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사건을 모두 들은 세피로스는 우선 사건의 경위보다 결과에 집중했다. 그는 뻑뻑한 눈가를 쓸며 중얼거렸다.
“너희 대체 무슨 일에 휘말린 거야…….”
“저희도 알고 싶습니다.”
쿤둘렌 역시 밀려오는 두통 때문에 가볍게 신음했다.
“그래서, 미레아는 어제부터 저 상태고?”
“그렇죠.”
세피로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너희가 휘말린 사건이 몹시 수상쩍은 것은 둘째 치고, 잘잘못을 가리는 건 지금 단계에서 의미가 없다고 봐.”
그건 모두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너희는 미레아를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
세피로스는 종업원이 면 요리를 내온 후 자신의 잔에 물을 따라 주는 것을 응시하는 동안 말을 멈췄다.
“5년 전 마수 사건 이후로 미레아는 모든 일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네게 5년 전 일에 대해서 미레아가 제대로 말을 해 줄 기회가 없었지.”
그러더니 파울로를 향해 말했다.
“카스카디아가 눈을 못 쓰게 된 것도 자기 탓이라 생각하고 있거든.”
카스카디아는 파울로의 아내 이름이었다. 그녀는 5년 전 마수와 싸우다 얼굴에 큰 흉터를 입고 두 눈을 잃어 시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파울로와 결혼한 것은 시력을 잃은 이후의 일이었지만 교제를 한 기간은 훨씬 더 이전부터였다. 그리고 미레아와도 리비엘로만큼 가깝게 지냈었다.
파울로의 얼굴에 놀람과 당혹감, 그리고 안타까움이 서렸다.
“그게 왜 미레아 때문이에요? 카디는 한 번도 누군가를 탓한 말을 한 적이 없어요.”
“네 말대로 미레아의 잘못은 아니지.”
“카스카디아는 그 상황에서 자신 역시 싸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레아는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우리에게 먼저 말을 꺼낸 적이 없…….”
세피로스는 골치 아프단 얼굴로 파울로의 말을 끊었다.
“본인은 죄책감 때문에 섣불리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 고통스러워서 그래. 그런 상황에서는 자기 입으로 먼저 말 꺼내기 쉽지 않지.”
그리고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미레아는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임무에 지장이 있다면 내 선에서 무마시키겠지만…….”
“대체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쿤둘렌의 질문에 세피로스는 잠시 침묵하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동생…… 휴레오 제인스터와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저울질하다 전부 다 잃었어.”
파울로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세피로스는 먼저 나온 요리들을 자신의 그릇에 덜어 담았다.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식사부터 하지.”
* * *
테나력 3006년, 6월 17일. 그날은 이제 막 초여름에 접어든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록산의 초여름 날씨는 적당히 따사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야외활동을 즐겼다.
심화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며 집을 떠나 있던 미레아 제인스터는 모처럼 휴일을 맞아 집에 돌아와 있었다.
일반 아카데미 과정은 록산에 있는 학교에서 수료했지만 심화 과정은 대도시의 더 수준 높은 학교로 가라는 케이드의 방침이었다. 그래도 기차로 편도 3시간 정도 되는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라 굳이 방학이 아니라 해도 집에 자주 오갈 수 있는 곳이었다.
미레아는 오전 기차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동생인 휴레오를 붙잡았다. 머리가 좋아 지금까지 쭉 성적이 우수하던 미레아였지만 심화 아카데미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마냥 놀고 있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책상에 처박혀서 책과 씨름하는 동안 몸은 땀보다는 잉크 냄새로 찌들었다.
록산에 있는 동안은 거의 매일이라 할 만큼 자주 검술 대련을 했지만 학기가 시작한 이후 검을 잡아 본 적이 없었다. 이러다 몸이 굳을 것 같아 걱정이었던 미레아는 이 기회를 틈타 적당히 근육을 풀어 주기 위해 검을 맞대 줄 상대가 필요했던 터였다.
“휴레오, 한 번만.”
“싫어!”
“살살 할게.”
“그래도 싫어!”
휴레오는 미레아의 애원을 단칼에 쳐 내며 가방을 꾸렸다. 하지만 미레아는 포기하지 않고 가방을 메고 나오는 휴레오의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아이스크림 사 줄게.”
“나는 누나한테 상대가 안 되는데 왜 나를 연습 상대로 삼으려 그래?”
휴레오가 투덜거리자 미레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빠가 없잖아. 그리고 나는 그냥 몸만 움직일 수 있으면 괜찮아. 거창한 건 필요 없어. 검만 들고 있으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엄마한테 해 달라 그래.”
“되겠냐? 레스토랑은 주말에 가장 바쁜 거 몰라?”
“그리고 나 오늘 보충수업 때문에 시간 없단 말이야. 결석하거나 재시험에서 또 떨어지면 엄마한테 죽어.”
“그러길래 한 번에 통과하지 그랬냐.”
“짜증 나, 범생이.”
진심으로 이해 안 간단 얼굴을 하는 미레아에게 휴레오는 짜증이 울컥 솟구쳤다. 성적 우수, 검술을 포함한 운동 실력 발군, 밝은 성격, 예쁜 얼굴. 가질 건 다 가진 자신의 누나에게 설교를 듣는 건 상당히 짜증 나는 일이었다.
“소시민의 마음을 누나가 어떻게 알아!”
미레아는 깔깔 웃으면서 휴레오의 등을 때렸다.
“너는 소시민으로 만족할 거야? 응? 겨우 그 위치에서 머물 거야?”
“아악! 짜증 나!”
휴레오는 팔을 휘저으며 미레아를 떼어 놓았다. 이 이상 놀리면 제대로 골이 날 것 같아 미레아는 적당히 엄살을 부리며 몸을 사렸다. 현관 앞에 세워 둔 자전거를 대문까지 끌고 나가는 휴레오의 뒤통수에 대고 미레아가 물었다.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사 놓을게. 무슨 맛이 좋아?”
“……포도.”
“알겠어.”
휴레오는 미레아를 슬쩍 돌아보고 보란 듯이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언덕길을 빠르게 내려갔다.
미레아는 그런 휴레오가 웃겨서 낄낄거리다 나갈 준비를 했다. 작은 가방에 소지품을 챙겨 넣고 얼마 전에 선물 받은 진검 한 쌍을 들고 트램을 타고 시내로 나갔다. 미레아가 향한 곳은 라슈발렌 협회 본부 건물이었다. 그 안에는 주말에도 초과근무 중인 아버지가 있었지만 정작 아버지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서류 작업을 하며 사무실에 계실 시간인데 얼굴이라도 내비치면 바쁘다고 내쫓길 게 뻔했다.
그래서 미레아는 훈련소와 연무장을 기웃거리며 아는 얼굴이 있나 구경하며 다녔다. 하지만 휴일이라 그런지 휑했다. 적당한 먹잇감을 물색하지 못한 미레아는 연무장 구석에서 입을 삐죽거리고 있다가 땀에 절어 들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휴일에도 나와 훈련 중인 운 없는 전투부 요원들이었다.
아카데미에 가 있는 동안 전투부 요원들은 못 보던 신입들로 채워져 있었다. 연무장을 뛰던 신입 요원들은 훈련소를 제집처럼 휘젓고 돌아다니는 여자아이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신입들이 뛰는 속도에 맞춰 울리던 호루라기 소리가 갑자기 날카롭게 울렸다. 교관인 ‘카스카디아 아카’가 미레아를 발견한 것이었다.
“미레아 제인스터!”
그렇지 않아도 미레아는 질끈 묶은 푸른색 머리카락의 주인이 언제 자신을 발견할지 궁금하던 차였다. 카스카디아의 회색 눈동자가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든 말든 미레아는 천연덕스럽게 손을 높게 들어 붕붕 흔들었다.
“카디 언니!”
“부외자는 나가!”
“내가 부외자야?”
“그럼 뭐겠어? 훈련하는 거 안 보여? 방해 말고 썩 꺼져!”
“구경만 할게.”
“안 돼.”
그 말에 미레아가 퉁퉁 부은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빠한테 이를 거야.”
“일러! 제발 일러! 나야말로 부장님한테 이르고 싶다! 너 여기 왜 왔어?”
카스카디아의 외침에 미레아는 들고 온 한 쌍의 검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나랑 대련 한 번만 해 줘.”
“언니 일하는 중이다.”
“스승님.”
“안 돼.”
“그럼 다른 사람이라도. 새로 오신 분들이랑 인사도 할 겸.”
“네가 신입들이랑 인사해서 뭐 하게?!”
“잘 부탁드린다고?”
카스카디아는 신입 요원들에게 알아서 뛰고 있으라 지시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와 미레아의 귀를 낚아챘다. 그리고 미레아가 아프다고 버둥거리든 말든 그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일렀다.
“여기 온 지 아직 한 달밖에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신입들이 너한테 깨지면 사기가 떨어진단 말이다…….”
“그렇게 인재가 없어?”
“하하하…….”
카스카디아는 이를 악물고 웃었다. 정식 요원도 아니고 전투부 부장인 케이드 제인스터의 딸이라는 신분일 뿐인 미레아 제인스터의 검 앞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진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아빠를 따라 나온 꼬맹이에게 자존심 구긴 사람에는 본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카스카디아는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시 나이 15살짜리 여자애와 무승부라니 굴욕도 그런 굴욕이 없었다.
“너 아카데미는?”
“며칠 시간이 나서 휴일인 김에 집에 잠깐 들렸어.”
“그럼 휴레오랑 놀아.”
“휴레오는 지금 아카데미에 있어. 시험 점수가 낙제점이라 보충수업 걸렸대.”
“다른 친구도 있잖니.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이랑 놀러 가렴.”
“한 번만. 딱 한 번만! 이러다 내 검 녹슬겠어.”
네 검이 녹슬어 봤자 얼마나 슬겠니. 카스카디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천재 꼬마는 자만하는 법이 없었지만 그만큼 귀찮았다. 대체 얼마나 높은 경지에 다다르려고 검을 붙잡고 사는지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언니는 바쁘시고, 신입들은 신입 나름대로 적응하기 바쁘니 귀찮게 하지 말고 썩 사라져.”
“너무해.”
미레아가 울먹이는 시늉을 해도 카스카디아는 꿈쩍하지 않았다.
“부장님 퇴근하시면 그때 상대해 달라 그러던가.”
“아빠랑 하면 한 번도 이기질 못하니까 재미없어.”
카스카디아는 미레아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 표정을 읽은 미레아는 얼른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파울로랑 어때? 아이나 지부로 간 이후 연락은 자주 주고받아? 파견 나간 곳에서는 잘 지낸대?”
카스카디아는 별안간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바람둥이 소식은 왜 내게 묻니?”
한없이 온화한 목소리에 미레아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차, 잘못 걸렸다. 뭔진 모르겠지만 파울로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