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아까 나가더니 여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시간도 늦었는데.”
“그러는 너야말로 여기까지 나와서 뭐 하고 있었어?”
둘은 또 비슷한 타이밍에 상대방에게 질문해 댔다. 아리스가 먼저 미레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난 그냥 생각 좀 정리한다고…… 그러는 너는 여기서 혼자 뭐 해?”
이번엔 미레아가 손부채질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러다 갑자기 미간을 구기며 입을 꾹 다물었다. 미레아는 아까 일행들에게 떨어져 나와 혼자가 된 이후 계속 걷기만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리비엘로에게 서운한 마음이 쌓여만 갔는데 그게 애꿎은 화풀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도 같이 쌓이는 중이었다.
그래서 종국에는 리비엘로 때문에 속상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너무 수준 이하의 인간인 것 같아 참을 수 없어졌다. 땅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흙을 덮은 다음 그대로 죽고 싶었다.
그러다 갈림길에서 아리스를 마주쳤다. 민망한 기분과 울적한 기분 그리고 자괴감이 적당히 섞이자 자기가 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아니.”
대답하는 미레아의 입꼬리가 축 내려가 있었다.
“리비가…… 5년 전 일도 예지했었대.”
그 말에 미레아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아는데도 막을 수 없었대.”
“그렇구나…….”
아리스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생각해 보면 마수들이 떼로 로아메나 대륙을 습격하는 대사건이 있었는데 리비엘로가 예지로 알 수 있을 만한 전조 증상 정도는 있을 수도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세상 다 산 얼굴이었구나?”
“음…… 내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고 있지?”
미레아는 애써 웃어 보았다. 그 기운 없는 미소에 아리스는 미레아의 등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려다 어색하게 손을 제자리로 돌렸다.
“너도 일찍 쉬지 그래.”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그러고 싶지 않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와중에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서로 눈짓과 턱짓을 하다 아리스가 피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꼬마. 너 거기서 뭐 해?”
“…….”
“너 덤불에 숨어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나와.”
그 말에 덤불 위로 작은 인영이 튀어나와 빽 소리 질렀다.
“어, 어른들은 믿는다 쳐도 나, 난 속지 않아! 이 악마야!”
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아리스에게 붙잡혔던 남자애였다. 분명 이름이 쥬드라 그랬던가. 밤갈색 머리카락에 나뭇잎이 여기저기 달라붙은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개구쟁이인 듯했다. 악마라며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과거에 겪었던 일들과 겹쳐 보였기 때문에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대꾸했다.
“내가 왜 악마냐?”
“…….”
그 반응에 겁이라도 먹었는지 쥬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상대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너무 그러지 마. 얘가 무서워하잖아.”
미레아의 타박에 아리스는 작게 한숨 쉬더니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방금은 무섭게 말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다짜고짜 사람을 악마 취급하면 기분 나쁠 거 아니냐. 입장 바꿔 생각해 봐.”
그 말에 쥬드는 놀랐다. 그가 아는 어른들은 잘못을 지적하면 인정하지 않고 어린놈이 무얼 아냐며 자신의 따귀나 때리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겁을 먹자 바로 사과를 하는 사람이 악마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인정하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쥬드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악마가 아니란 걸 믿으라고?”
“뭐, 네가 안 믿으면 그만이긴 하다만. 솔직히 나야 상관없지만 이렇게 쫓아와서 귀찮게 구는 건 딱 질색이야.”
“그렇다면 좋아. 믿어 주지.”
어린놈이 거만하다. 아리스와 미레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미레아가 쥬드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난 미레아 제인스터야. 너는 이름이 뭐니?”
“쥬드.”
“안녕, 쥬드. 너 어린이가 이렇게 늦게 돌아다녀도 부모님께 안 혼나?”
“나 부모님 안 계시는데.”
“집에 다른 어른은?”
“삼촌…… 이 있지만 매일 밤 술 마시고 잠들어서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아리스는 머리를 긁적이다 미레아의 옆에서 쥬드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뭐, 좋아. 그보다 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악마라 생각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내가 악마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어, 어른들이 악마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안 된다 그랬어.”
그렇지 않아도 파울로 역시 마을 사람들에게 악마에 관해 물었지만 별다른 대답을 듣지 못한 터였다. 아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근데 너 초콜릿 먹을래?”
그 말에 쥬드의 두 눈이 빛났다. 이 마을에서는 초콜릿 같은 군것질거리가 귀했다. 아리스는 허리띠에 매달은 주머니에서 비상식량으로 갖고 다니는 초콜릿을 꺼내 흔들었다. 쥬드는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아리스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든 초콜릿을 낚아채려는데 아리스가 재빨리 손을 위로 올렸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 주지.”
“이익! 악마의 유혹이다!”
“그럼 안 먹을래?”
“……먹을래.”
아리스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는 초콜릿 끝을 떼어 쥬드에게 주었다.
“애한테 좀 치사한 거 아니야?”
미레아에게 어깨를 한번 으쓱한 아리스는 쥬드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여기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악마가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거야?”
쥬드는 초콜릿을 받자마자 입안에 쏙 집어넣고는 일행들이 온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산 너머에 악마가 살고 있어.”
“하지만 우리 일행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악마는커녕 아무것도 못 봤는데.”
“그야 당연히 악마가 모습을 숨기고 있으니 그렇지!”
“흐음…….”
쥬드는 입안에서 살살 녹여 먹던 초콜릿을 꿀꺽 삼키고 아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리스가 쪼갠 조각을 하나 더 주자 쥬드는 그것 역시 입안에 넣고 혀로 데굴데굴 굴렸다.
“악마가 하는 짓을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어서 알고 있는 게 몇 가지 있어. 그리고 어른들이 모르는 것도 난 알고 있지!”
“그래? 그게 뭔데?”
“악마는 커다란 날개를 갖고 있어.”
초콜릿을 잘게 쪼개고 있던 아리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미레아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혹시 또 나냐? 또 내 얘기야? 고글 때문에 아리스의 표정이 가려져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쥬드는 또 손을 내밀었다. 아리스는 그 위에 방금 조각낸 초콜릿을 올렸다.
“그거 혹시 루데키아스 대공자 말하는 거야?”
“그게 누구야?”
천진하게 되묻는 아이의 키를 가늠하며 아리스가 물었다.
“너 몇 살이야?”
“7살.”
5년 전이면 2살이었을 테니 당시 있었던 이야기는 잘 모를 수도 있을 법했다. 아무래도 물어볼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았다.
“루데키아스 대공자가 누구냐면 5년 전에 마수 사태를 일으킨…… 아니, 아니다. 대체 내 입으로 뭘 설명하고 있는 거야.”
쥬드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헝크는 아리스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5년 전은 모르겠고, 악마가 나타난 건 작년이야.”
“그러냐?”
그럼 난 아닌 듯. 아리스는 재빠르게 생각을 정정했다. 그러다 문득 티몬에서 줄레티아가 말한 자신을 루데키아스의 동료라 사칭한 데르카이드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것이 우연일까? 거기다 낮에 만났던 라우노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비슷한 처지의 데르카이드로서 이해해 보려 그랬지만 그래도 수상한 건 수상한 거다.
“그래서, 그 악마는 뭘 하면서 살고 있대?”
“악마는 또 다른 악마를 만들어.”
“악마가 새끼라도 친다는 말이야?”
아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자 쥬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미레아와 아리스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둘이 쥬드에게 얼굴을 들이밀자 둘의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소곤거렸다.
“악마가 어른들에게 공물을 바치라 그랬대. 그 대가로 이 마을을 마수에게서 보호해 주겠다고 그랬다면서. 그리고 그 바친 공물로 악마를 만드는 거야.”
“공물이 뭔데?”
미레아의 말에 쥬드는 우물쭈물하다 울상이 되어 말했다.
“우리 누나.”
“뭐?”
“악마가 우리 누나를 바치라 해서 누나가 끌려갔어.”
아리스는 허리를 다시 펴고 쥬드를 내려보았다.
“그럼 네가 한 말을 종합해 보면 악마가 네 누나를 악마로 만들었다는 소리야?”
쥬드는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대고 쉿쉿거렸다.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너는 어떻게 알았는데?”
“내가 봤어!”
“그러니까 어떻게?”
“어른들은 누나가 외지로 돈을 벌러 나간 거라 말하지만 난 믿지 않아. 나 몰래 대화하는 걸 엿들었는걸! 누나를 악마에게 바쳤다고. 그래서, 그래서…… 어른들 몰래 악마의 숲으로 누나를 찾으러 갔었어.”
쥬드는 누나를 찾으러 숲을 헤매다 죽은 들짐승을 우적거리면서 뜯어먹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너무 무서워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오금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더니 그것은 눈에 초점이 풀린 쥬드의 누나였다.
입가에 묻은 들짐승의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악마의 모습이 있다면 저럴 것이라 쥬드는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의 누나였다. 보고 싶었던 누나였다. 쥬드는 간신히 입을 달싹여 목소리를 쥐어짜 누나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이름을 부르니까 누나는 그대로 등에 달린 날개를 펼치고 날아갔어.”
“음…….”
“누나가 끌려간 이후 마수가 습격한 적이 없는 게 맞긴 하는데…… 어쨌든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쥬드가 어물거리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아리스는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네 누나가 데르카이드인 게 아니고?”
“데르카이드가 뭐야?”
“……날개 달린 사람?”
“그건 악마잖아.”
아리스는 자신의 머리를 헝클다 고글을 벗었다. 그리고 피로가 몰려와 눈가를 비볐다. 어린애한테 물어본 게 잘못이었다. 쥬드가 지금껏 나불거린 것을 중에 제대로 된 정보가 얼마나 될지 회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