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집주인인 파네라는 중년 여인은 현금을 두둑이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다만 다른 일행들이 전부 들어가 쉴 수 있는 여분의 침대가 없었기 때문에 라일라와 리비엘로를 제외한 일행은 전부 마을 옆에서 노숙 아닌 노숙을 해야 했다.
미레아는 파울로의 화가 조금 가라앉자 부식 지역 안에서의 일을 자세히 보고했다. 파울로와 쿤둘렌은 별 괴상한 말을 다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부식 지역 안에 사는 데르카이드라니요.”
“역시 이상하죠?”
쿤둘렌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 사람이 미레아 군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해가 되는 짓을 했습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문제가 될 만한 점이라고는 별다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음…… 하지만 수상한 건 수상한 거라…….”
미레아가 석연치 않아 하자 파울로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수상한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그에게 신경 쓸 만한 여력이 없어.”
“티몬에서는 참견했잖아요.”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니까. 물론 부식 지역이 없어지면 그가 당혹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 하나 좋자고 부식 지역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모양이고…….”
“라우노 씨에게 다시 찾아가서 자세한 이야기라도 나누는 건 어때요? 나는 이번 일에 대해 발언권이 없어서 나 혼자서는 아무 이야기도 못 했단 말이에요.”
“미쳤어? 마수도 아닌 괴물들이 날뛰는 땅 안으로 들어가라고? 거기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곳이야. 네가 무사히 나온 게 다행이란 말이다.”
부식 지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서 부식 지역 안에 직접 정화기를 설치하는 것이 아니고, 부식 지역을 가운데에 두고 주변 땅에 정화기를 설치해서 정화 범위에 부식 지역을 두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파울로는 다시 험악한 얼굴로 말을 다다다 뱉었다.
“그리고 찾아가서 무슨 말을 하려고? 우리가 ‘부식 지역을 원래대로 재건할 예정인데 이 땅에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하려고?”
“그럼 무시해요?”
“그래, 일단은. 게다가 마석을 하나 줬다며. 그러면 그걸로 거래 끝 아니야?”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쿤둘렌도 동의하고 나서자 파울로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미레아의 이마를 쿡 찔렀다.
“자꾸 일 만들고 다니지 말고 제발 얌전히 할 일만 해라.”
파울로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미레아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마을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고 있었다.
제7장 피조물
“어쨌든 열이 많이 내려서 다행이야. 영락없이 객사하는 줄 알았지 뭐야.”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워 미레아가 떠먹여 주는 죽을 받아먹으며 라일라가 말했다. 마을에서 휴식을 취한 지 이틀째 밤이 되자 라일라는 구토도 멈췄고 열도 완전히 떨어져서 어느 정도 몸 컨디션을 되찾았다.
“해열제를 되찾지 못해서 면목 없다.”
“약이야 마을 분들이 주신 것도 있고 주사제를 잃어버린 거지 먹는 약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너야말로 절벽에서 떨어졌었다며. 내 몸 챙기기 바빠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묻는데 괜찮아?”
“보는 대로 멀쩡해.”
“옆에 있는 사람 심장은 안 멀쩡해.”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집주인인 파네였다.
“혹시 필요한 게 있진 않은지 확인하러 왔어요.”
“아, 아니에요. 침대를 빌려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라일라가 손사래를 쳤다. 미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마을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혼자 오셨어요?”
“네. 그래도 듣던 것보단 환자의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군요. 다 죽어 가는 상태인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라일라의 귀 끝이 빨개졌다.
“우리 마을에 있는 동안 푹 쉬는 대신 몸이 괜찮아지면 바로 떠나 주세요. 사람들이 불안해해요.”
파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럼 쾌차하세요.”
방을 나간 파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미레아가 라일라에게 속닥거렸다.
“친절한 것인지 까칠한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지?”
“우리를 썩 좋아하지는 않나 봐.”
“인간 불신인 태도가 어디의 누군가랑 비슷한걸.”
둘은 아리스를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그러고 보니 너를 도와준 사람이 데르카이드라 그랬지? 어땠어?”
“뭐가?”
“그 사람도 인간 불신이었어?”
그 말에 미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 불신까지는 모르겠고 사람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진 않더라. 서리 여신을 싫어하는 것도 아리스랑 똑같던데. 아, 그리고 온통 새하얀 사람이었어. 날개도 새하얗고, 머리랑 피부도 새하얗고. 말하면서 뒤늦게 생각해 보니까 백익 니콜라우스도 그렇게 생겼을까 싶네.”
“그 사람이 니콜라우스인 게 아니고? 넌 백익이 살아 있다는 음모론을 믿잖아.”
“아하하, 설마. 날개가 하얀 데르카이드가 그 사람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그리고 정말 니콜라우스가 아닌지 물어봤는데 자기는 아니래.”
“만약 진짜 니콜라우스라면 자신의 정체를 그렇게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그때, 누군가가 또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하자 리비엘로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둘 다 시간 괜찮아?”
미레아와 라일라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리비엘로의 뒤를 따라 시오와 아리스가 들어왔다.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은 지레 긴장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설명을 들을 일이 있어서.”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비엘로를 바라보았다.
“무얼 말이야?”
“여신의 예언에 관한 이야기야. 더불어 예지에 대해서도.”
그러자 라일라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리비엘로, 그걸 아리스에게 지금 알려 주려고?!”
리비엘로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도 알 권리가 있으니까.”
“그거, 파울로 대장이나 회장님께 허락받은 거야?”
“내 일을 내가 알겠다는데 왜 다른 사람의 허락이 필요하지?”
아리스의 차가운 목소리에 라일라가 움찔거렸다.
“나에 관한 이야기인데 정작 당사자인 나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끼리 수군거리는 건 이제 질색이거든. 사람 바보 만들고 말이야.”
아리스는 아주 어릴 때 황실 사람들이 왜 자신을 꺼리는지 몰랐다. 다들 아리스를 없는 존재로 치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무리 어렸다 해도 다 느끼고 있었다. 목숨이 위험해질 지경이 되어서야 여신의 예언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허탈했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만해. 지금부터 다 설명해 준다고 했잖아.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
시오가 중재에 나서자 리비엘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나도 이 타이밍에 이 주제를 꺼내는 게 적당한지 모르겠어. 당분간 파울로 대장에게는 내가 말했다는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너는 람이 할 이야기가 뭔지 알고 있었어?”
아리스의 물음에 라일라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고 있는 라일라에게 리비엘로가 말했다.
“내가 아리스와 시오 앞에서 예지 능력을 썼어.”
라일라는 여전히 어쩔 줄을 모르는 눈이었다. 리비엘로를 책망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리스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리비엘로가 사용하는 ‘다발성 의지 유속 통합 추론기’는 내가 발명한 거야. 이 원정대에 내가 참가하게 된 것은 마력을 기반으로 신성력을 반발시켜 부식을 정화하는 마도 기구를 연구한 이유도 있지만 사실 추론기를 발명했단 이유가 가장 커. 그 두 가지 마도 기구를 동시에 연구한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아리스를 포함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라일라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연구는 원래 협회 내에서 기밀이었어. 파울로 대장이랑 쿤둘렌도 이번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야 세피로스 회장이 직접 알려 줬고. 그도 그럴 게…… 그렇잖아. 언제 내릴지 모르는 여신의 예언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이 직접 예지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혁명이지.”
라일라의 말에는 자부심보단 불안감이 묻어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런 게 세상에 나온다면 혁명 이전에 정치적으로 복잡한 일들이 발생할 것이 뻔했다.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왜 만들었냐 하면, 내가 부탁했으니까.”
리비엘로가 아리스의 말을 끊었다.
“내가 만들어 달라 그랬어. 나는 예지 능력이 있거든. 라일라가 만든 추론기는 내 능력을 토대로 만든 거야. 그래서 지금 단계의 기술로는 나 이외의 사람들은 쓸 수 없어.”
리비엘로의 말에 침묵이 맴돌았다. 생각보다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지라 다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리스가 하나 남은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약속대로 자세한 설명 부탁해, 람.”
리비엘로는 라일라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고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파울로 대장과 쿤둘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만 알면 되는 내용이야. 하지만 당분간은 모른 척해 줘.”
일행들은 리비엘로의 말을 경청할 준비가 되었다.
“내가 지금부터 설명할 개념은 예언, 예지, 신탁의 차이야. 보통은 저 셋을 구별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엄연히 달라. 예언이란 것은 서리 여신께서 성녀의 입을 빌려 인간에게 앞으로 있을 일을 전한 말이지. 하지만 그건 앞으로 있을 일이라는 것보다는 계획이란 표현이 더 정확해. 서리 여신의 예언은 여신께서 행하고자 하는 일을 인간들에게 미리 알려 주는 것이거든. 그것이 정말로 일어나는 것은 여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고.”
리비엘로는 자신의 설명이 너무 빠르지 않은지 사람들을 살펴보고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서리 여신의 계획이 바뀐다면 예언 역시 바뀔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