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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77화 (77/257)

77화.

휴레오는 밤갈색 머리였다. 쥬드가 밤갈색 머리였기 때문에 처음 보자마자 휴레오가 떠올랐었다. 평소보다 더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분명 그 탓이 제일 컸을 것이다.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되바라진 것도 휴레오를 닮았었다.

쥬드가 흘린 피에서 5년 전의 일이 겹쳐 보였다. 미레아는 아리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미레아 자신도 오답을 선택하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결국, 이것은 자신의 문제였다. 자신에게 이 이상의 힘이 있었더라면, 더 지혜로웠더라면, 더 이성적이었다면, 더, 더, 더…… 강했다면…… 모두를 설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미레아는 이러저러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똑똑똑.

누군가를 만날 기분이 아닌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미레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대신에 더 단단히 이불 속으로 틀어박혔다. 하지만 상대는 미레아의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미안한데 나가 줄래.”

리비엘로라 생각하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와 함께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어온 사람의 기척은 리비엘로의 것이 아니었다. 미레아는 일행 중 방에 들어온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화할 마음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웅크리고 무언의 시위를 했다.

“나 참. 왜 그렇게 죽상이야?”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이곳에서 들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미레아가 이불 틈바구니에서 눈만 빼꼼 내밀었다.

“오랜만이다.”

흰 코트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의 은색 머리카락은 빛을 발했다.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차린 미레아는 이불을 옆으로 차 버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갔다.

“아이쿠.”

미레아가 갑자기 끌어안자 상대방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놀란 기색을 보이면서도 미레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너 우냐?”

“허어어엉…….”

미레아는 뜻밖에 반가운 얼굴을 조우하자마자 서러움이 폭발해 눈물 콧물을 쏟고 있었다.

“세피로스…….”

“그래, 나다.”

세피로스는 자신의 흰색 코트에 눈물과 콧물이 치덕치덕 젖어 드는 것을 보다 못해 미레아의 얼굴을 붙잡고 자신에게서 떼어 내었다. 그는 여행자의 복장치고는 다소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달린 흰 코트에 라케드처럼 용주를 가리기 위해 이마에 푸른 천을 두르고 있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세피로스가 소매로 엉망이 된 얼굴을 벅벅 문질러 주자 미레아는 코를 훌쩍이며 진정했다. 세피로스의 손길은 섬세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탓에 얼굴이 쓸려 아팠다.

“여긴, 어, 어떻게 왔어요?”

아직도 감정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통에 미레아는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자세한 사정은 천천히 듣고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지?”

“세피로스는 혼자 왔어요?”

“아니, 동행이 있어. 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그랬다.”

미레아는 다른 일행들에게 그를 안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와야 했다. 1층으로 내려오자 리비엘로와 처음 보는 두 여자가 함께 있었다.

한 명은 여자치고 키가 매우 커서 미레아보다 머리가 하나 더 위였고, 다른 한 명은 반대로 여자인 걸 고려해도 키가 작아서 정수리가 미레아의 어깨에 닿을까 말까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얼굴을 보니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그들은 쓰고 있던 모자를 슬쩍 올리며 인사했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하는 대신 미레아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미레아 역시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불쾌하진 않았다.

그런데 키가 큰 여자는 모자 밑으로 보이는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생김새였다. 미레아가 어디서 본 얼굴인지 생각하는 동안 세피로스는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주지도 않고 자신의 후드를 다시 뒤집어썼다.

“내 얼굴은 너무 많이 알려져서 불편하다니까.”

그렇게 투덜거린 세피로스의 옆에서 미레아는 그 요란한 코트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냐며 묻고 싶었다. 커다란 후드 아래로 얼굴을 숨긴 세피로스가 물었다.

“그래서 다른 놈들은 어디 있다고?”

* * *

시오는 병상에 누워 신문을 읽고 있었다. 1면을 장식한 대문짝만한 머리기사는 자극적인 말을 뽑아내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이어지는 마수의 습격! 점점 위험해지는 클라인의 주민들,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그것은 쥬드가 있던 마을의 내용을 다룬 기사였다. 기사를 읽던 시오는 입맛이 뚝 떨어져서 신문을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아아, 마음이 치유되는 가슴 따듯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

시오가 앓는 소리를 했다.

“요 며칠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내 뇌가 과부하 되기 일보 직전이란 말이야.”

“우울하고 환자일수록 더 잘 먹어야 해.”

라일라가 시오의 입에 과일을 종류별로 넣어 주었다. 시오는 그걸 좋다고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네가 심란해 봤자 나보다 심하겠냐.”

파울로는 시오가 치워 놓은 신문을 주워 읽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병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밖에 나가서 한 대 태우고 올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울로가 문을 여는데 마침 병실에 들어오려던 리비엘로와 마주쳤다.

“어디 가세요?”

“담배 피우러.”

리비엘로의 옆에는 여전히 죽상인 미레아가 있었다. 미레아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팩 돌렸다.

“숙소에서 쉬지 않고, 왜?”

파울로의 말에 리비엘로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병문안을 오신 분이 있어요.”

쿤둘렌과 아리스는 식량과 바닥 난 생필품을 사러 시장에 나갔기 때문에 병문안이라는 핑계로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파울로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자 문안객들이 리비엘로의 옆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병실에 들어온 세 사람 중 한 명은 후드를 뒤집어썼고 나머지 둘은 처음 보는 여자였다.

“아니, 저기요?”

파울로가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마지막 보고를 받았을 땐 다들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병원에서 재회라니. 그래, 다들 몸은 좀 어때?”

그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세피로스였다.

“회장님!”

시오가 깜짝 놀라 펄쩍 뛰다가 하마터면 벌어질 뻔한 상처 부위를 붙잡고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세피로스가 한심하단 듯 혀를 쯧쯧 찼다. 놀란 건 파울로와 라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피로스 회장님!”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파울로의 물음에 세피로스는 당연한 걸 묻는단 얼굴로 대답했다.

“라케드의 대타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피로스가 대타로 오면 어떡합니까!”

그 간략한 답변에 파울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꽥 질렀다.

“본부 회장직을 공석으로 두면 어떡해요? 이런 데 나돌아 다니는 게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지는 건요? 세피로스는 그렇지 않아도 눈에 너무 띈단 말입니다! 이거 나름 은밀한 임무 아니었어요?”

“그만. 그런 건 라케드 잔소리로 충분해. 내 공석은 벨로아 부회장이 충분히 채우고도 남아. 나도 다 생각이 있단 말이다.”

그는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편안하게 등을 기대었다.

“사실 원래 처음부터 라케드 대신 내가 올 생각이었는데 눈속임이 좀 필요했거든. 그래서 모두에게 말 안 했지.”

파울로가 현기증이 나는 듯 이마를 짚었다.

“아, 너무 걱정하지 마. 이 원정대의 대장은 여전히 파울로 자네니까.”

“제가 고작 대장 못 할까 봐 이러는 줄 아세요?”

파울로는 세피로스의 양쪽에 기립한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

“이분들은 누구십니까?”

“내가 전에 말했던 대(對)마수 응원군.”

세피로스의 짧은 소개에 밝은 갈색 머리를 목 위로 짧게 친 머리를 한 여자가 절도 있는 자세로 차렷 자세를 취하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율비네 엘레시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따듯한 색을 띠는 올리브색 눈동자와는 달리 눈매가 날카롭고 딱딱한 말투인 율비네는 파울로나 시오보다 더 군기가 잡힌 모양새였다. 그 박력 있는 모습에 파울로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책임자인 파울로 리마입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쪽은 시오 미도르. 저격수 포지션이고 저쪽은 라일라 퍼블킨즈로 마도 공학자입니다. 나머지 일행은…….”

그때 파울로의 말을 끊고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지금 왔네요.”

짐을 가득 안고 돌아온 아리스와 쿤둘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손님들이…….”

쿤둘렌이 상황을 파악하려는데 아리스가 이상한 감탄사를 내지르더니 짐을 한쪽에 던져 버렸다.

“율비네! 진 누나!”

눈이 휘둥그레진 아리스에게 율비네의 옆에 있던 검은 머리를 한 여성이 양팔을 벌리며 다가가 꽉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마이련어로 무어라 떠들었다. 아리스도 함께 마이련어로 정신없이 말을 우다다 쏟아 내었다. 다른 사람들은 둘이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방방 뛰는 것을 구경했다. 한쪽과 인사가 끝난 아리스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율비네를 훑어보았다.

“율비네, 잘 지냈나 보구나.”

“전하!”

율비네가 아리스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율비네 엘레시드, 전하를 뵙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율비네의 거창한 인사에 세피로스를 제외한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보았다. 그 행동이 부끄럽다기보단 지긋지긋한 데다 진절머리가 나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아리스가 기겁하며 율비네를 허겁지겁 일으켰다.

“제발 전하라고 부르지 마! 이젠 그딴 거 안 한다 그랬잖아! 어떻게 2년 동안 변한 게 없어?!”

아리스는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자 그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전하를 전하라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부릅니까?”

“내 이름은 뒀다가 뭐에 쓰겠어? 이럴 때 부르라고 있는 게 이름이거든.”

“하지만 본명으로 부르는 건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아리스라고 부르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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