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라일라가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그 탓에 정신이 들었는지 쥬드는 팔을 올려 라일라의 손을 치우려 그랬다. 하지만 손과 발에는 사슬이 달린 구속구를 차고 있어서 팔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 못했다. 그 불편한 느낌에 눈을 뜬 쥬드는 적잖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얘, 괜찮니?”
라일라가 최대한 다정하게 물었다.
“제, 제가 어떻게 된 건가요? 제 팔과 다리는 왜 묶어 둔 거예요?”
쥬드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스쳤다. 어제는 아리스와 미레아에게 반말을 하며 거드름을 피우기까지 하더니 오늘은 제대로 겁을 먹었는지 눈치를 보며 존대를 하고 있었다. 시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너 기억 안 나니?”
“무슨 기억이요?”
셋은 걱정스럽게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쥬드의 상태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리스밖에 없었다. 쥬드가 아까 보여 주었던 포악한 행동과 말투는 사라졌고 어제 아리스가 봤던 모습대로 어린아이다운 반응을 보였다.
“너무 걱정 마. 기억이 날아가는 건 정상적인 반응이야.”
아리스는 쥬드의 상체를 받쳐 올려 침대에 걸터앉게 도와주었다. 쥬드는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둘러싼 셋을 올려다보았다.
“자, 우리 이야기를 해 볼까?”
아리스에게는 경계심을 푼 쥬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기분이 어때?”
“내 기분이요? 모르겠어요…… 어지러워요.”
“기분이 들뜨거나 화가 나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어?”
“모르겠어요…….”
“아직도 우리를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연신 고개를 젓는 쥬드를 보며 시오가 중얼거렸다.
“우리 어제 좀 친해지지 않았니?”
아리스의 말에 쥬드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리스는 천천히 하나씩 질문을 했다.
“어제 나랑 헤어지고 바로 집에 간 게 아니었어?”
그 말에 쥬드는 골똘히 생각하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죄송할 일까지는 아니야. 그러면 나랑 헤어진 이후의 기억은 전혀 없다고 봐야겠구나.”
“그런 것 같아요…… 아마.”
“괜찮아. 혹시 어젯밤부터 네가 일어나기 전 사이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떠오르면 우리에게 알려 줘.”
“네…….”
쥬드가 자신의 사지를 구속하고 있는 구속구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린 아리스는 얼른 덧붙였다.
“그건 당분간 풀어줄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해. 대신 얌전히 있으면 불편하지 않게 도와줄게. 그리고 군것질거리도 나눠 주고. 어때? 할 수 있겠어?”
“네.”
쥬드는 얌전히 앉아서 시오가 주는 과일 말랭이를 받아먹었다. 그러는 동안 라일라는 체내의 마력을 측정할 수 있는 기구를 가져오더니 기구에 달린 선들을 쥬드의 머리와 가슴, 등에 붙였다. 그것을 작동시키자 기계음을 내며 계기판의 바늘이 움직였다.
“이상하네.”
라일라가 계기판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린 말을 들은 쥬드가 사색이 되어 물었다.
“제가 뭔가 잘못되었나요?”
“아, 아니야! 네 몸은 정상이야. 네게 이상한 점은 없으니까 무서워하지 마.”
쥬드에게 방긋 웃으며 쥬드에게 달았던 선을 떼서는 아리스에게 똑같이 달았다. 계기판의 바늘이 획 돌더니 가장 끝에 가서 멈췄다.
“이게 정상인데.”
“그게 뭔데?”
“휴대용 마력 측정기. 전에 네게 했던 것보다 간소화한 거야. 쥬드가 체내에 보유하고 있는 마력은 일반인이랑 다르지 않아.”
“흐음…….”
아리스는 팔짱을 끼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가 봤을 때도 쥬드의 마력 흐름은 크게 이상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날개를 봤는데…….”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는 듯했다. 과일 말랭이를 먹어서 그런지 쥬드가 물을 찾았다. 집 안에 있는 물병에는 물이 없었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들의 짐들도 마을 어귀에 세워 둔 지프에 실어 놓은 상태라 물이 든 물병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물의 위치를 쥬드에게 물은 라일라가 물을 떠 오겠다며 물병을 들고 나갔다.
“쥬드야, 지금은 좀 어때? 네가 느끼기에 네 몸이 이상한 것 같지 않니?”
아리스가 아까 전부터 틈만 나면 자신의 상태를 질문하고 있는데도 질린 기색 없이 쥬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때, 한숨을 쉬던 아리스가 갑자기 움찔거렸다. 그가 숨을 죽이고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긴 시오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래?”
“숙여!”
그렇게 외친 아리스는 쥬드를 자신의 몸 아래로 숨겼고 시오는 이유를 묻는 대신 앞에 있던 탁자를 발로 차 쓰러트려 엄폐물을 만들었다. 총소리와 함께 현관문에 총구멍이 났다.
“나는 왜 이렇게 습격을 자주 당할까?”
아리스는 위기감 없는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시오가 반대쪽 벽에 세워 두었던 자신의 총을 발끝으로 쳐 끌어당기며 툴툴거렸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길 바라.”
시오가 살금살금 이동해서 창을 통해 밖을 보니 술 냄새를 풍기는 콜트를 선두로 엽총을 든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덩치가 큰 한 남자는 한쪽 팔로 라일라의 목을 조르듯 붙들고 있었고 다른 남자는 그녀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며 위협하고 있었다.
“저 자식들이 죽고 싶나.”
시오가 살기를 풀풀 풍기며 이를 갈았다.
“외지인들은 들어라!”
철컥하고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기를 버리고 어린애를 내놓지 않으면 너희 동료인 이 여자는 죽는다!”
라일라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목을 팔로 조르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우리가 셋밖에 없으니까 만만했나 본데 당신들 협박할 사람을 잘못 골랐어.”
“조용히 해.”
총구가 라일라의 두피 중 피부가 얇은 부분을 꾹 누르는 바람에 그녀는 짧게 신음을 내었다. 그것이 아리스와 시오의 화를 돋웠다. 특히 시오가 말이다.
“미레아가 쥬드를 죽이지 말라 당부했지 다른 사람들 얘기는 없었지? 그럼 죽여도 될까?”
아리스는 굳이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지만 대신 말리는 시늉은 했다.
“네 실력이라면 그냥 조금 관대해져서 팔다리 하나씩만 못 쓰게 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이런 곳에서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사지가 멀쩡하지 않으면 굶어 죽거든.”
아리스는 자신의 품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쥬드의 존재를 까먹고 있다가 이가 부닥칠 정도로 덜덜 떨었을 때야 알아차렸다.
“애가 무서워하니까 적당히 하자.”
조금만 더 자극했다간 이성을 잃을 것 같은 시오 대신에 아리스가 먼저 나섰다. 시오에게 쥬드를 맡긴 후 아리스는 별다른 엄폐물 없이 검만 들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총구가 그를 향해 일제히 드리워졌다.
“음…… 일단 이유라도 들어 보자. 당신들이 원하는 건 뭐야?”
아리스는 그들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애써 웃어 주었다. 그 당당한 모습에 위축된 건 오히려 마을 사람들 쪽이었다. 개중에 그나마 담력이 세 보이는 사람이 먼저 말했다.
“우리는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 외지인들이 헤집고 다니고 치안대에 말이 들어가면 악마에게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니 조용히 덮고 가겠어.”
“그래서?”
“쥬드는 악마가 들렸어. 쥬드를 넘기면 우리가 조용히 처리하겠다. 그러니 아이를 넘겨.”
“맞다! 악마를 넘겨라!”
“악마를 넘겨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도 악마와 한통속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 악마들!”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우성쳤다.
“넘기면 어떡할 건데?”
“처단할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마을 사람들이 정한 일이다. 네 녀석이 관여할 바 아니니 비켜라.”
“싫어.”
“당신들 동료의 머리에 총알 박히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런 말을 들었지만, 라일라는 자신의 목숨이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아리스가 저렇게 여유로운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을 무사히 구할 자신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신변이 더 걱정스러웠다. 아무래도 아리스는 여기 있는 마을 주민이 전부 멀쩡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자신을 구해 낼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집 안에서는 시오가 총을 겨누고 있을 게 뻔했다. 총에 맞은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리스는 대놓고 멸시하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당신들이 착각한 게 있는데 말이지.”
아리스가 그들에게 성큼 한발 다가갔다. 라일라의 머리가 총에 꾹 눌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첫째, 난 외지인이 아니야.”
그가 검을 빼 들었다.
“원래 클라인에서 살다 이사 갔거든.”
아리스가 검을 허공에 휘두르자 라일라를 겨누고 있던 엽총이 두 동강이 났다. 검이 닿는 거리가 아니라 방심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깨끗하게 잘린 절단면에 얼굴이 굳었다. 푸른 스파크가 잔상을 남겼다 사라졌다.
“마, 마법이다!”
누군가 외쳤다.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총소리가 먼저 들린 것은 집 안쪽에서였다. 시오가 연사한 순서대로 총알에 맞은 엽총들이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 튕겨 나갔다. 아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보란 듯 말했다.
“그리고 둘째, 쥬드는 악마가 아니야.”
총을 잃은 마을 사람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아리스는 라일라를 붙잡고 있는 남자의 앞에 섰다.
“아, 난 주먹질이 싫어. 그러니까 그냥 풀어주지 않을래?”
그 말에 남자가 히익거리며 라일라를 떠밀듯 아리스에게 넘겨주었다.
“괜찮아?”
“응, 다친 데는 없어.”
라일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내게 맡기고 시오에게 가 있어.”
라일라가 안전하게 집 안으로 들어간 것까지 확인한 아리스는 마을 사람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악마에 더 가깝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음습하기 짝이 없는 마을 사람들이 악마 같다고 대답하고 싶은걸. 우리가 일을 키운 게 아니야. 당신들이 키운 거지.”
아리스는 속으로 열심히 생각했다. 지금이야 자신이 보호해 준다지만 아무래도 그들이 떠나면 쥬드는 이 마을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쥬드의 상태가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일행이 돌아온다면 쥬드의 향후 거처에 대해 고민해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