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64화 (64/257)

64화.

“절대 불변이 아니란 소리야?”

아리스의 질문에 리비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서리 여신이 성녀의 입을 빌려 전한 내용 중 예언을 제외한 다른 말을 신탁이라 불러.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 네 앞으로 내려진 서리 여신의 말은 예언이 아니고 신탁이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아리스에게 쏠렸다. 그의 푸른 눈이 혼란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뭐라고……?”

“「이 세계에 종말을 가져올 자가 나타났다.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나 하늘을 향해 뻗는 검은 날개를 두려워하라. 그 날갯짓마다 세계는 종말에 가까워질 것이니.」”

리비엘로가 성녀의 입을 빌려 인간들에게 전해진 여신의 속삭임을 읊었다. 아리스는 이미 달달 외우고 있는 내용이었다.

“서리 여신은 네 운명을 정할 수 없어. 그건 네가 서리 여신의 발아래 있지 않은 데르카이드이기 때문이야. 데르카이드가 가진 ‘의지’는 서리 여신이 움직이는 ‘세계의 의지’만큼 강해. 그 때문에 데르카이드는 마석이라는 증폭기 없이도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고 그 때문에 데르카이드는 테나력으로 날을 세기 시작한 이후 3,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여신의 예언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어. 그러니 지금까지 예언이라 알려진 48대 성녀가 받은 서리 여신의 속삭임은 예언이 될 수 없어. 신탁이지.”

“잠깐. 그러니까 내가…… 그러면 48대 성녀가 받은 그 신탁의 의미는 뭐야?”

“그 신탁은 해석의 여지가 있어.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변해. 대표적으로, 다들 루데키아스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신탁에서는 검은 날개를 가진 자의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 다만 그 대상을 너로 특정 짓는 이유는 그 예언이 내린 날이 네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기도 해. 거기에 더하자면, 이 세계의 종말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종말에 대한 정의는? 어찌 되었든 우리 성직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그 신탁이 내린 이유는 검은 날개를 가진 존재에 대해 서리 여신이 인간들에게 전하는 경고라는 점이야.”

“그럼 예언에서…… 아니, 신탁에서 말한 자가 나를 지칭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아니면 내가 종말을 가져온다는 뜻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든가?”

아리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건 서리 여신만이 알겠지.”

리비엘로는 말을 아꼈다.

“그래서, 네가 가진 예지 능력은 그럼 뭔데?”

시오의 물음에 리비엘로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세계는 여신의 의지를 포함해 수많은 생명의 의지가 흐르고 있어. 우주 만물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지. ‘영소’는 그러한 생명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혼 단위야. 영소는 영혼을 구성하고 생명체가 사고할 수 있도록 하는 기원이라 할 수 있어. 그런 영소에서 발생한 의지가 물질계에 간섭할 수 있게 실질적인 힘으로 발현된 것을 마력이라 부르는 거야.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영소들이 만들어 낸 의지들은 서로 부딪히면서 흘러가기 마련이지. 나는 그런 의지들의 흐름이 미래에 어떤 일을 자아낼지 계산하여 읽을 수 있어. 신성력과는 달라. 내가 날 때부터 갖고 있던 능력이었어. 능력이 발현되는 순간은 나도 예측할 수 없어서 정확도가 떨어지는 바람에 라일라에게 부탁해서 마도 기구를 제작한 거야.”

아리스가 날 때부터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듯 리비엘로 역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수많고 다양한 영소들이다. 영소들이 만들어 낸 의지는 서로 간섭하며 흐르기 때문에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가지의 요소를 고려하여 흐름을 읽어 내야 정확한 예지가 가능했다.

하지만 인간의 정보 처리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리비엘로의 능력은 극히 제한된 환경에서만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발성 의지 유속 통합 추론기’라는 마도 기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 기계 덕분에 정확도가 최대 11%까지 올랐다. 상당히 낮은 숫자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예지에서 11%의 정확도란 굉장히 높은 수치였다.

“내가 보는 미래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 현재 시점에서 보이는 영소들의 흐름 속에서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하거나 변한다면 영소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어. 그러니 미래 역시 변하게 돼. 그게 내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야.”

아리스는 일전에 리비엘로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기차에서 그 누구도 마수가 나타났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먼저 대처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궁금했었다. 금방 다른 일들에 정신이 팔려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만 지금 그 일이 다시 떠올랐다. 풀리지 않았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건 지금까지 세피로스 회장밖에 모르던 뒷이야기인데…….”

리비엘로는 자신의 손을 쥐었다 피며 긴장감을 풀었다.

“나는 예지의 능력을 근거로 48대 성녀가 전한 서리 여신의 속삭임이 예언임을 성직자 중 최초로 부정했단 이유로 본교 대신전에서 신녀의 지위를 박탈당할 뻔했어. 어쩌다 보니 일이 괜찮게 풀려 신녀의 지위 자체는 유지되었어도 대신전에서 추방당해 갈 곳 없던 나를 받아 준 것이 세피로스 회장이야. 대신 세피로스 회장에게 협력하겠단 조건이 따라붙었지만 내게 나쁜 것 없는 일이었어.”

“그럼 네가 쫓겨난 후 지금 지내고 있는 신전은……?”

미레아의 의문에 리비엘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회장의 입김이 닿은 곳이지.”

미레아가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리비, 너랑 내가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어. 정확하게는 12년이지. 그럼 록산의 그 신전에서 지낸 지도 12년이 넘은 건데 그때라면 당시에 너는 12살밖에 되지 않았어.”

“맞아. 나는 차기 성녀 후보군 중 하나였기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대신전에서 지내고 있었고 9살부터 예지 능력과 신성력을 발할 수 있었거든.”

“그런데 고작 그런 거로 쫓겨난단 말이야? 그게 예언이 아니라 신탁인 게 뭐가 어때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미레아의 말에 리비엘로는 조소했다.

“그럴 수밖에 없어. 그들에게 있어서 그 속삭임은 신탁이 아닌 예언이어야 해. 왜냐하면, 그 말이 신탁이란 소리는 서리 여신은 이 세계의 운명을 조율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어 버리거든. 여신의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 세계가 끝나 버리는 거야. 서리 여신은 전능하지 못하단 소리라고. 그걸 대신전 고위 성직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지.”

“아니, 잠깐. 그렇다 해도 이상하잖아. 그럼 아리스를 배척한 이유가 뭐야? 그게 예언이라는 전제를 깐다면, 여신의 자의로 세계의 종말을 선고한 거잖아. 그러면 여신의 뜻대로 따르는 게 더…… 맞지 않나?”

아리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시오가 말끝을 흐리자 리비엘로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들이 여신의 말에 무조건 순응할 이유는 없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신께 기도를 왜 하는데. 그들은 서리 여신의 계획을 바꾸고 싶어 했던 거야. 말했잖아. 예언은 유동적이라고. 그렇다면 그 예언을 바꾸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어? 원인이 되는 흑익을 없앤다면 가능하지 않겠어?”

리비엘로는 아리스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네 자유야. 지금까지 네게 말할 기회가 없어서 알려 줄 수 없었어. 분명 너는 이 세계의 존망을 위협할 만한 힘을 타고났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속삭임이 단순한 신탁이라면 너는 처음부터 이 세계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니야. 왜냐하면 서리 여신은 네가 정말로 이 세계에 종말을 가져올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러니 억지로 네 운명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아니, 애초에 바꿀 만한 운명도 없었던 거지. 너는 오로지 네 자유의지로 행동하면 그만인 거야. 처음부터 여신의 속삭임이 내려오지 않고, 네가 네 힘을 휘두를 생각 따윈 품지 않는다면, 네 인생은 그 누구보다 평탄했겠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아리스에게 진실을 알려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미레아와 시오는 아무것도 몰랐었다. 라일라는 마도 기계 개발을 위해 리비엘로의 예지 능력은 알고 있었어도 그 밖의 정보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이 자리에 없는 파울로는 일행을 통솔해야 하니 이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지만 적당한 때가 오기 전까지 함구하라는 세피로스의 명이 있었다.

일행들은 저마다 혼란스럽단 얼굴이었지만 가장 마음이 복잡한 건 아리스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 꼴이 된 게 내가 정말로 개 같은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빌어 처먹을 속삭임 때문에 그렇다는 거지?”

“따지고 보면 그 말이 맞아. 서리 여신의 속삭임이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거야.”

리비엘로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어.”

그는 말없이 리비엘로를 노려보다 갑자기 몸을 돌려 그대로 방을 나갔다. 문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거세게 닫혔다.

“아리스!”

그를 쫓아가려던 미레아를 시오가 붙잡았다.

“아리스가 혼자 생각하며 받아들일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아.”

미레아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다 그대로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미레아. 네게도 말할 수 없었어.”

미레아는 리비엘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내게 미안해?”

“사실 나는 5년 전 마수 대참사도 예지했었어.”

리비엘로가 던진 폭탄 같은 말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어. 내가 예지로 본 것들은 그만큼 일어날 가능성이 큰 것들이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다 해도 바꿀 수 있는 게 없었어.”

그 말에 미레아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미레아는 최대한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튀어나온 말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보고만 있었어……?”

리비엘로의 예상 범위 안에 있던 비난이었다. 하지만 직접 들으니 상처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레아가 격양된 어조로 비난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 부모님이나 휴레오, 그리고 카디 언니는……!”

하지만 지금 와서 탓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미레아는 말을 멈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리비엘로를 보았다.

“지금 내게 이런 말을 해서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고 싶었던 거야?”

“아니.”

리비엘로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모르는 게 마음 편할 거야…… 라는 판단은 내가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실제로 아리스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고. 내가 아는 너라면 분명 너 역시 그쪽을 선택하리라 생각했어.”

리비엘로와 미레아는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알고 지냈다. 리비엘로는 미레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이제 리비엘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터 이야기해 줄 적당한 때를 찾고 있었어.”

“그건 고마워.”

미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시오와 라일라의 만류에도 방문을 벌컥 열었다.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러고는 아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문을 쾅 닫고 나갔다.

* * *

밖으로 나온 아리스는 습관적으로 높은 곳을 찾으려다 멈칫했다. 이곳에서 함부로 날개를 펼 수 없었다. 아리스는 주변을 살피고 다시 고글을 썼다.

아리스는 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정처 없이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러자 밖에 나와 있던 마을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아리스를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쑥덕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라 아리스는 다시 방향을 바꿔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두서없이 걷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갈림길 맞은편에서 미레아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아리스가 소리를 내자 미레아가 손전등으로 아리스를 비추었다. 미레아의 입도 작게 벌어졌다.

“어.”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혹시 나 찾으러 온 거야?”

“설마 나 찾고 있었어?”

둘은 상대방의 말에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자신이 헛다리 짚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밀려오는 민망함에 미레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아리스는 시선을 돌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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