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아리스를 보내고 난 후 케이드는 마법으로 결계를 보완했다.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거치자 그의 마력은 이제 완전히 동났다. 마력 고갈 증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그는 땅에 엎어졌다. 누워서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케이드는 그와 눈을 맞췄다. 비록 죽은 자의 눈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때는 빛을 머금고 있던 푸른 눈동자는 탁하게 변해 공허한 시선을 케이드에게 보냈다.
“하, 하하…… 당신도 꽤나 지독한 꼴을 당했군요.”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방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마라피네스는 눈을 반절만 뜨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일이 걱정되어 완전히 눈을 감지 못한 건가? 그럴 거면 좀 더 살아 보지 그랬어요.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케이드는 점점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이미 죽은 마라피네스를 향해 혼자 대화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이대로 마수의 밥이 되면 주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을까요?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죽어도 곱게 죽어야지…….”
그렇게 말하고는 숨이 차서 한동안 목소리를 골라야 했다.
“젠장…… 마력 고갈 때문에 영소가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슬픈데 그마저도 마수에게 내어주게 생겼네…….”
그리고는 힘없이 기침하는데 어린아이의 것인 것 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 저…….
“……뭐냐. 너 말도 하냐?”
케이드는 페니드란을 보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마침 잘됐네…… 너에게 유언을 남기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줄래?”
하지만 페니드란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 저 역시 대공 각하와 이름 모를 데르카이드 분…… 께서 마수들에게 영소를 흡수당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냐…… 말만이라도 고맙다. 내 유언은…….”
케이드 역시 페니드란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자기 할 말을 하려는데 좀 더 단호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 유언 정도는 직접 전달하세요.
“너…… 아하…… 그러려는 거구나…….”
그 말에 케이드는 무언가를 깨닫고 페니드란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고맙다. 그러면 나는 좀…… 잘게…….”
―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모쪼록 대공 각하와 사이좋게 지내시길 바라요.
케이드는 가물거리는 눈을 감고 후회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레인……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는데…….”
케이드는 마지막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 순간 몸에서 빠져나온 케이드의 영소를 페니드란이 잡아 자신이 품었다. 그리고 마라피네스의 주변에 남아 있는 잔류 영소 역시 흡수했다. 남아 있는 영소가 없으니 마수는 그들의 시신을 탐하지 않을 것이었다. 궁여지책이었지만 이런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셋은 긴 잠에 빠졌다.
* * *
손님들이 입도 대지 않은 찻잔을 치우던 라우노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창가로 다가갔다.
“마니샤, 네 장난이 너무 심하지 않니?”
창문을 열어 주자 노란 털을 가진 원숭이가 펄쩍 뛰어 들어왔다. 원숭이는 라우노에게 갈색 약병을 던졌고 그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받아 냈다. 약병에는 해열제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 애를 보고 싶다 그랬잖아. 그래서 마침 근처에 있겠다, 겸사겸사 데려온 것뿐이야.”
원숭이는 조금씩 덩치가 커지더니 어느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금발의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어두운 구릿빛 피부는 매끈했고 짙은 갈색 눈동자엔 장난기가 다분한 젊은 여자였다.
“니콜라.”
“니콜라라고 부르지 말라 그랬지. 난 이제 니콜라우스가 아니야.”
“하지만 니콜라라고 부르는 쪽이 더 귀여운걸.”
마니샤의 고집에 라우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번엔 도가 지나쳤어.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는데 네가 위험한 짓을 하는 바람에 그 애가 하마터면 절벽에서 떨어져 크게 다칠 뻔했잖아.”
“뭐 어때. 무사하면 됐지. 게다가 그냥 무시할 수 있었던 걸 옳다구나 하고 모습을 드러낸 건 니콜라인 걸. 너야말로 매번 마수의 눈을 통해서 몰래 들여다보지 말라고. 음침하다니까. 게다가 이때다 싶어 마석까지 챙기고. 하여튼 음흉해, 음흉해.”
마니샤는 창문의 커튼 중 하나를 뜯어 가운처럼 몸에 둘렀다. 니콜라우스는 주머니에서 리비엘로가 주고 간 금색 마석을 꺼내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조카를 본 기분이 어때?”
“조카?”
“너는 케이드를 형제라고 부르잖아. 그러면 미레아 제인스터는 형제의 아이인 거 아니야? 그러니까 조카지.”
그 말에 니콜라우스가 피식 웃었다.
“그게 그렇게 되나?”
“그렇지.”
“뭐, 굳이 감상을 말하자면 귀엽네. 이목구비는 레인을 많이 닮았지만 성격이나 그 외의 부분은 케이드를 보는 것 같아. 특히 그 빨간 머리. 케이드랑 똑같아.”
니콜라우스의 붉은 눈이 샐쭉 휘어졌다.
“그렇게 똑같은데 루데키아스는 어째서 눈치채지 못한 걸까? 바보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니콜라우스에게 마니샤가 코웃음을 쳤다.
“빨간 머리를 한 사람이 이 세상 통틀어서 케이드랑 그 사람 딸자식밖에 없는 줄 알아? 게다가 사진으로 봤을 땐 둘의 인상도 완전히 딴판인데 의식하지 않고 보면 모를 수도 있지. 그나저나 너는 케이드를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귀여워?”
“녀석을 닮았으니 귀여운 거지. 게다가 난 케이드를 좋아하진 않지만 싫어하는 것도 아니야. 귀찮은 녀석이었던 것뿐이지.”
마니샤는 니콜라우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미레아가 남기고 간 냉차를 따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니콜라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독 같은 건 타지 않았는데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나.”
“현명하네. 그건 마음에 들었어.”
“머지않아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동생 쪽은 직접 볼 기회도 없이 죽어 버린 바람에 아쉽긴 하지만 만약 그 애도 직접 만날 수 있었다면 내가 좋아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동생 쪽은 네가 죽였잖아.”
마니샤의 말에 니콜라우스의 얼굴에 불쾌감이 어렸다.
“말이 심하네. 내가 죽이다니. 그 녀석이 제 발로 마수에게 뛰어든 거지 난 죽이고 싶지 않았어.”
“흥, 말은 잘해. 그보다 라슈발렌이 저렇게 헤집고 다니는 걸 왜 내버려 두는 거야? 메르티어스 황제가 나한테 불평불만을 얼마나 쏟아 냈는지 알아? 나라면 진작에 다 죽여 버렸을 텐데.”
“성격 급한 동업자는 피곤하군. 계속 설명을 해 주는데도 왜 이해를 못 할까. 나는 굳이 미레아 제인스터를 죽이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이 시점에서 여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아이에게 손을 댈 수 없어.”
니콜라우스는 약병을 위로 던졌다 받는 것을 반복하며 말했다.
“굳이 우리가 움직일 필요 없이 루데키아스가 서리 여신을 죽일 때까지 구경이나 하고 있으면 되는데 말이야.”
“실패하면 어떡할 건데?”
“그때를 위해 마검이 있는 거지.”
그 말에 마니샤는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니콜라, 네가 하는 일이니 알아서 잘하겠거니 생각하고 싶지만 난 그 마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어. 넌 페니드란에 손가락 하나 댈 수도 없으면서 그 검을 어떻게 쓰겠다는 건지. 게다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다음 숙주는 어떻게 구할 거야? 마구잡이로 아무 인간이나 잡아 올 순 없잖아.”
“그래도 지난번 숙주는 그래도 제법 오래 버텼으니 잘 맞았었지?”
니콜라우스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그 녀석 동생이 있던데 그쪽을 써 볼까?”
“그 꼬맹이를 납치해 올 생각이라면 나중으로 미뤄. 흑익 일행이 그 마을에 머물 생각인 것 같으니까.”
하지만 니콜라우스는 그 말에 오히려 반색하였다.
“아니. 지금 그 녀석들은 일행 중 용이 부재중임에도 불구하고 방심하고 있어. 한 달 동안 강행군으로 인해 다소 지친 상태기도 하지. 시제품을 시험해 볼 기회는 지금인 것 같아.”
마니샤가 제정신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오히려 흑익에게 이쪽 계획이나 정체가 노출되면 어떡하려 그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어차피 이것도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야. 적어도 몇 달 안이면 다 끝날 예정이라고. 그전까지 시험체 인간은 네다섯이면 될 거야. 몇 십 년을 거쳐 연구한 결과, 곧 내 인형 군단이 완성된다. 그렇게 되면 아둔한 다른 이들처럼 앞날 같은 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 마니샤. 우리는 데르카이드이니까.”
니콜라우스의 눈이 붉은 루비처럼 빛이 났다.
“내 의지대로 이루어질 거야.”
* * *
라우노가 있던 부식 지역에서 나온 뒤 해가 떨어지고 사방이 컴컴해질 때쯤에서나 마을에 도착한 미레아와 다른 일행들은 파울로에게도 거하게 혼이 났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파울로의 기세가 워낙 사나워서 시오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당히 축약해서 말했다. 평소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허허실실로 웃고 다니던 파울로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보고를 마친 네 사람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딱 한 마디 했다.
“죽고 싶구나?”
그건 화가 난 자신이 죽이겠단 소리가 아니었다.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허튼짓하고 다니다가 비명횡사해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자신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고요하게 화를 내는 파울로에게 말썽꾸러기 네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평소에 밝던 사람이 고요하게 화를 내는 게 제일 무서운 법이었다. 파울로는 그 이상 말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본인들도 잘 아는 내용이라 다시 말할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 사람에겐 그 점이 제일 무서웠다. 그래서 보다 못한 쿤둘렌이 식사 먼저 하고 쉬게 하는 게 어떤지 넌지시 제안했을 때는 눈물 나게 고마웠다. 미레아와 다른 셋은 눈물 젖은 저녁 식사를 하며 쿤둘렌에게 그들의 부재중에 일어난 일들을 전해 들었다.
미레아를 찾으러 갔던 일행들이 없는 사이 마을 주민들은 쿤둘렌을 보고 또 한바탕 악마네 뭐네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그들을 겨우 진정시키고 나서야 라일라는 마을 주민 중 여력이 되는 사람의 집을 빌려 침대에 몸을 뉠 수 있었다.