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76화 (76/257)

76화.

미레아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수습할 생각도 못 하고 흐린 시야로 파울로를 바라보았다. 파울로가 수갑 사슬을 잡아끌자 미레아가 질질 끌려갔다. 파울로는 미레아의 손목에 채운 수갑의 반대쪽을 지프에 채워 그녀를 오도 가도 못 하게 묶어 뒀다.

“머리 식히기 전까지는 풀어주지 않을 거야.”

명치를 기습당한 통증에 미레아는 대답은커녕 숨을 몰아쉬는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얕은 숨을 내뱉는 미레아를 끌어다 놓은 파울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위에 깔린 피해자들이 있다더니 사람의 신체 일부가 여기저기 보였다. 쥬드가 변한 거인의 시체는 목과 팔이 잘린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파울로가 연거푸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을 본 아리스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있었는데도…….”

“아리스의 잘못이 아니야. 마을 사람들이 자초한 거야.”

라일라가 눈물을 훔치면서 대신 답했다.

“마을 사람들이 쥬드를 자극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 없었어.”

“아냐, 여차하면 구속구가 소용없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다른 대비책을 마련해 놓지 못했어. 젠장.”

아리스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안이했어. 그대로 의지에 먹힐 줄 정말 몰랐어.”

그리고 설령 먹혔다 해도 제압해서 다시 되돌릴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초기에 잡을 수 있었던 순간을 놓친 것이 뼈아팠다. 그 정도면 구속구에 과부하가 걸리기 전 이미 의지에 의한 잠식이 상당히 진행이 된 상태였을 것이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니 인제 와서 누굴 탓할 수 없어.”

파울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가 자책하는 동안 진통제를 맞고 통증이 가라앉은 시오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게…… 복잡해.”

파울로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시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내가 설명을 이해 못 하는 게 정상이지?”

아리스와 라일라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다른 인간들이 괴물로 변했고 쥬드도 그런 식으로 괴물이 되었단 소리인가요?”

“쥬드와 똑같지는 않지만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새하얀 피부는 비슷했어.”

파울로가 목에서 떨어진 머리로 다가가 왼쪽 눈을 갈라 보았다. 역시나 밤톨만 한 돌이 나왔다. 파울로와 쿤둘렌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아마 쥬드도 같은 원리로 이렇게 됐을 거야.”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나서 파울로는 무심코 날아온 것을 잡았다. 파울로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것은 주먹만 한 돌멩이였다.

“꺼져, 이 악마들!”

돌을 던진 사람이 외쳤다. 뒤늦게 주변을 돌아보니 도망갔던 마을 사람 중 하나인 젊은 여자가 나와 그들을 향해 손에 잡히는 대로 돌을 던졌다.

“이 악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욕설을 퍼붓는 젊은 여자에게 노파가 달려와 황급히 팔을 잡아당겼다.

“아가, 제발 들어가자. 제발!”

“역시 악마였어! 악마에게 죽은 우리 남편은 어떡할 거야!”

“그러지 말고, 응? 너마저 어떻게 되면 어쩌려고 이래!”

그러면서 젊은 여자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외지인들을 들이는 것이 아니었어! 꺼져!”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세요.”

머리를 조아리며 공포 때문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노파,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어 버려 분노와 슬픔 때문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 중년 여성, 그리고 그런 그들을 숨죽인 채 창문과 문틈으로 지켜보고 있는 다른 마을 사람들. 그들은 뒤늦게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비칠지 깨달았다.

“이런…….”

이제는 정말 악마라고 불려도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파울로가 난감함에 턱을 쓰다듬었다.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한 가장 속 편한 해답은 이 지역 치안대에 사건을 넘기고 나 몰라라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치안대로 넘기기엔 사건 규모도 규모지만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파울로 대장.”

쿤둘렌이 부르자 생각에서 빠져나온 파울로가 얼굴을 들었다. 쿤둘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이것으로 마무리 짓고 빨리 철수합시다. 당신이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보다 우선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입니다. 대장은 당신이지만 이번 사건에서 우리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 부분은 알고 계신다 생각합니다.”

쿤둘렌은 파울로에게 지프의 차 키를 건넸다.

“결정하시지요.”

파울로는 열쇠와 쿤둘렌을 번갈아 보다가 어쩔 수 없이 열쇠를 받아 들었다. 입맛이 썼다. 그리고 지프 옆에서 웅크리고 있는 미레아에게 갔다.

“미레아.”

미레아는 지프 옆 맨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거기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

“계속 그렇게 있다가 명령 불복종으로 본부로 회부당하고 싶어?”

“하던가.”

파울로는 미레아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힘 싸움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미레아는 제 다리로 서면서도 고개는 고집스럽게 돌리고 있었다.

“세피로스가 싸고돌아서 잊은 모양인데, 전투 부원으로서 검을 들었으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 미레아는 파울로에게 성을 내었다.

“그럼 이대로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떠난다고?”

“시오가 다쳤어. 응급처치 해서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대로 병원에 보여야 해. 라일라의 몸 상태도 아직 완전하지 않고.”

파울로의 말은 일리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리스가 바위에 걸터앉아 거인의 시체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 리비엘로가 곁으로 왔다.

“잘했어.”

“비아냥이야?”

차가운 어투에도 리비엘로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심이야. 네가 안 했으면 파울로 대장이 했을 거야.”

“미레아에게 제대로 미움받은 것 같아.”

“저 애는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야.”

얻어맞은 뺨을 문지르는 아리스에게 리비엘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어.”

아리스가 리비엘로를 바라보았다.

“쥬드를 마지막으로 깨끗하게 보내 줘. 저 상태로 그냥 둘 수 없어. 저 시체가 그대로 있으면 마을 사람들도 불안해할 거야. 사실 다른 괴물들의 사체처럼 부검해서 조사하고 싶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 애가 너무 불쌍해서…….”

그 말에 아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쥬드의 머리를 몸 옆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왔다. 그리고 한발 물러나 양팔을 넓게 벌리자 아리스의 앞쪽부터 시작해서 푸른 불길이 일었다. 불은 금방 거인의 몸을 전부 뒤덮었다.

미레아는 파울로의 곁에서 불타고 있는 거인을 보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나와 흐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불에 완전히 삼켜진 거인의 재가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올랐다. 남은 것은 검은 그을음뿐. 그곳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던 것 같았다.

제8장 미레아 제인스터

마수 때문에 지역 경제가 죽었지만 그나마 제대로 설비를 갖춘 큰 도시라 칠 수 있는 곳까지 오기까지 장장 하루 이상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서둘렀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노숙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병원에서 제대로 된 진찰을 받은 시오는 억지로 하루 정도 입원해야 했다. 상처를 입은 후 그다지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구르다 보니 상처 부위가 오염되어 경과를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오가 입원해 있는 동안 미레아는 숙소에 처박혀 있었다. 미레아는 아직도 쥬드의 일로 받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다른 일행들과 거의 말을 섞지도 않았다. 미레아는 아침과 점심 식사도 거르고 창문의 커튼을 치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차라리 잠이라도 들면 좋겠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두 눈을 질끔 감고 있는데도 자꾸만 쥬드의 얼굴이 눈앞에서 맴돌았다.

사방으로 뻗친 밤 갈색 머리에 나뭇잎을 잔뜩 달고 다니는 개구쟁이 어린아이. 고작 어린아이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을 아이였다.

그런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쥬드는 죽었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하얀 머리가 피를 흩뿌리며 날아가는 모습은 그만 잊고 싶었다. 끔찍했다. 다들 방법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쥬드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시도해 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일이었다.

그 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낙관론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머릿속이 꽃밭인 것처럼 전부 다 잘 풀릴 거로 생각한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오히려 미레아는 항상 모든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그 이유는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해결책을 미리 생각해 두기 위함이었다. 실현 가능성은 둘째 치고 말이다.

미레아에게 있어서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일을 해결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혹은 수십, 수백이든 상관없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해도 그들을 구원한다는 것을 전제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그것이 힘든 길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미래 따위 오지 않을 게 뻔했다. 지금까지 그런 역사가 있었던가.

하지만 모두가 불가능하다 입을 모아 부정해도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살아온 의미가 없었다. 실패한다 해도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론이라 비웃어도 좋았다.

하지만 그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아리스를 지금 바로는 용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마저 아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휴레오를 배신 한 것이 된다. 휴레오가 자신의 귓가에서 꾸짖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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