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 말에 율비네가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어떻게 제가 감히!”
아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있잖아, 내가 지금 황족 지위도 박탈당하고 완전 개털이거든. 너랑 나랑 동급이란 말이야. 아니, 아니지. 따지고 보면 평민이라 기사 서임을 받은 너보다 한 자리 더 아래란 말이야.”
그 말에 율비네가 아까보다 더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불명예스럽게 쫓겨난 이상 원래의 지위를 되찾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권하기 싫은데.”
“전하!”
“계속 전하라고 부를 거면 너랑 얘기하지 않을 거다.”
그러자 율비네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리스를 전하라고 부르지 않으면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듯했다. 어지간한 일에 당황하지 않는 아리스였지만 율비네가 전처럼 전하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낯간지러웠다.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들어 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환영식에 끼지 못한 사람들이 애써 웃음을 참으며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율비네가 입을 다물자 아리스는 앞서 자신과 마이련어로 대화를 나누던 상대를 일행들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제 외사촌 누나인 류진이에요.”
“안녕하세요.”
진은 쾌활한 목소리로 발음은 딱딱하지만 제법 또박또박 루아드어로 인사했다. 진이 움직일 때마다 귀에 걸린 화려한 귀고리가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짙은 갈색 눈동자에 아리스와 같은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긴 머리를 비녀 하나로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 아랫입술 왼쪽에 찍힌 점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아리스가 이어서 말했다.
“원래는 텔라인 대마수 부대 소속이었어요.”
“저 루아드어 서툴다. 미안, 양해 부탁. 듣는 건 거의 다 알아요. 텔라인은 그만두다? 때려치우다? 이제 안 함. 지금은 프리랜서 마수 사냥꾼입니다.”
진의 환상적인 루아드어 구사 능력에 아리스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진 누나가 말하는 모양새가 저래도 듣는 건 다 알아들으니까 편하게 대화하면 돼요. 그리고 율비네는 제 부관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소식을 주고받았을 땐 마이련에서 내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라슈발렌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류은현 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피로스 님 덕분에 안전한 곳으로 모셨습니다.”
“네 일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입이 무거운 두 사람을 선별했지.”
세피로스는 자신의 물병에 따로 담아 둔 차를 컵에 따라 마셨다. 그러더니 물병을 흔들며 물었다.
“마실 사람?”
다들 독극물이라도 보는 얼굴을 했을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다들 한자리에 있는 김에 설명하자면 아까 말했듯 나는 처음부터 이 일에 참여할 생각이었어. 라케드가 내 대리였던 것이지.”
세피로스의 설명에 일행들이 경청했다. 그는 차를 홀짝거리며 말을 이었다.
“라케드가 본의 아니게 이탈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보니 나도 합류가 빨라졌지. 우리는 클라인의 북동쪽에서 남동쪽으로 이동 중이었어. 땅을 정화할 수도 클라인의 중심부까지 접근할 수도 없었지만, 언제든지 작동 가능하도록 정화기를 설치하면서 이 지역 마수들의 행동 방식을 조사하면서 내려왔지.”
“지금까지 보고하던 내용은 어떻게 받았어요?”
“본부를 거쳐서 받아 봤지.”
“그런데 세피로스 회장님이 직접 움직여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아리스가 의문을 제기하자 세피로스는 좀 뜸을 들이다 답했다.
“이번 일 만큼은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었어.”
그 말에 아리스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단순히 마수의 확산을 막는 임무가 아니었군요.”
“결론만 봤을 땐 여전히 마수의 확산을 막고 마검을 회수하는 것이 목적인 것은 맞다. 그저 내 기분 문제라서…….”
세피로스는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냐는 얼굴이었다.
“너도 다른 사람이 너를 대신할 수 있다 해도 직접 나서는 쪽이 좋았잖아.”
“아뇨. 전 아닌데요.”
“솔직하지 못하긴. 어쨌든 내가 합류했다 해서 특별한 변동 사항이 있는 건 아니야. 기존 임무는 똑같이 진행하면 돼.”
“세피로스 님이 있으니 마음 한쪽이 든든해지네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아리스는 이 일에 관여한 사람들이 속으로는 꿍꿍이가 하나씩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말이다.
대표적으로 쿤둘렌, 라일라, 리비엘로가 그랬다. 쿤둘렌과 라일라는 연구를 위해, 리비엘로는 신탁에 대한 조사차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아리스는 파울로와 시오, 미레아는 호위라 하지만 그들에게도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예상 중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생각만으로 그쳤다.
하지만 세피로스의 속은 정말로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닐뿐더러 일과 관련된 부분 외에 그와 접점이 없었다. 애초에 세피로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용들의 유적에서 칩거하다 세상에 나온 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인간에게 100년은 평생이지만 용에게는 아니었다. 고작 100년이었다.
각설하고, 아리스에게 이번 일에 있어서 목적이 가장 수상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언컨대 세피로스였다. 물론 클라인의 문제는 라슈발렌에 있어서 큰 과제 중 하나였을 것이다. 라슈발렌의 회장이란 지위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공들일 필요가 있을까? 굳이 루아드 제국을 무너트리는 방법을 쓰면서까지 말이다.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서서 사람들을 관망하고 있던 미레아는 지루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추가적인 일이 없다면 나는 먼저 일어났으면 하는데.”
세피로스 때문에 억지로 나오긴 했어도 미레아는 다른 일행들의 얼굴을 보는 게 고역이었다. 특히 아리스를. 그런 미레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스가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려다줄게.”
하지만 미레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에게 비죽 웃어 주고는 차갑게 대꾸했다.
“친한 사람들이 와서 아리스는 참 좋겠네.”
그리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았다. 병실에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자 아리스가 낭패감 짙은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무례한 자로군요.”
아리스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속 편한 소리를 하는 율비네를 쏘아보았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되는 상황이 아니야.”
율비네는 조금 놀란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아리스는 율비네의 행실을 지적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건 율비네가 확실하게 선을 지키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반쯤은 아리스의 방임주의적인 성격이 한몫했다.
그런 아리스가 대놓고 율비네의 행동을 트집 잡는 것은 율비네에게 있어서 대사건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정정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한 모양이로군요.”
아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내가 상당히 곤란한 상황인 거 맞지?”
시오가 머릿속으로 대충 셈하더니 대답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봤을 때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한 달은 저럴걸.”
그 말에 아리스는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리스, 네가 뭘 잘못했는지 난 정확하게 모르지만 말이다.”
세피로스가 충고하겠답시고 나섰다.
“그냥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그러면 용서해 주는 척이라도 할 거야.”
“왜 전후 사정을 듣지도 않고 말씀하시는 거죠.”
“미레아가 진심으로 화를 낼 땐 다 이유가 있거든.”
세피로스가 그렇게 말해도 아리스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딱히 사과할 필요를 못 느끼겠는데요.”
아리스의 태도 역시 미레아 못지않게 단호했다.
“저는 잘못하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잔소리를 더 듣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레아야말로 충분히 머리 식히고 제게 사과할 마음이 생기면 사과하라고 전해 주세요.”
그대로 병실을 나가려는 아리스에게 율비네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모시겠습니다.”
그들이 병실을 나가자 다른 사람들이 크게 한숨 쉬었다.
“너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게…….”
다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세피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파울로를 바라보았다.
“뭐, 환자 앞에서 떠드는 건 이쯤 하고 밀린 보고나 들어 볼까?”
시오의 옆에는 라일라를 남겨 두고 병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세피로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진을 불렀다.
“진, 내가 파울로와 상의하는 동안 숙소에서 먼 길 오는 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있게나.”
하지만 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거리 구경할 거다. 클라인은 오랜만.”
“그건 괜찮은데 길이나 잃지 마라.”
“나 나이 많다. 어린애 아님.”
그렇게 신나서 시내로 향한 진의 뒤통수를 배웅해 준 세피로스는 쿤둘렌, 파울로와 함께 숙소 1층의 식당으로 향했다. 세피로스는 음식을 이것저것 시켜 놓더니 먼저 나온 샐러드를 씹었다. 그리고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파울로와 쿤둘렌에게 물었다.
“너희 미레아가 말렸는데도 누구 하나 죽였구나?”
세피로스의 정확한 예상에 파울로가 소름이 돋은 팔뚝을 긁었다.
“와,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그 애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봐 왔거든.”
“그런 저도 만만치 않은데요.”
파울로의 말에 세피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아직 그 애를 몰라. 게다가 5년 전 마수 대습격 땐 그 자리에 없었잖아. 그 이후에도 3년 동안 부재중이었고. 그래서 무슨 일을 친 거야?”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은 아직 보고 전이었기 때문에 세피로스는 자세한 상황을 몰랐다. 그는 파울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부탁했다.
파울로는 마을 사람들이 조우했다는 수상한 악마, 데르카이드의 이야기와 그들이 본 인간으로 추정되는 괴물들 이야기를 나열했다. 그리고 쥬드가 괴물로 변한 것과 아리스가 그런 쥬드의 목을 친 이야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