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66화 (66/257)

66화.

“네가 알고 있는 거 다른 사람한테 말한 적 있어?”

미레아의 말에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리스는 마을 주민들이 악마에 대해 쉬쉬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사람이 하나 없어졌는데 공범자 취급을 받길 원하지 않았던 것이겠지.

공물이라는 것에 쥬드의 누나가 선택된 이유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술주정뱅이 삼촌이 유일한 보호자인 어린 남매. 마을에서 없어져도 슬퍼하는 사람이라곤 세상 물정 모르는 동생 하나뿐인 어린 여자애만큼 만만한 상태가 또 어디 있을까.

게다가 사람을 바치는 대가로 마수를 막아 준다고? 그건 또 어디의 사이비 같은 소리냐 이 말이다. 악마가 악마를 만든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아무리 어린애의 말이라지만 과장이 너무 심했다. 이 이상의 고급 정보는 나올 것 같지 않아 아리스는 고글을 다시 쓰며 말했다.

“그렇게 악마가 무서우면 이 마을을 버리고 도망가면 되잖아?”

“하지만 어른들 말로는 이 마을을 떠나도 갈 곳이 없대.”

그도 그럴 게 클라인 일대는 어딜 가도 비슷비슷한 처지인지라 여기를 떠난다 해도 다른 곳의 사정이 더 나은 것도 아니었다. 미레아는 자신이 갖고 있던 아직 봉지를 뜯지 않은 초콜릿을 쥬드에게 선물로 주었다. 쥬드는 벙싯 웃으며 말했다.

“누나랑 형은 좋은 사람이구나!”

초콜릿 하나로 악마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지위까지 올라오다니 감개무량했다.

“빨리 가서 잠이나 자. 어린애들은 잠을 많이 자야 하는 법이야.”

아리스의 말에 쥬드는 곧장 집으로 가는 길을 달려 나갔다. 길에 남은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넌 저 말 믿어?”

“믿겠어?”

둘은 쥬드의 말을 일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다 해도 쥬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지나치게 말도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고 난 들어가서 자련다.”

“나는…… 더 걸을래.”

“혼자?”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가 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밤길 하나 혼자 못 걷겠어?”

그렇게 말하는 대상자는 오늘 혼자 원숭이를 쫓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전적이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미레아는 얼굴이 다시 홧홧해졌고 아무래도 아리스의 묘한 표정을 보니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멀리 안 가고 저기 앉아 있을게.”

미레아가 근처의 개울가를 가리켰다. 하지만 아리스의 표정은 물가에 어린애를 내놓겠단 소리라도 들은 것 같았다.

“대체 뭐가 문제야? 고작해야 오늘 실수 하나 한 것 가지고!”

미레아의 항의에 아리스는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 대책 없이 홀로 마수의 숲을 통과하려고 했음. 거기에 신녀에게 사람 하나 찾아오라는 부탁받았다고 대책 없이 검만 들고 마수의 숲에 뚤레 뚤레 걸어 들어갔음. 대책 없이 성기사들에게 싸움 걸었다가 팔에 총 맞았음. 대책 없이 공중까지 도약했다가 떨어져 죽을 뻔했음. 대책 없이 마수 입에 손을 집어넣어 팔 잘릴 뻔했음. 또 며칠 전에도 대책 없이…….”

“아냐, 내가 잘못했다. 그만해.”

미레아는 손을 휘저은 다음 손부채질을 하였다. 다 맞는 말이었고 반박의 여지가 없었지만 당하고만 있자니 억울했다.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 된 거 아니야?! 너는 뭐가 더 잘난 줄 알아?”

“난 마수 한복판에 던져 놔도 멀쩡하게 살아 나왔고 특히 절벽에서는 떨어질 염려가 없지.”

“너 잘났다.”

그렇게 말하며 미레아는 기어이 개울가로 걸어갔다. 자신의 뒤를 슬렁슬렁 쫓아오는 아리스에게 투덜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쫓아오지 마!”

“통신기는 챙겼어?”

미레아는 안주머니에 있던 통신기를 꺼내 보란 듯이 흔들어 주었다. 그제야 아리스가 피식 웃으며 원래 가던 길을 따라 멀어져 갔다. 홀로 남은 미레아는 개울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애꿎은 돌멩이만 개울을 향해 던졌다.

퐁당퐁당. 돌멩이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밤공기에 울려 퍼졌다.

사람은 다들 숨기는 비밀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리비엘로가 지금까지 비밀에 부쳤던 이유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일쯤은 관대하게 넘어가야 하는데…… 리비엘로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레아는 개중에 제법 큰 돌멩이를 찾아내어 개울에 던져 넣었다.

풍덩!

아까와는 다른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그게 제법 마음에 들었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은 여전했다.

“하…….”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쯤 미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그리고 기지개를 쭉 켰다. 마음이 갑갑하다 해도 여기서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가 복잡할 땐 자는 것도 방법이었다. 오늘 나름의 고초를 겪은 탓에 피곤했다. 어차피 라일라와 리비엘로는 빌린 방 안에서 쉴 테니 내일 아침까지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참 못났다.”

미레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평을 그리 내렸다.

* * *

아침이 되자마자 미레아는 훈련을 핑계로 인적 없는 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실은 리비엘로를 보기 어색해서 피한 것이다. 생각이 많아 잠을 설쳤더니 기분이 좋아지거나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어제와 비슷한 상태였다.

리비엘로에게 아무 일도 없었단 듯 행동할까 아니면 사과라도 해야 할까. 둘 중 답을 고르지 못한 상태로 아침을 먹으러 일행들에게 돌아가는데 커다랗고 빨간 딸기코를 가진 중년의 남자가 저 멀리서 미레아를 보고 달려왔다.

“너!”

다짜고짜 손가락질하는 데다 인상마저 동네 건달 같이 썩 좋지는 못해 미레아는 미간을 구겼다.

“역시 악마였어!”

“네?”

“쥬드가 없어진 게 네 녀석들 탓이잖아!”

“쥬드가 없어졌어요?”

미레아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지만 남자는 완고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 녀석 누나로 모자라서 어린놈까지 잡아가?!”

“그러니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남자가 달려들어 미레아의 멱살을 잡으려고 하자 그녀는 옆으로 몸을 틀어 가볍게 피했다.

“저기, 뭔진 모르겠지만 진정하시고…….”

미레아가 피한 탓에 남자는 혼자 균형을 잃고 어어 하다 땅에 자빠졌다.

“아이고! 이 악마 년이 사람 잡네!”

남자가 땅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미레아는 아침부터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었다. 미친놈에겐 무시가 답이라면서 조용히 꽁지를 빼려는데 남자의 외침을 듣고 마을 주민들이 창문을 열어 내다보거나 밭일하러 가던 길에 멈춰 섰다.

“무슨 일이야?”

“동네 사람들! 역시 이 연놈들은 악마인가 봅니다!”

“네?”

미레아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요?”

“거짓말하지 마라, 이 악마야! 네 일당이 쥬드를 데려갔을 거 아니냐!”

“저는 걔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요…… 애초에 왜 애가 없어진 게 저희 탓이에요?”

“댁들이 온 날 밤에 없어졌는데 그럼 누구 탓이겠어!”

미레아가 남자와 말씨름을 하는 사이 마을 사람들이 세 명 정도 몰려왔다.

“쥬드가 없어져?”

“그게 무슨 말이야? 이봐, 콜트. 침착하게 말해 봐.”

마을 주민들이 땅에 나자빠진 콜트를 부축해서 일으켜 주는 사이에도 그는 시뻘건 얼굴로 소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젯밤에 나가서 들어오질 않아!”

“자네 또 술 마신 거 아니야?”

“술 마신 것은 맞지만 밤사이 쥬드가 들어온 흔적이 없단 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 쥬드 본 사람 있어?”

하지만 마을 주민 셋 중 목격자는 없었다.

“아침 일찍 어딘가에 놀러 갔겠지. 아직 말 안 들을 나이잖아.”

“그놈이 그래도 밤에는 꼬박꼬박 들어오고 아침에는 내가 깨워야 일어나는 놈이야! 염병, 오늘 하기로 한 밭일도 잔뜩 있는데 대체 어딜 간 거야?”

“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볼게. 그럼 됐지?”

하지만 쥬드의 삼촌은 아직도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미레아의 발치에 침을 퉤 뱉었다.

“악마들…….”

미레아가 얼른 발을 빼서 봉변을 당하진 않았어도 기분은 나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니라니까요? 제가 쥬드를 찾아오기라도 하면 저한테 사과하세요!”

“흥, 그것도 찾아왔을 때나 하는 말이지!”

미레아가 야영지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콜트가 한참을 노려보았다. 등 뒤가 따끔거렸다. 미레아는 야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스튜를 끓이고 있는 시오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말했다. 미레아의 말을 들은 시오와 쿤둘렌이 미간을 구겼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3일 정도 푹 쉬기는커녕 아무래도 라일라가 괜찮아지면 이 마을을 뜨는 게 나을 것 같네. 차라리 다른 쉴 곳을 알아봐야겠어.”

“라일라 군은 좀 어떻습니까?”

“열은 어제 약을 먹고 바로 떨어졌고 어제 죽 먹은 이후 속이 불편하지 않았나 봐요. 자는 것 같아서 푹 자게 안 깨웠어요.”

셋이 혀를 쯧쯧 차고 있는데 동네를 가볍게 한 바퀴 달리고 온 아리스와 파울로가 돌아와서 셋의 분위기가 별로인 것을 보고는 의아해했다. 미레아는 그 둘에게도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 말을 들은 아리스가 미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쥬드가 없어졌다고?”

마을 사람들의 무례보다 쥬드의 행방에 대해 반응이 크자 일행들이 아리스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어쩐지 걔 마지막 목격자가…… 저랑 미레아인 것 같아서.”

“하지만 우리가 그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잖아.”

미레아가 억울한 목소리로 말하자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가장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는 마지막 목격자인 법이야.”

아리스가 사실대로 말하자 파울로는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너 그거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마라. 일단 입 다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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