 봤자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작전상 후퇴하는 것으로 정했다.

미레아는 어쩔 수 없이 한 쌍의 검을 손에 들고 털레털레 왔던 길을 따라 트램 정거장에서 차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대로 집에 틀어박혀 있기엔 날이 지나치게 좋았다. 그래서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서리 여신의 신전으로 향하는 트램에 올라탔다.

신전에 도착하자 오전 예배가 막 끝났는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짝지어 나오고 있었다. 어슬렁거리며 신전 안에 들어가니 예배를 봤던 자리를 정리하고 있던 리비엘로가 미레아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미레아.”

“리비!”

미레아가 통통 튀어와 리비엘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리비엘로가 등을 도닥거려 주었다.

“잘 왔어.”

하지만 미레아는 별안간 불평을 토해 냈다.

“갑자기 찾아와서 깜짝 놀라게 해 주려 그랬는데 별로 안 놀라네.”

그 말에 리비엘로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론 놀라는 척이라도 해 줄게.”

한걸음 떨어진 미레아는 리비엘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왜 놀라지를 않아? 네가 놀라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무슨 소리. 나도 놀랄 때가 있어.”

“그게 언제인데?”

“알려 주면 그걸로 장난칠 거잖아.”

“아니? 안 그럴 건데?”

하지만 리비엘로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미레아는 그런 리비엘로를 끌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미레아의 어머니인 레인 마리어드는 록산 시내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다. 둘은 그곳에서 끼니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점심에 가까워지자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제법 따가웠다. 미레아는 눈을 찡그리고 손을 이마에 갖다 대어 그늘을 만들었다.

“이제 여름이네. 나 방학하면 같이 요트 탈래? 주변 섬들을 따라 한 일주일 정도 돌다 올까 하는데.”

“재미는 있을 것 같지만 신전에서 허락해 줄지 모르겠네.”

“그냥 신녀 때려치우면 안 돼?”

“그럼 난 뭐 먹고 살아?”

“지금 그 말은 돈 때문에 신녀 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들켜 버렸네.”

미레아와 리비엘로는 오랜만에 만난 김에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며 서로 까르르 웃으며 거리를 걸었다.

“요트가 별로면 우리 아예 숲으로 가는 건 어때? 아카데미에서 사귄 친구가 자기 고향 숲에 있는 호수가 정말 끝내준다는데 원한다면 우리 가족을 초대해 주겠다고 그랬거든. 너는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 같이 가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리고…….”

미레아가 재잘거리며 떠드는 것을 듣고 있던 리비엘로는 갑자기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몸이 굳었다.

예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발작처럼 찾아오는 그것이 지금 리비엘로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리비엘로의 머릿속으로 방대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바람에 리비엘로는 거의 반쯤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리비!”

리비엘로의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미레아가 받쳤다. 덕분에 리비엘로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해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방대한 정보량이 밀려온 것은 그만큼 정확도가 높은 일이라는 의미다. 게다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예지는 가까운 미래에 있을 일을 뜻한다.

왜 하필 지금?

리비엘로는 미레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리비, 괜찮아? 또 발작증이 온 거야?”

리비엘로의 예지를 단순한 발작 증상으로 알고 있는 미레아가 다급하게 리비엘로의 얼굴을 때리자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무언가가 온다.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정확한 판독이 어려웠다. 정보량이 부족해서 특정 지을 수 없는 것일까? 아니. 아니다. 이것은 그 무언가가 단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것들이 온다! 불길한 것들. 위험한 것들.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삼키러 올 것이다!

“리비?”

미레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리비엘로는 마른세수하고 미레아의 어깨를 잡았다.

“왜…… 대체 왜 이 정도 되는 것들을 진작 읽지 못한 거지……?”

리비엘로는 혼란스러웠다. 이런 대사건은 읽을 수 있으면 몇 시간 전이 아닌 며칠 전이라 해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인제 와서야……? 어지러운 와중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쓰자 가설이 떠올랐다.

“데르, 데르카이드…… 데르카이드가 관련되어 있구나…….”

리비엘로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미레아는 리비엘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리비엘로는 다급한 얼굴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너, 너 검 가져왔지?”

“응? 내 검?”

미레아는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리비엘로의 눈높이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 래…… 그거면 됐어…….”

미레아는 아직 어려 비록 실전 경험이 없었다 해도 검술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무슨 일이 있든 적어도 자기 몸을 지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리비엘로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마 현재 자신만 알고 있을 이 정보의 무게에 짓눌릴 것 같았다.

“리비, 몸이 안 좋은 거면 돌아갈까?”

미레아가 걱정스럽게 건넨 말에 리비엘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알아챈 것을 한시라도 빨리 누군가에게 알려야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을 만한 누군가가 있긴 있을까?

그녀의 눈동자에 혼란이 비쳤다.

“나, 해야 할 일이 생겼어.”

리비엘로가 입술을 달싹이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미레아 너는…….”

거기까지 말한 리비엘로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미레아는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늦은 것이 아닐까?

초조하게 미레아의 얼굴을 본 리비엘로는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미레아 제인스터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레아는 아직 쓰이지 않은 여신의…….

그것은 리비엘로에게 있어서 한 줄기 구명줄 같은 희망이었다. 리비엘로의 눈에 잠깐이었지만 희열이 스치고 지나갔다.

“리비?”

“너는 괜찮을 거야.”

리비엘로는 자신이 말해 놓고 자신에게 되뇌듯 말했다.

“미레아, 너는 괜찮을 거야. 그렇지?”

어딘지 절박하기까지 한 태도에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안 괜찮은 이유가 있겠어?”

그러자 리비엘로의 얼굴에 조금 안심한 기색이 돌았다.

“그래.”

“너희 집으로 돌아가자. 너 누워야 해.”

“아니.”

리비엘로는 보란 듯이 자신의 두 다리로 섰다. 그러고는 미레아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했잖아, 미레아. 그러니 먼저 가 볼게.”

리비엘로는 미레아에게서 뒷걸음질을 치다 이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미레아가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이 사실을 알릴 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리비엘로는 곧장 택시를 세워 잡고는 라슈발렌 본부로 향했다. 세피로스를 찾아야 했다.

* * *

리비엘로와 헤어진 미레아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레인의 레스토랑 쪽으로 가는 트램에 올랐다. 리비엘로의 기색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본인이 괜찮다 하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트램의 창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오늘도 좋은 햇살, 좋은 파도였다. 갈매기를 포함한 바닷새들이 수면 위를 부지런히 날며 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이 따분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조용한 날이었다.

미레아는 살짝 나른해진 상태로 창틀에 기대어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옆에 앉은 사람이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배가 침몰한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미레아는 옆 사람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항구로 들어오던 화물선 하나가 옆으로 크게 기우뚱거렸다. 파도 때문은 아니었고 저곳은 수많은 배가 지나는 항로였기 때문에 암초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화물선은 반동으로 반대편으로도 기우뚱거리더니 그대로 가라앉았다. 가라앉는 속도가 너무 빨라 미레아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트램 승객들이 창문에 달라붙어 안타까움이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록산에 살다 보면 가끔 배가 침몰했단 소식을 듣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이런 해안과 가까운 곳에서 침몰하는 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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